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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정치를 구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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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정치를 구원할 수 있을까? [프레시안 books] 장은주의 <정치의 이동>
1. 장은주의 <정치의 이동>(상상너머 펴냄)은 일단 굉장히 의욕적인 작품이다. 나는 이 책에서 저자가 펼치는 기본적인 제안들은 대부분 받아들인다. 나만 받아들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사회생활의 전반적인 개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장은주의 기본적인 제안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그의 기본적인 제안들을 대략 정리해서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a. 서구 중심주의를 극복하고, 한국적 방법을 찾아야 한다.
b.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각각 서양에서도 굉장히 복잡다기한 이념들을 뭉뚱그려 부르는 명칭으로서, 일률적인 정의는 불가능하다.
c. 좀 더 세밀하게 말하자면 사회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상통하는 부분들이 많다.
d. 한국의 정치철학은 '정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의가 번역어라고 해서 반드시 이 개념 자체가 서양의 것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e. 존 롤스처럼 분배 패러다임에 매몰된 정의론은 정의를 대표할 수 없다.
f. 분배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서 정의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정치에 주목해야 한다.
g. 분배 패러다임은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를 함축한다. 자유주의 우파와 자유주의 좌파가 모두 (각기 내용은 다르지만) 메리토크라시를 추구하는 셈이다. 카를 마르크스조차 일종의 메리토크라시를 꿈꿨다.
h. 메리토크라시에서 벗어난 정의를 찾아나서야 한다.

이러한 제안들이 얼핏 보면 별로 새로워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반드시 행하지는 않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해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제안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 이러한 전반적인 공감을 바탕으로 이제부터는 좀 따져 보자. 우선, 국가와 시민 사회의 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롤스에 대하여 장은주의 해석이 정확하지 않거나 아니면 정확 여부를 따지기 전에 정합적이지 못하다고 본다.

▲ <정치의 이동>(장은주 지음, 상상너머 펴냄). ⓒ상상너머
2.1 장은주는 "시민 사회라는 개념은 또 다른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개념이다. 애초 이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폴리스, 곧 정치 공동체로서의 국가 개념의 번역어로 서구의 지적 전통에 도입되었지만, 근대 이후 국가로부터 독립되고 또 그 근원성을 주장하는 자본주의적 경제 주체들의 네트워크 같은 것으로 의미가 전도되었다"고 말한다(85쪽).

내가 오독한 것이 아니라면,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함축된 것으로 읽힌다. 고대 아테네의 폴리스라는 정치체의 형태와 근대 국가라는 정치체의 형태 사이에 단절보다는 연속성에 장은주는 주목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경제 주체들"의 존재를 전제하는 형태를 근대 국가에 관한 서양식 이해의 대표로 장은주는 보고 있다.

나는 이 두 가지 입장이-이걸 "입장"이라고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지만-모두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첫째, 폴리스와 같은 고대의 정치체를 우리가 국가의 그림자 안에 투사시켜 바라 볼 수는 있고, 그러한 투사에 의의가 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일반적 가능성은 거의 당연한 얘기이기 때문에 굳이 예를 들지는 않겠다.) 그러나 이러한 투사가 가능하다는 것은 고대에 국가 비슷한 것이 있었다는 뜻에서 그치지, 그것들이 근대에 나타난 형태의 국가들과 어떤 점에서 비슷한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한국어로 이 주제를 파고들어갈 때에는, 언어적 차이 때문에 헝클어짐의 요소 하나가 가중된다. 영어의 경우 "modern state"라는 문구에서 "modern"이라는 한정사는 주로 중세에 나타나던 state의 형태들과 구분하기 위해 붙은 것이다. 얼핏 보면 이 구분을 한국어로 근대 국가와 중세 국가의 구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게 말하는 순간 뒤죽박죽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중세에 나타난 state에는 '영지', '신분', '상태'라는 의미의 비중이 '국가'라는 의미의 비중보다 무겁거나 아니면 적어도 가볍지는 않은 정도로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 14세의 말로 전해지는 "L'Etat, c'est moi"(프랑스어 état와 영어 state는 다같이 estate가 축약된 형태다)로써 "국가는 곧 나다"라는 의미를 말했을 수도 있지만, 프랑스라는 '영지', 또는 프랑스 왕이라는 '신분', 또는 그러한 신분과 영지를 차지하고 있는 '상태'를 루이 14세가 "내 것"이라고 말했을 수도 있다. 후자라면 중세 군주로서 거의 당연한 말을 한 셈이 되는데, 이미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중앙 집권적 관료 체제가 강화되고 있던 시점에서, 루이 14세는 바로 그처럼 강화된 중앙 집권적 "국가"도 중세적 "영지"의 연장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서양사에서 이러한 주장은 헌정주의자들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낳았고, 결국은 (내가 보기에) 대체로 헌정주의자들이 이겼다. 다시 말하면, modern state와 mediaeval state가 질적으로 다르다고 하는 헌정주의적 명제가 승리한 셈이다. 국가(state)와 사회(society) 또는 시민 사회(civil society)를 구분하면서, 국가가 사회의 이익을 반영하고 수렴해야 한다는 상향식 정치관은 이처럼 헌정주의가 태동해서 확립되는 과정과 궤를 같이했던 것이다.

반면에 한국어에서 고대/중세 국가와 근대 국가를 구분해야 하는지를 따지는 관심에는 20세기 이전에 한반도에 존재했던 정치체가 역사 발전 단계에서 어느 정도로 진전된 위상을 가졌다고 봐야 하느냐고 하는 관심이 아주 짙게 섞여 있다. 실제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언제부터 고대 국가의 형태를 갖췄는지를 따질 때, 한국인 학자들이 가급적 시기를 올려 잡으려고 하는 데에는, 고대의 우리 조상이 미개하지만은 않았다고 주장하고 싶은 민족적 변명이 섞여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민족적 변명이 지적 관심을 선도하는 와중에, 헌정주의적 상향식 정치관이 서양의 modern state라는 개념에서 핵심 요소를 구성하는 의미는 희석되더라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둘째, 서양의 근대 정치의식에서, 특히 헌정주의 정치의식에서, 사회가 국가보다 먼저 있었다는 발상이 토대를 이루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생각의 저변에 물론 계약론적인 비유가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헌정주의라고 하든지, 계약론이라고 하든지 (헌정주의와 계약론 사이의 관계 역시 하나에서 다른 하나가 연역되는 관계는 아니다), 자본주의적 경제 주체들의 존재가 전제되는지 여부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 역시 대단히 까다로운 여러 가지 다른 논제들로 쉽게 번져나갈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논지를 좁히기 위해 간단히 분별하자면, 시장의 존재를 곧 자본주의와 동일시하게 되면, 자본주의는 고대나 중세에도 있었던 것이 되며, 실제로 이러한 주장들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이해에 대한 발본적인 반론으로서 주로 미제스와 하이에크에서 비롯된 오스트리아학파 자유지상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다. 이와 달리, 자본주의를 화폐와 신용과 금융과 교역 등이 실제로 광범위하게 유통될 수 있도록 인프라와 제도적 규칙들이 생성된 다음에 나타난 사회경제적 현상으로 보면, 고대나 중세의 시장을 두고 자본주의를 말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의미는 비유적이며 파생적인 수준으로 제한된다.

시민 사회와 국가의 관계와 관련되어 발생하는 "혼란"을 장은주가 폴리스에서부터 찾는 것을 보면, 고대 아테네에 있었던 "시장"도 자본주의적 시장에 해당한다고 보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오스트리아학파는 자본주의의 연원을 고대로까지 확장함으로써 고대의 시장만이 아니라 근대의 시장 역시 국가보다 개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선행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얼핏 보면, 장은주가 바로 이와 같은 오스트리아학파의 관점을 겨냥하여, 자본주의적 경제 주체들이 전제되는 시민 사회라는 개념을 하나의 "전도"라고 부르는 것처럼 보이며, 이렇게 볼 때 장은주의 말에 특별히 부정합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학파의 견해가 서양의 견해를 대표하거나 주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오스트리아학파가 이해한 역사가 바로 서양의 역사인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국가와 시민 사회 사이의 관계가 서양의 전근대와 근대 사이에 질적으로 구분될 필요가 없다고 보는 오스트리아학파의 입장은 헌정주의적 관심에서 나오는 국가/시민 사회의 구분 그리고 그 구분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국가의 임무와 위상에 관한 규범적인 입장을 도외시할 때에나 가능하며, 나아가 하나의 정치적 조망법으로서는 그러한 규범적인 입장을 반박하기 위한 프레임인 것이다.

반면에 장은주가 강조하듯이 시장주의와는 다르게 포착되는 "정의"에 입각해서 국가의 임무를 이해하려는 관심은 (장은주 자신이 이를 헌정주의적 관심이라고 뚜렷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는지 여부는 내게 분명하지 않다) 헌정주의적 관심이 아니라면 무엇과 연결되는지 대단히 궁금하다. 이 문제는 아래에서 자유주의를 논할 때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테니까, 일단은 여기서 접는다.

2.2 장은주는 롤스가 운을 중화하려고 했고, 이러한 그의 입장은 암묵적으로 메리토크라시를 지향하는 분배 패러다임에 머무른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롤스가 운을 어떻게 얼마나 "중화"하려고 했다는 것인지, 그리고 그의 입장이 어떤 방식의 메리토크라시를 지향하며 그것이 왜 문제인지를 치밀하게 따지는 작업에는 무척 소홀하다.

우선 논증의 방식과 관련해서, 장은주가 롤스를 겨냥해서 제기하는 반론 중에는 실망스러운 대목들이 있다. 예컨대, 그는 "재능을 공동 자산으로 봐야 할 근거"(186쪽)가 없다는 이유를 비판적 논거 중 하나로 들고 있는데, 이 말은 롤스에 대해 아마도 맞는 말이겠지만, 롤스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당장 장은주 자신이 제창하고 있는 "존엄"이라는 것 역시 인간을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엄하다고 봐야 할 근거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무슨 대답이 (합리적으로) 가능할지 나로서는 상상 자체가 안 된다. 자주 인용되는 비트겐슈타인의 언표를 하나 빌려다 쓰자면, "정당화는 어디선가 끝나야" 하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도 뒤에서 다시 조금 더 본격적으로 다룰 테니까, 일단은 이를 지적만 하고 넘어가자.

허술한 비판의 다른 예로는, 가령 롤스 같은 사람이 운을 중화하고자 할 때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텐데, 장은주는 마치 바로 그러한 이견의 존재만으로 롤스의 입장이 무너진다고 보는 듯이 말한다. 그러나 이는 전혀 옳지 않다. 어떤 주장은 단순히 반론의 존재만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옳은 반론에 대면했을 때 무너지는 것이다.

장은주가 (그 말고 누구든지) 롤스를 적확하게 비판해서 그의 주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그에게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점만을 지적해서는 안 되고, 어떤 반론들이 어떻게 전개됨으로써 롤스가 말하는 어떤 대목에게 타격이 얼마만큼 가해지는데, 이때 그 대목이 그 주장에서 이만큼 또는 저만큼 핵심 골조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것이 무너짐으로써 전체 구조가 무너진다는 형태로 논증이 이뤄져야 한다.

롤스에 관해 숱한 후속 논쟁이 있다는 사실을 저자는 언급하고, 그것들을 이 책에서 일일이 따질 수는 없다는 점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롤스를 대충 비판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논란을 모두 잠재울 수는 원래 한 권의 책을 써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가 공략하고자 하는 허점이 무엇인지를 벼려서 밝혀내는 일은 일반적으로 가능한 일이고, 누구를 비판함으로써 뭔가 더 나은 이치를 드러내려는 임무를 스스로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업이다.

롤스의 "운의 중화"를 여러 번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와중에서, 장은주는 한 가지 필수적인 구분을 거의 체계적으로 간과한다. 롤스는 재능이나 운을 분배해야 한다고 평면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재능이나 운의 결과도 분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여러 가지 맥락적인 뉘앙스를 담으면서 말하는 것이다. "자연적 자산 역시 사회의 공동 자산"이라고 보는 롤스의 입장이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논쟁에 대해서 상관이 있는지를 분별하기 위해 이 구분은 치명적으로 중요하다.

예를 들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지금 거두고 있는 성공에 관해 타고난 재능과 후천적인 노력과 사회적 운이 각각 얼마씩 작용했는지를 분별하는 방향에는 롤스가 전혀 관심이 없다. 롤스의 관심은 현재 그가 누리고 있는 부와 지위와 명성과 권력도 사회적 재분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가령 디카프리오가 지금 내고 있는 세금보다 더 많은 액수의 세금을 내라고 국가가 명령할 수 있는가를 물을 때, 롤스는 일반적인 차원에서 그러한 세금의 증과는 (물론 일정한 한도 안에서) 정의의 이름 아래서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디카프리오가 세금을 얼마 내는 것이 정의로운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그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자산이 재능의 소산이든지 노력의 소산이든지 아니면 운의 소산이든지 상관없이, 디카프리오 측에서 성공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고 있든지 상관없이, 결과에서 더 많이 가진 측에서 덜어내 덜 가진 측에게 나눠주는 방향의 재분배여야, 정의의 이름 아래 이루어질 수 있는 유일한 방향의 재분배라는 것이 롤스의 논지다.

이를 분별하지 않고, 장은주처럼 롤스가 자연적 재능을 분배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말해 버리면, 가령 우사인 볼트가 100미터를 9.6초에 달리고 임꺽정은 20초에 달렸다고 할 때, 마치 볼트의 기록에서 5초를 덜어내서 임꺽정의 기록에 보태주는 형태에 준하는 분배를 주장했다는 듯한 인상까지 남기게 된다. 롤스의 초점은 어떤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분배를 해야 정의라는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하는 데에 있지 않고, 일반적으로 일차적인 사회적 경쟁의 결과 각자에게 어떤 몫이 돌아갔다고 할 때, 그것이 재능 덕택이든 노력 덕택이든 운 덕택이든 정책적 재분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논증을 펼치는 데 있다.

이 분별은 롤스에서 메리토크라시의 함축을 어떻게 읽어내느냐는 차원에서도 아주 중요하다. 롤스가 꿈꾸는 사회를 메리토크라시라는 프레임에 끼워 맞출 수는 있을 것 같다. 재분배 전에 볼트는 1000억 원을 임꺽정은 1000만 원을 소유했는데, 정치 공동체의 정책적 판단에 따라 재분배를 하고 나니 볼트는 100억 원 임꺽정은 1억 원을 가지는 상태로 바뀌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어떤 평론가가 이 차이를 정당한 업적에 따른 분배라고 보면서 동시에 이것이 롤스가 꿈꾼 상태라고 끼워 맞출 수는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롤스가 이러한 끼워 맞춤을 받아들일까? 업적이든 응분이든 (기타 필요든 욕구든 그 이외 무엇이든), 어떤 하나의 기준으로 정의의 토대를 삼아서는 만족할 만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 롤스가 탐구를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롤스야말로 정의의 실질적 기준은 정치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내려질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 사정은 "업적에 따른 분배"를 정의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자기가 분배받은 몫이 부당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업적이 올바르게 사정(査定)되어 분배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따질 수도 있고, ⓑ애당초 메리토크라시의 원리 자체에 도전할 수도 있다.

이 사람이 ⓐ의 문법을 택한다고 해서 그가 메리토크라시의 원칙을 전심으로 받아들인다고 볼 수도 없고, ⓑ의 문법을 택한다고 해서 그렇지 않다고 볼 수도 없다. 이와 같은 상황은 당사자가 어떤 문법을 사용하고 있든지,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한 관심을 추구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정의의 일반적 원칙이나 기준을 세우기 위해 궁리하는 입법자나 정치철학자의 관심을 여기에 투영해버리면 착오가 발생하는 것이다 (장은주가 그런 착오를 저질렀다는 말이 아니고, 어떤 상황을 메리토크라시로 볼 것인지 말 것인지에 관한 본질적인 불투명성을 롤스는 봤다는 말이다.)

3. 방금 내가 진행한 논의는 사실 서양의 역사나 개념이나 이론을 우리가 이해하는 일이 실제로 우리의 문제를 가급적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에 어떤 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관해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상당히 많이 담고 있다. 그러나 위의 논의는 일차적인 목표가 장은주의 해석을 비판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가 한국의 내부적/맥락적 문제에 대해 어떤 적실성을 가지는지는 전면으로 부각하지 않았다. 아울러 이미 이 논평이 많이 길어졌기 때문에, 다시 공간을 할애해서 그것을 부각할 수도 없다. 독자들의 깊이 있는 독해를 바랄 뿐이다.

이번에는 장은주가 "자유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비판하고자 한다. 장은주는 한편에서 시민적/정치적 권리와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라고 하는 개인들의 인권을 무척 강조한다. 이것이 민주적 공화주의에서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자유주의에 대한 "리얼 진보"의 정처 없는 반감과 클렙토크라시(kleptocracy)를 "자유주의"랍시고 호도하는 기득권 세력의 말장난을 그는 강력하게 성토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른 한편에서는 자유주의를 지양해야 할 이념으로 설정하고, 아울러 한국의 자유주의 세력이 "집권기에 신자유주의를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말았다"고 꾸짖는다.

자유주의와 관련된 오인과 오해, 언어의 남용과 오용, 실체 없는 선전과 내용 없는 반감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그의 태도에 나는 전폭적으로 동의하며 지지를 보낸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가치 가운데 일부를 복원해서 지향해야 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자유주의를 지양해야 할 이념으로 본다는 입장이나, 한국 자유주의 세력의 실패를 과장해서 부각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지금 자유주의의 내용에 대한 장은주의 이해가 부족하다는 면을 부각하려는 것이 아니고 (나는 실제로 그의 이해가 부족하다고 보지만, 지금 그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적 가치 중에 일부를 그 자체의 본령에 따라 변론하면 족한 대목에서, 자꾸만 자기가 자유주의를 전폭적으로 승인하는 것은 아니라는 단서를 붙이려는 태도를 꼬집고 싶은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노무현 정권에 관해 나라면, 예컨대 공판 중심주의를 법제화한 것은 인권의 증진을 위해 중요한 진일보에 해당하지만, 재벌 특히 삼성의 독점적이고 초법적인 행태에 대해 정치권력이 정당하게 강제했어야 할 제약을 게을리 한 것은 잘못이라고 평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될 대목에서, 자유주의 세력이 자유주의적 가치를 일면 확립했지만, 신자유주의에 빠져서 경제적 자유주의를 탈피하지 못했다는 식으로 말하면 취지가 뭉개지고 만다.

이 지적은 말꼬리 잡기가 아니라, 사실 굉장히 중요한 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자유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정치, 국가, 시민 사회, 경제, 도덕, 정의, 기타 등등, 우리가 지금 정치적 담론에서 사용하고 있는 어휘 대다수가 서양어의 번역에서 기원했다고 하는 불가피한 처지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시각으로 논의해서 뭔가 생산적인 결실을 조금이라도 찾아내려고 한다면, 이 차이는 치명적으로 중요하다고 나는 역설하고 싶다.

앞에서 미뤄뒀던 논점, 즉 국가와 시민 사회 사이의 관계에 대해 그가 단순히 어떤 다른 (그러나 자신이 특정하지는 않는) 사람들의 "혼란"과 "전도"만을 언급하면서, 정작 자신의 견해는 표명하지 않는 태도가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권을 강조하기로 했다면, 당연히 헌정주의의 원리를 사회 체제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 하나의 중요한 기둥으로 설정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일관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실제로 장은주가 "민주적 공화주의"라는 문구를 통해서 제창하고 싶은 가치 역시 존 스튜어트 밀이 일생 동안의 문필 활동을 통해 세상에 제출했고, 그것을 이어받아 위르겐 하버마스가 강조하고 있는 공론장의 건강한 질서 이외에 어떤 새로운 내용이 첨가되고 있는지 적어도 이 책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만약 장은주의 "공화주의'라는 것이 건강한 공론에 크게 의존한다는 내 독해가 맞다면, 이 입장은 기본적으로 국가에서 독립된 시민 사회의 영역을 중시한다는 말이 된다.

그럼에도 장은주는 자기가 헌정주의, 즉 절차적 민주주의를 주창한다는 인상도 남기지 않으려고 (거의 의도적으로) 노력하며, 공론장의 건강한 질서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는 인상도 남기지 않으려고 (역시 거의 의도적으로) 애를 쓰고 있는 듯이 내게는 보인다. 이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

자유주의가 무엇인지에 관해 학자들과 정치인들 사이에서 무한한 갈래의 논란이 있다. 이러한 사정은 내가 방금 언급한 헌정주의나 공론의 건강한 질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고, 장은주가 제창하려는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항목들에 관해 어떤 교과서를 쓰는 입장에서는 각 항목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을 있는 그대로 모아 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시각들 가운데에는 서로 충돌하는 것들도 있고, 비판적으로 검토했을 때 정합적인 내용이 없는 것들도 있지만, 교과서를 쓰는 입장에서는 언필칭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서술을 유지하기 위해 비판적 검토를 생략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구체적인 사안을 앞에 두고 뭔가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자유주의"든 또는 어떤 다른 단어든, 자신의 시각 안에 용해된 의미를 표현하는 방향으로 사용해야지,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어떻게 보이느냐는 의미를 위주로 해서는 소통에 기여할 수 없다. 나아가 위에서도 예시했듯이, 구체적이고 맥락적인 사안에 관한 판단을 표명하는 데에 "자유주의"라는 용어는 (변호하는 방향이든지 비판하는 방향이든지) 너무나 모호해서 실질적인 내용을 담기가 매우 어려우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지식인들이 주제의 세부 사항을 꼬치꼬치 파고들어가지 않고, 일반 범주를 지칭하는 단어들을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공론장의 역할이 국가 권력에게 압도당할 위험이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4. 서구 중심주의도 극복하고, 메리토크라시와 분배 패러다임에서도 탈피하며, 자유주의도 지양하자고 제창하고 나서 장은주가 제시하는 대안(?)은 민주적 공화주의이다. "민주적 공화주의"라는 기치 아래서 그는 민주주의적 정의가 토대적 정의이고, 마이클 샌델 식으로 어떤 "좋은 삶"의 모형을 전제하기보다는 "정치적 구성 과정에 들어 있는 부당한 권력관계 또는 지배-종속 관계를 비판적으로 확인해 내고 극복을 추구하는"(191쪽) 데에 초점을 맞추자고 제안한다.

그런데 "부당한 권력관계 또는 지배-종속 관계를 비판적으로 확인하고 극복하는" 작업은 어떤 기준에 의해 인도되어야 할까? 가령 이렇게 물어보자.

이명박이 느닷없이 독도를 방문한 행위는 "부당한 권력"의 행사인가? 박근혜가 공천 뇌물 사건을 "개인 비리"로 축소하고자 하는 장면에서, 어떤 지배-종속 관계가 비판적으로 확인될 수 있을까? 김두관이 경상남도 도지사직을 버리고 (별로 승산도 없어 보이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공천 경쟁에 뛰어 든 행위는 민주주의적 정의에 해당하는가 아니면 민주주의적 정의에 어긋나는 행위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민주주의적 정의와는 상관이 없는 행위인가?

장은주가 "탁월하다"고 평가하는 아이리스 영의 작품이 이 대목에서 좋은 비교의 준거가 된다. 영의 책은, 내가 보기에, 철학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따지기에 앞서서, 기본적으로 하나의 정치적 논고다. 성별과 피부색 그리고 여타 차이들을 차별의 기준으로 활용하는 지배적 권력을 비판적으로 확인해서 고발하고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규범적 처방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장은주의 책에서, 적어도 나는, 이에 비견할 만한 어떤 정치적 메시지가 형상화되고 있는지 찾기 어렵다.

내가 찾을 수 있는 정치적 메시지로는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은 메리토크라시를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클렙토크라시에 불과하다는 정도가 사실상 유일하다. 그러나 이 메시지 역시, 구체적으로 누가 도둑질을 어떤 방식으로 어떤 규모로 하고 있는지를 분석해서 "비판적으로 확인하는" 경로로는 표명되고 있지 않다.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저자가 투사한 하나의 이미지로서 클렙토크라시라는 용어만이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장은주는 (내가 보기에 올바르게) 분배 패러다임과 메리토크라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치에 주목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실지로 이 책은 정치에 충분히 주목한 결과는 아닌 성싶다. 자신의 작업을 장은주는 분명히 정치철학의 한 사례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책을 관통하는 주도적 관심은 정치라고 하는 괴물의 내면을 파고드는 방향이 아니라, 그 외양에 관해 관찰자적 입장에서 비평을 주고받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정당화의 근거를 빠짐없이 확보하기 전에는 구체적인 처방을 내놓을 수 없다고 염려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앞에서 인용한 비트겐슈타인의 언표를 약간 다르게 번역해서 말해보면, "정당화는 어디선가 끝날 수밖에 없다." 여성에 대한, 유색인에 대한, 노동자에 대한, 기타 온갖 사회적 소수 집단에 대한 지배와 차별을 나는 배격한다. 이러한 나의 입장은 철학적 입장이기 이전에, 정치적이고 도덕적이며 처방적인 입장이다.

어떤 사례에서 내가 지배와 차별을 읽어내는지, 그러한 사례와 관련해서 나의 정치적/도덕적 입장을 내가 어떻게 정당화하는지는 물론 사례가 주어진 다음에나 말할 수 있다. 단, 일반적으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각 사례에서 나는 상당히 집요하게 내 나름의 정당화 논거를 제시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지점에서는 정당화가 동나게 되리라는 점이다.

정당화가 동나는 지점은 철학의 역할 역시 끝이 나고, 삶이 맨살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예컨대, 정체성의 경계에 따른 차별에 영이 분개하고, 인권의 중요성을 장은주가 외칠 때, 나는 이들에게 동조하는데, 이 동조의 궁극적인 원천은 그들의 철학적 정당화에 내가 설득되었기 (나는 사실 장은주뿐만 아니라 영에게 관해서도 철학적으로 말하기로 한다면 동조보다는 비판할 구석이 훨씬 많다) 때문이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들의 노력에 힘을 보태 주는 것이 선한 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나의 이러한 입장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해야 한다는, 따라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라는, 어떤 공리에서 연역된 것이 아니다. 장은주의 목소리와 영의 분개에 동조하는 사람은 그로써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스스로 창조하고 실현하며, 그러지 않는 사람 또한 그로써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스스로 창조하고 실현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동조의 편을 드는 것이다.

이 갈림길에서 철학이 기여할 수 있는 최대한은 하나의 결단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고, 그 결과에 대해 어떤 식으로 해석이 분분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데서 그친다. 다시 말해, 개인이 내리는 정치적 판단의 성격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까지는 철학이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여러 성격 가운데 선택을 인도하는 역할은 철학이 아니라 정치 또는 도덕, 다시 말해 삶 자체다. 그래서 나는 정치의 구원, 다시 말해 삶의 구원은, 정치 즉 실제 삶에서 얻어지든가 아니면 실종되든가 하는 문제이지, 철학이 인도할 수는 없다고 본다.

장은주의 시선이 이와 같은 점에 충분히 오래 머물렀더라면, 이 책에서 좀 더 명료하고 실질적인 정치철학이 제시될 수 있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하지만, 그의 시도가 대단히 의욕적이었다는 점은 자체로 무척 값진 공헌이며, 내가 이 글에서 가한 모든 비판에 조금이라도 알맹이가 들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원래 그의 책이 비판적으로 논의될 가치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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