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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 "응답하라, 희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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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 "응답하라, 희망이여!" [사회학을 전복한 사회학자]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대학 시절에 읽은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기억하는 구절은 당연히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이다. 그런데 "모든 단단한 것들이 허공 속으로 녹아 사라진다"는, 다소 시적이고 음울한 구절이 <공산당 선언>에 있었다는 것을 나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그 구절을 가져와 '유동하는 근대(liquid modernity)'라는 개념의 근거로 사용할 때까지 말이다. 바우만에 의해 <공산당 선언>은 공산주의라는 유토피아를 선포하는 와중에 은근슬쩍 유동하는 근대라는 디스토피아를 예고하는 불길한 전조로 탈바꿈한다.

바우만에 따르면 이제 세계는 불확실성의 시대로 돌입했다. 소비 사회와 신자유주의 체제가 도래하면서 조직, 경제, 문화, 인간관계 등 여러 사회적 영역에서 그것들을 지탱해주던 '단단한' 규범, 자원, 이해관계, 감정들의 토대는 허물어졌다. 사랑이건, 공동체건, 세계관이건, 소유물이건, 직업이건 간에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서 모든 것들은 "추후 통지가 있을 때까지(until further notice)"만 유효할 뿐이다.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서 개인은 온갖 구속과 한계로부터 해방되어 무한한 선택의 자유를 얻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우만은 이런 선택의 자유란 차라리 저주에 가깝다고 말한다. 집단과 전통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삶 전체를 어깨 위에 짊어지고 홀로 나아가는 개인의 발아래서 유동하는 세계는 붙잡을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흘러간다. 바우만은 선택의 자유를 다음과 같은 처지에 비유한다. "얇은 빙판 위의 스케이터가 얼음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서는 스케이트를 더 빠른 속도로 지치며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때 우리는 스케이터의 스케이팅을 자유 의지의 발현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현재와 무엇이 닥쳐올지 모르는 미래에 대한 공포로부터 달아나는 동시에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지난한 노력 속에서 사람들은 더욱 더 표면적인 것, 더 즉각적인 것에 몰두한다. 그것들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빠져나올 수 있는 부담 없는 임시 정박지와 같다. 예를 들어 살아갈수록 정작 속내를 털어 놓을 만한 친구의 숫자는 줄어드는데 트위터의 팔로워와 페이스북의 친구가 늘어가는 것에 우리는 흐뭇해한다. 하지만 이 만족감은 오래 가지 못한다. '리트윗'과 '좋아요' 버튼을 클릭할 때, 우리는 수백, 수천 명과 소통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 때의 소통이란 '액션'이 아니라 '리액션'의 연쇄에 하나의 고리를 덧붙이는 것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따라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소통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러한 '유사 소통'의 폐쇄 회로에 갇힌 상태에서 불만족으로의 급락을 다시 만족으로 끌어올리는 해결책이 있다면, 그것은 예전보다 더, 더, 더 많은 클릭을 주고받는 일 뿐이다(주식 시장에서 개미들이 보이는 기민함처럼). 그리고 이런 클릭질의 교환이 결코 끝을 맺지 않는다는 점에서 해결책은 언제나 임시적일 뿐 본질적으로 무용하고 심지어 더 해롭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더 중요한 것을 상실한다.

"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31쪽)

▲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동녘 펴냄) ⓒ동녘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라는 개념을 다양한 테마를 통해 변주하면서 현대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불확실성의 문제를 꾸준히 분석해왔다. 지금까지 나온 그의 책들이 다분히 학술적이었다면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조은평·강지은 옮김, 동녘 펴냄)은 그가 <여성들을 위한 라 레푸블리카>라는 주간지에 2008년부터 2009년까지 2년 동안 두 주마다 써서 보낸 서간체 형식의 에세이를 모아서 엮은 책이다. 원래 책 제목은 "유동하는 근대 세계로부터 온 44통의 편지"이다. 말 그대로 독자들에게 보내는 44통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은 지금까지 나온 바우만의 책들을 좀 더 많은 독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짧은 에세이 형식으로 간추리고 요약하여 소개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많은 주장들이 기존의 책들에서 이미 개진된 것들이라 내용이 그리 새롭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럼에도 그의 이번 책은 "사회학적 글쓰기"라는 견지에서 몇 가지 흥미를 끄는 부분들이 있다.

바우만은 이 책에서 인터넷, 테크놀로지, 청년 세대, 소비 문화, 실업, 인종, 도시, 이주 등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쟁점들을 다루고 있다. 그 폭넓은 쟁점들을 해석하는 일관된 문제의식은 유동하는 근대 사회에서 인간이 처한 곤경이다. 공동체로부터 뿌리 뽑혀 네트워크 사회에 내던져진 개인이 직면하는 불확실성,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임시적 해결책들이 야기하는 부작용을 바우만은 다양한 영역에 걸쳐 집요하게, 일관되게 파고들고 있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이야기꾼으로서의 바우만의 능력이다. 정말이지 그는 '르네상스 맨'이라 불릴 만하다. 책에는 사회과학을 비롯해 다양한 인접 학문의 연구들뿐만 아니라, 문학, 동화, 영화, 신문과 잡지의 기사, 하다못해 시중에 나도는 농담까지 등장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바우만 같은 '문화 잡식/포식가' 사회학자를 보지 못했다. 또한 바우만처럼 자신이 섭취한 비학술적 텍스트들을 사용하여 자신의 학술적 주장을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능력을 가진 사회학자는 더더욱 보지 못했다.

예를 들어 바우만은 '행복을 홀로 추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기대를 비판할 때나, 버락 오바마의 성공 신화를 비판할 때, 동일하게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에 나오는 일화를 원용한다. 그는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서 사회 구조가 야기한 문제를 개인이 해결하려는 일체의 노력은 "자신의 가발을 길게 늘어뜨려 잡아당겨서 스스로 습지에서 빠져 나오는 바론 뮌하우젠의 허풍스럽고 황당한 솜씨를 되풀이하는"(186쪽) 것이나 다름없다고 본다. 이 일화는 사회적 질병을 개인만의 노력으로 극복하려는 시도가 무용할 뿐만 아니라 더 해악적이라는 그의 주장에 매우 적절한 비유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집단적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 책에서도 바우만은 집단적 해결책의 구체적인 조건과 전략을 밝히지 않는다.

바우만은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정부의 통제를 넘어서는 자본의 전횡으로부터 혜택을 입은 소수의 글로벌 엘리트만이 자유와 안전을 확보하고 나머지 대다수 인류는 실현 불가능한 욕망, 회복 불가능한 궁핍, 치유 불가능한 불안에 치명적으로 노출됐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 바우만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지극히 원론적이다. 그는 위기에 처한 인류의 연대를 강조하며, 또한 자본에 대한 전 지구적인 법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개체화되고 파편화된 삶에 결박된 개인들 사이의 연대가 어떻게 가능하며, 전 지구적인 사법 제도는 어떻게 설립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정치적 조직화나 중범위 수준에서의 집합 행동에 대해서도 바우만은 일관되게 입을 다물어 왔고 이러한 그의 태도는 이 책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바우만은 편지라는 형식을 취한 이 책에서 사회학자가 내놓은 일반적 해결책과는 매우 다른 종류의 가능성, 즉 '우리'라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탄생할 수 있는 실존적 기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와 관련해서 내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에세이는 마지막 두 편의 편지, '운명과 성격'과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이다. 이 두 에세이에서 바우만은 사회학자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위험에 처하게 하면서 유동하는 근대 세계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하나의 단초를 독자들에게 시사한다.

흔히 사회학자가 무비판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이 있다. 예를 들어 '국론'이라는 말이 그렇다. 국가 전체에 통일된 의견이 실체적으로 존재한다는 가정에 대해 사회학자라면 반드시 비판적 거리를 둬야 한다. 개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사회학자가 '영혼'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개인 내면의 수수께끼 같은 자질과 속성이 사회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회학의 주요 전제, 즉 사회 구조가 허락하는 가능성의 한계 안에서 행위자의 동기나 행태가 결정된다는 전제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우만은 '영혼'이란 말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성격'이란 용어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성격으로 인한 선택은 자유의지를 발휘하는 일반적인 선택과는 사뭇 다르다.

바우만은 '운명과 성격'에서 네차마 텍의 <빛이 어둠을 가를 때>라는 책을 소개한다. 텍은 홀로코스트의 와중에 자기희생을 감수하면서 남을 도우려 했던 사람들에게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어떤 공통적 요인도 찾을 수 없었다. 사회적 환경, 계급, 교육 수준, 재산, 종교적 신념, 정치적인 조직체, 모든 변수들이 그들의 도덕적 선택과 상관관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설명은 단 하나다. 그들의 성격이 "통계적인 확률"을 거스르면서, 모종의 자연스러운 속성의 발현으로 도덕적인 선택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때 성격은 "체념하는 듯 수용하는 태도와 상황이라는 그 전능한 힘을 거역하겠다는 대담한 결단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고 바우만은 주장한다(380쪽).

ⓒ프레시안(손문상)

여기에서 하나 짚고 넘어가자. 원문에서 성격은 '캐릭터(character)'이다. 바우만은 캐릭터라는 용어를 "인간은 인생이라는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라고 말하는 맥락에서 꺼내든다. 이때 캐릭터란 용어는 인생이라는 작품의 창작자이자 등장인물인 인간 행위자 자신을 고유한 개성과 품성을 지닌 인격체로 바라보자는 제안을 내포한다. 성격은 좋다 나쁘다, 라고 말할 수 있지만 캐릭터에 대해서는 좋다 나쁘다, 라고 말할 수 없기에 성격이라는 번역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바우만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성격이 좋은 사람이 도덕적 선택을 한다"는 식의 주장이 아닌 것이다.

나는 행위자의 선택을 좌우하는 바우만의 캐릭터 개념을 '자리'라는 개념으로 보완하고 싶다. 달리 말하면 누구와 함께 어디에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캐릭터의 표현과 변화 양상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수용소의 간수들, 혹은 농성 중인 노동자와 철거민을 퇴거시키라고 명령 받은 용역을 생각해보자. 그들의 대부분은 인간적 존엄과 생존을 위해 싸우는 이들을 물리적으로 진압하라는 명령을 적극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라도 수용한다. 그러나 그들이 만약에 '자리를 바꿔서' 피수용자들이나 노동자나 철거민과 '함께' 대화, 식사, 생활을 나누는 경험을 가진다면 그 다음부터 그들은 상부로부터 내려온 진압 명령을 더 이상 적극적으로 수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그동안 마지못해서 소극적으로 명령을 따랐던 이들은 그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 더 자신의 양심과 인격에 부합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바우만이 말하는 캐릭터, 영웅적 결단과 체념적 수용 사이에 자리를 잡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도덕적인 선택을 하도록 하는 성격이라는 개념은 내가 최근에 친구에게서 들은 또 다른 책의 내용을 연상시킨다. 그 책은 에바 포겔만이라는 학자가 쓴 <양심과 용기>라는 책이다. 이 책에는 텍의 경우와 유사하게 나치 시대에 위험을 감수하며 타인들을 도왔던 사람들이 소개돼 있다. 포겔만은 이들의 행동을 '선의 평범성'(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 아이히만을 표현하는데 쓴 '악의 평범성'과 대조되는)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요컨대 그들은 어떤 영웅적 희생의식과 대단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저 자기 본성에 맞는 선택을 한 것뿐이라고 고백한다. 그렇게 그들에게 선행은 너무나 평범하면서도 필연적인 행동이었다.

텍과 포겔만의 이야기는 또 다른 수용소 이야기와 만난다. <이것이 인간인가>를 쓴 프리모 레비는 나치 치하의 수용소에서 상반되는 두 사람을 만나서 혼란에 빠진다. 한 사람은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영웅적 인간인 슈타인라우프이고, 다른 한 사람은 수용소에 너무나 잘 적응하며 살아가는 결함투성이의 인간 엘리아스이다. 그 둘을 보며 프리모 레비는 질문한다.

"이 복잡한 암흑 세계와 대면한 나의 생각들은 혼란스럽다. (슈타인라우프처럼) 정말 체계를 세워서 그것을 실천해야 할까? 아니면 (엘리아스처럼) 체계가 없는 것에 적응하며 사는 것이 나을까?" (<이것이 인간인가>(이현경 옮김, 돌베개 펴냄), 58쪽, 괄호 안은 필자)

바우만은 이 책의 마지막 편지,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에서 카뮈의 시시포스 이야기를 빌려와 레비의 질문에 답을 한다. 슈타인라우프와 엘리아스의 중간에 있는 어떤 성격의 사람들은, 즉 어떤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자기 실존의 그 철저한 부조리에 직면해 있었던 시시포스의 곤경일지라도 그 안에는 분명 (아무리 지독히도 아주 작은 공간일지라도) 프로메테우스가 발을 들여놓아도 될 만큼 충분한 공간이 있는 법"(387쪽)임을, "수용하는 저 행위 자체가 반항으로 나아가는 길을 마련"(388쪽)할 수 있음을, 그렇게 '나'의 반항이 '우리'의 존재로 이어질 수 있음을 역사 속에서 입증해 왔다.

사실 바우만은 마지막 편지에서 사회학적 규약을 어기고 있다. 그는 카뮈에 기대어 "반란과 혁명, 자유를 향한 노력들이야말로 인간의 실존에 필연적인 측면들이라고"(389쪽) 주장한다. 그런데 나는 일종의 '인간 본성론'을 역설할 때 바우만이 행하는 사회학에 대한 약속 위반이야말로 현대의 사회학자가 처한 곤경을 넘어서는 하나의 경로를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우만의 글이 수용소와 반항하는 인간으로 끝을 맺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수용소화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회학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수용소의 구조 분석이 어떤 효용과 가치를 갖는가? 인간들이 겉으로는 가볍고 유연해 보이는 사회 구조에 옴짝달싹 못하게 예속되어 있으며, 그들이 보여주는 역동성이란 기껏해야 폐쇄 회로 안에서 맴돌고 있는 사회적 원자의 적응 능력에서 기인한다는 빤한 사실을 복잡한 수학적 모델을 사용하여 통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과학으로서의 사회학을 질책하며 일군의 현실주의 사회학자들은 수용소의 통치 영역으로 이동한다. 그들은 능력 있는 전문가임을 자처하며 수용소의 정책을 개선하고 수용소에 갇힌 인간들을 비참으로부터 해방시켜주겠다고 약속한다. 물론 이 약속은 통치 영역으로 떠났던 사회학자들이 패잔병처럼 처진 어깨로 수용소의 숙소로 돌아오거나, 혹은 돌아오지 않는다면 유능한 테크노크라트가 되어 통치자 못지않은 통치 기술을 과거에 함께 했던 동료들과 피지배자들을 향해 휘두르는 순간 산산이 깨지게 된다.

이때 바우만과 같은 어떤 사회학자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암묵적인 약속 하에 외면했던 것들, 평범한 인간들과 사물들, 그것들의 희미한 신호와 움직임, 혹은 갑작스런 분출과 반항에 주목한다. 소위 통계적으로 무의미한 '아웃라이어'로 불렸던 것들, 평균값을 왜곡하는 값으로 도표 상에서 강제로 지워지고 추방됐던 것들, 이제 그것들로부터 은밀히 건네진 편지들을 읽고 그것에 일일이 장문의 답장을 쓰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사회학적 상상력은 출발하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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