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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를 버려야 교회가 산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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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를 버려야 교회가 산다! 정말로? [프레시안 books] 양희송의 <다시, 프로테스탄트>
나는 양희송과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몇 차례 토론의 자리에서 논쟁의 상대편으로 만났고, 그가 쓴 에세이 몇 편을 읽었으며, 페이스북에 쓴 그의 짧은 글들을 읽었다. 그리고 그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었고, 그에 관한 기사들 몇 편을 보았다. 아, 토론 모임이나 책을 기획하면서 그와 전화 통화를 길게 나눈 적도 있다. 이게 전부다. 해서 그의 깊은 생각이나 습관, 가족관계, 개인 이력 등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한국 개신교에서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는 안다. 그는 한국 개신교를 진단하고 비평하며 대안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의 하나이고, 내가 보기에, 그중 가장 돋보이는 사람에 속한다.

여기서 하나 짚어둘 것은 그는 교회에 신세진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대다수도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이고, 그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가 존경하는 대다수 사람들 또한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해서 그의 신랄한 교회 비판으로 가장 아파하는 이는 바로 그 자신이다. 내가 알고 있는 그에 관한 정보로는 그렇다. 그런 점에서 그는 진정 '내부 고발자'다.

10년 전 어느 신문의 고참 기자가 민중 신학에 관한 나의 책을 소개하면서 "교회 내부 고발자의 목소리"라고 평했다. 과분한 지적에 감사하지만, 이제 와서 고백하건대, 아니 이제야 절감한 것인데, 그 말은 내게는 타당하지 않다. 왜냐면 나는 이미 그 무렵 한국 개신교에서 사실상 떨려나간, 존재감 없는 목사였다. 해서 아무리 독설을 해도 들어줄 이가 거의 없었고, 기독교에 남겨둔 정신의 유산도 거의 없었다.

당시 내가 강연을 하면 거의 예외 없이 받아야 했던 질문은 '당신도 기도를 하는가'였다. 물론 나는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건 연기였을지도 모른다. 혹은 아직 한국 교회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확인하려는 버둥거림인지도…. 하여 나는 그 고참 기자가 내게 부여해준 그 가슴 아픈, 숭고한 칭호를 그에게 넘긴다.

<다시, 프로테스탄트>(복있는사람 펴냄), 이 책을 양희송은 "개신교 내부자의 입장에서" 쓴다고 했다(16쪽). "한국 개신교에 대한 소란스러운 진단과 부적절한 처방에 대한 하나의 항의"(15쪽)를 표하는 그의 자리다. 이런 맥락에서 필경 나의 여러 글들도 이 "소란스러운 진단과 부적절한 처방"에서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왜냐면 안타깝게도 나의 글 어느 것도 "교회를 설득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기"(15쪽) 때문이다. 그의 논지를 따라 추론하면 그것은 내가 '외부자'에 다름 아닌 자리에서 비평을 했기 때문이다.

▲ <다시, 프로테스탄트>(양희송 지음, 복있는사람 펴냄). ⓒ복있는사람

실은 나는 교회를 설득하려는 데 관심이 없다. 더 정직한 말은 내가 무엇을 말해도 교회는 나에게 설득당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 개신교에서 나는, 보수에서든 진보에서든, 의미 있는 역할을 해보지 못했다. 반면 그는 복음주의 그룹에서, 특히 젊은 층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 왔고 그럴만한 자질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가 의도한 대로 한국 개신교의 "새로운 시대를 위한 재구성의 단초"가 될 만하다(17쪽).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장('현실')에서 한국 교회의 현실을 진단하고, 둘째 장('오해')에서 그 진단을 추상화해서 문제의 원인을 세 가지로 해석해 내고, 마지막 장('전환')에서 대안을 논한다. 전체적으로 그 개요는 간명하다. 지난 30년간 한국 개신교를 추동했던 (대형) 교회 중심 패러다임이 좌초하고 있다. 그 원인을 추상화하면 성직주의, 성장주의, 승리주의로 요약된다. 한데 이 셋은 프로테스탄트의 기본 정신에서 벗어난 결과다.

하여 대안은 어떻게 그 본래의 정신에로 되돌아갈 수 있는지에 달렸다. 이 책의 제목 '다시 프로테스탄트' 바로 그것이다. 이를 그는 '교회 중심 패러다임에서 기독교 사회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대형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 아닌, 개신교 전체의 생태계를 재구성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교회 전체를 아름답게 재구조화하는 교회 생태계, (복음주의적) 지식의 저변을 형성하는 지식 생태계, 그리고 시민 사회와 교회를 공공적으로 엮어내는 시민 생태계가 있다. 이렇게 프로테스탄트의 기본 정신에 따라 기독교 사회적 생태계를 재구조화함으로써 한국 교회는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큰 틀의 논지에 대해서 나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단지, 내가 잘 독서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권의 책이 이렇게 간명한 논지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로울 뿐이다. 그만큼 흐름을 흐트러뜨리는 군더더기가 별로 없다는 뜻이겠기 때문이다. 복잡한 걸 선호하기도 하거니와 어느 순간에 흐름을 놓치고 미궁에 빠지곤 하는 나의 허우적대는 문투와는 대조적이다.

그렇지만 책 전체를 통제하는 그의 집중력에도 불구하고, 그 큰 틀의 논지는 그다지 신선하지 않다. 한국 교회가 직면한 위기들의 요체로 제기한 성직주의, 성장주의, 승리주의, 이 세 가지는 많은 이들이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한 것들이고, 그것들이 프로테스탄트적 기본 정신을 망각한 결과라는 주장은 상투적이기까지 하다. 저자가 여러 차례 말하고 있듯이 이 책에서 사용하는 '프로테스탄트'라는 용어는 비역사적인 이념형적 개념이 아니라 서양 중세 가톨릭의 위기를 극복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적 개념이다(88쪽). 그렇게 탄생한 것이 '만인 사제(萬人 司祭)의 원칙'이고 '정교분리 원칙'이라면, 그리고 이것들이 그가 말하는 프로테스탄트 기본 정신의 핵심 요소들이라면, 이런 정신으로 구축된 교회는 과연 역사적으로 새로웠던가? 그 정신에 입각해서 세워진 근대 유럽의 개신교 교회들은 오늘 한국의 교회보다 과연 나았던가?

좀 더 신랄하게 말하면, 만인 사제의 원칙이 (모든 이들의 사제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후들이 자신의 영지에서 가톨릭 교회의 사제권을 대체하려는 욕구와 종교 개혁가들의 반가톨릭적 신학이 결탁한 결과였다는 해석, 그리고 정교분리의 원칙이 국가 권력과 종교 권력 간의 정치적 야합을 위한 종교적 도구였다는 해석, 이런 해석들이 프로테스탄트 정신의 역사적 실체를 더 잘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프로테스탄트 기본 정신을 그 역사성과 분리된 이념형으로 얘기하지 않는다면 역사적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부정적 측면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반대로 비역사적 이념형으로만 이해한다면 그 함의를 아무렇게나 도용해온 정통주의적 개신교 신학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없는 딜레마, 누구든 프로테스탄트의 기본 정신 운운하는 이는 이런 딜레마를 쉽사리 극복하지 못한다.

물론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해서 나는 '다시, 프로테스탄트!'라는 테제보다는 그 테제와 대결하면서 우리시대의 문제의식에서 새롭게 상상을 펴는 '새로운 프로테스탄트!'라는 테제를 선호한다. 실제로 1986년 일단의 선배 민중 신학 연구자들이 선언한 '새로운 교회 패러다임'을 나는 내 신앙의 주축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은 지금도 변함없다. 아무튼 그가 말하는 '새로운 생태계' 운운하는 말은 아직 시민이 형성되기 이전의 패러다임인 프로테스탄트 이상보다는 '시민 이후'의 관점으로 교회를 새롭게 재구조화하자는 것이니 '다시, 프로테스탄트'보다는 '새로운 프로테스탄트'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여 나는 그의 큰 틀의 논지를 우호적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다. 하지만 이 책의 힘은, 내가 보기엔, 디테일에 있다. 특히 개신교 성직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과 대안은 인상적이다.

그는 우리 시대의 '성직주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목사가 "전문직인가 일반직인가"를 묻는다(92쪽). 기독교가 국가 종교로 재탄생하던 4세기 초 이후 전문직으로서의 성직이 제도화되었다. 성만찬 등 신앙 의례를 독점하였고 교회의 재산권 행사에 관한 일체의 권리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전문 교육을 받고 소정의 엄격한 통과의례 거치는 성직자 양성 제도가 국가적으로 공식화된다.

또한 주위의 다른 건조물과 확연히 차별화된 화려하고 웅대한 교회의 건축 양식과, 일요일 제도를 통해 정례화된 집회의 비일상적 양식, 그리고 성직자만의 독특한 의복 양식 등은 신자 대중으로 하여금 성직자-평신도의 비대칭적 이분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이렇게 시작된 성직자의 구별 짓기 장치는 시간과 공간의 심대한 간격을 가로질러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데 전문직으로서 성직의 견고한 배타적 위상은 한국 교회의 급속한 팽창 과정에서 교란된다. 그 팽창률에 맞추어 신학생 정원을 최대화하였고, 그것으로도 수요를 다 충원할 수 없어 국가의 학력 인정 제도를 벗어난 속성의 양성 기관들이 수없이 세워졌다. 하여 목회자는 전문직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사실상 '일반직'화되었다는 것이다(94쪽).

문제는 개신교 교세의 팽창이 멈추고 심지어 마이너스 성장기에 돌입하게 되면서 표면화되었다. 목회자 수급 제도가 지나친 공급 과잉의 상황으로 반전된 것이다. 지난 10년간의 변화를 추적하는 2005년 인구 통계 조사에 따르면, 개신교 신자가 1.4퍼센트 감소했음에도 신학생 수와 교회 수는 현격히 늘었다. 이것은 신학생 미취업자와 폐업한 교회가 현저히 늘어난 현상과 맞물린다. 또 교회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어 미자립 교회가 전체의 70~80퍼센트에 달한다는 추정 보고도 있다. 이는 소수의 대형 교회 목회자를 제외한 절대 다수의 목회자의 생계가 심각한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전문직과 일반직의 어법이 얼마나 적절한지의 문제는 차치하고 그의 논지를 따라 이해하면, 그의 해석은 대단히 흥미로운 스토리라인을 형성한다. 그 출발점은 전문직으로서의 성직은 중세적 교회의 성직자 권력 독점주의를 정당화하는 구별 짓기의 장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문제 제기다. 한데 한국 교회의 과속 성장은 목회자 수를 제한하는 것을 요체로 하는 전문직으로서의 성직의 위상을 격하하여 상당 부분 일반직처럼 전화시키는 결정적 원인이 됐다. 이는 구별 짓기 장치가 이완되었다는 의미를 수반한다. 즉 목회자 자신도 '성직으로서의 직업'보다는 '직업으로서의 성직'에 더 집착하게 했고, 신자 대중도 목회자에 대한 존경을 상당 부분 철회하고 하나의 직업처럼 바라보게 했다.

이것은 중소형 교회의 목회자들에게는 생계의 위기와 관련이 있다. 즉 많은 중소형 교회의 목회자들은 생계의 문제에 집착하면서 직업으로서의 성직을 수행한다. 또 대형 교회의 목회자는 권력 독점 체제를 계속 유지하려는 욕구를 갖고 있지만, 그것을 숭고하게 포장해왔던 구별 짓기 장치가 무너짐으로써 권력 욕구에 몰입하는 양상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이러한 스토리라인은 그의 결론 부분 논지와 절묘하게 결합된다. 그의 성직주의 비판은 프로테스탄트의 기수였던 마르틴 루터의 '만인 사제론'을 불러들여 '크리스천 리더십'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어짐으로써 대안 제시로 귀결된다. 이른바 '평신도 지도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이들이 교회에서 유의미한 발언권을 갖게 됨으로써 신앙 제도에 대한 목사의 권력 독점 체제를 해체하고 수평적이고 대화적인 공동체로의 교회 개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건강한 교회 생태계가 조성될 수 있다는 얘기다.

또한 전문성을 갖춘 평신도 지도자들이야말로 크리스천 지식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는 주체이며, 시민 사회와 네트워크되어 공공성의 확대를 위해 유의미한 기독교로 재탄생하게끔 이끄는 시민 생태계의 주역일 수 있다. 하여 성직주의에서 크리스천 리더십으로의 전환은 교회 중심 패러다임에서 기독교 사회 패러다임으로 전환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주장은 1952년 안병무를 연상하게 한다. 그는 '목회론―내가 만일 목회를 한다면'이라는 글에서 목사의 권력 독점의 제도적 장치로서의 교회를 해체하고, 수평적 공동체로서의 '평신도 교회'를 주장했다. 그 전 해에 그는 한국 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진 일신회 동료들 몇과 함께 평신도 수도자 공동체를 만들었다. 일신회는 해방 직후 서울대학교의 기독학생회 내에 만들어진 신앙 공동체 분파로, 이념적 노선 투쟁이 한창이던 시절에 좌와 우에 가담하지 않고 사회와 교회의 개혁을 상상하던 이들의 모임이었다. 내 생각에는 안병무와 일신회 동료들의 자의식은 양희송이 말하는 '세속 성자'(220쪽)의 이상과 유사하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교회가 향린교회였다. 여기에서 수도자적 생활 공동체의 일원이던 이들이 안병무와 일종의 평신도 사제로서 공동 목회를 하였다. 그들은 각기 자기의 전문적 소양으로 교회의 사역에 참여하여 역할을 분담했으나(해서 안병무는 이를 '그룹 목회자 운동'이라고 명명하였다), 목회자라는 직업을 갖지 않았고 각기 자신의 전문성으로 생계 노동을 하였다. 이러한 교회 양식을 안병무는 '입체적 교회'라고 불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를 자족적 신앙 공동체가 아니라 생활과 밀착된, 하여 시민 사회와 삶을 나누는 신앙 공동체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꿈을 담아보고자 했다.

한데 1인의 목회자를 특화시키고 그의 역할을 성화시키는 방식의 교회 모델이 목회자의 욕구 때문에 위기를 맞게 되었듯이, 다수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교회 모델 역시 그이들의 욕구 때문에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 실제로 안병무는 이 실험을 실패로 자인했고, 평신도 지도력이 가족주의적 욕구와 충돌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이상이 좌초했다고 진단했다.

양희송은 크리스천 리더십의 덕목을 얘기했다.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가 그것이다. 안병무도 수도자적 자의식을 말했다. 필경 이런 개개인의 덕목들이, 혹은 수도자적 수련이 그들 자신의 욕구를 더 잘 통제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겠다. 하지만 안병무가 진단했듯이 '준비된 리더십'의 역량이 그들 자신의 사적 욕구에 의해 압도되는 순간 문제가 발생했다.

나는 안병무의 이 실패의 해석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1인의 지도자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대신 덕목을 갖춘 '잘 준비된' 지도자들이 권력을 분점하는 모델은 종종 '신뢰의 제도'가 직면하는 함정에 빠지곤 한다. 그것은 잘 준비된 지도자들이 평범한 다른 이들보다 더 잘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함으로써 생기는 문제다. 하지만 그런 덕목들은 종종 실패를 관리하는 데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곤 한다. 가령 최근 안철수와 문재인 간의 '아름다운' 단일화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이 두 인물이 누구보다도 정치적 욕구를 조절할 줄 아는 자기 덕목을 갖추었다는 점에 주목했었다. 하지만 잘 알다시피 그 단일화는 전혀 아름답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권력 분점을 추구하는 공동체는, 지도자들의 덕목을 통한 '신뢰의 제도'보다는, '불신의 제도'를 채택할 필요가 있다. 누구나 실패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실패를 관리하는 제도들을 마련하는 것이다. 가장 손쉬운 불신의 제도는 임기제다. 그리고 임기제는 일정 기간 공동체를 운영할 이를 선발하는 제도를 필요로 한다. 뛰어난 덕목을 갖춘 이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임기제와 선발 제도는 가장 훌륭한 이를 선발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즉 임기제와 선발 제도 같은 불신의 제도들은 덕목을 갖춘 지도자를 선발하고자 하지만 동시에 덕목에 의존하는 공동체성을 해체한다.

하여 나는 양희송의 후속 저작을 기대한다. 거기에는 덕목들에 대한 논의만이 아니라, 불신의 제도에 관한 서술과, 이런 제도들의 덕목 해체적 측면이 갖는 장점과 단점에 대한 구체적 물음이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또한 새로운 교회 생태계를 위해 공동체의 적정 규모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안병무는 초기에 적정 규모를 150명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말년에는 50명으로 축소했다. 이때에는 수도자적 지도자들의 그룹 목회가 아니라 평범한 교인들 간의 '대화'를 강조했다. 한편 만약 규모가 그 적정치를 넘게 되면 '분가 선교'를 하자고 제안했다.

아무튼 이 책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을 다시 되새기자는 주장은 1인 대신에 소수의 자기 초월적 지도자들의 덕목 운운하는 얘기와 맞물린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 당대에는 아직 시민이 형성되지 않았다. 반면 양희송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시민 이후의 패러다임으로서의 새로운 교회 생태계, 나아가 기독교 사회 생태계를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내가 위에서 부가한 소수 엘리트주의에 대한 비평에 대해서 그는 자신에 대한 오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주장은 '다시,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라 '새로운 프로테스탄트'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 점에서 '다시'와 '새로운' 사이에서 교회 생태계의 재구축을 위해 더 많은 토론을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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