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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국에 사도 바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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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국에 사도 바울이 필요하다! [프레시안 books] 에리히 프롬의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
2005년 조사된 인구센서스에서 그 이전 10년간의 종교인구변동에 관한 결과는 종교계에 커다란 충격파를 주었다. 불교는 조금 늘었고, 개신교는 조금 줄었으며, 천주교는 거의 배나 증가했다. 불교 신자는 약간 증가했지만 인구 대비 증가율은 오히려 감소했기에 불교측은 사실상 감소로 해석했고, 개신교는 미미하게 감소했지만, 초고속 성장을 거듭한 종교였기에 감소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천주교는 거의 두 배에 가깝게 증가했지만, 냉담신자 비율이 너무 높은 상황이었기에 신자통계는 급증했음에도 일상의 예배는 큰 증가율에 비해 별다른 차이를 실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의 다양한 해석들이 나왔는데, 그 모든 논의들에서 간과된 해석이 하나 있다. 그것은 '멀티신자'층이 폭넓어졌다는 점이다. 멀티신자란 특정한 종교에 귀의하지 않고 다양한 종교 의례에 존경심을 표하는 사람을 말한다. 가령 개신교 교회도 다니면서 천주교 성당도 다니고 불교의 템플스테이도 참여하며, 별신굿이 열린다고 하면 거기도 다녀오는, 그런 종교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자신을 그이 스스로는 종교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사람을 가리켜 나는 '멀티신자'라고 불렀다.

▲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에리히 프롬 지음, 이종훈 옮김, 휴 펴냄). ⓒ휴
이런 신앙양태는 서구사회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폭넓게 나타났지만, 한국에는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일부 개신교 신학자들에 의해 이른바 '가나안 성도', 즉 교회 활동에 한동안 충실했으나 이후 거의 교회를 다니지 않고 소속 없는 신앙인으로 사는 이들에 관한 연구가 수행되었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들 중 55퍼센트 가량이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였고, 30퍼센트 정도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추구한다고 답했다. 이것은 개신교 신자 중 최근 급증하고 있는 '가나안 성도'의 상당수가 멀티신자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데 인구센서스는 이런 다중적 종교인들을 측정하는 항목을 갖고 있지 않다. 거기에는 단지 하나의 종교만을 선택하여 표기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해서 멀티신자들은 그중 하나의 종교 칸에 표기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멀티신자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자유로운 신앙을 방해할 뿐 아니라 많은 이들에 의해 부끄러운 종교로 낙인찍힌 개신교보다는 상대적으로 이미지가 좋고 자유로운 신앙에 대해 관대한 천주교를 자신의 종교라고 표기하였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신앙패턴은 한 종교에 강한 귀속성을 보이지 않으니 천주교의 입장에서 신자수가 현저히 늘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없었던 것이라는 얘기다.

최근 출판계에서 이러한 멀티신자를 가상의 독자로 삼는 번역서들이 다수 출간되었다. 멀티신자층이 비교적 학력 수준이 높은데다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강할 것으로 보이므로, 그들을 겨냥한 책을 펴내는 것은 적절한 판단일 것이다. 그런 저작들 중 종교적 배타성의 문제를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특성과 연관하여 해석하고 이런 논점에 기반을 두고 대안적 신앙이나 신념을 묻는 저작은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좀 오래된 책이지만 에리히 프롬의 책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이종훈 옮김, 휴 펴냄)가 주목된다. 물론 에리히 프롬은 자신을 멀티신자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무신론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이 책을 무신론자의 종교성에 관한 책으로 저술하였고, 특히 제1성서(구약성서)를 주목하였다는 점에서 멀티신자를 위한 책으로 읽는 것은 무리한 독서가 아닐 것이다.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종교심은 인간의 보편적 체험에 속한 것이다. 그런데 이 종교심은 인간이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역사 속에 실재하게 된다. 즉 종교는 언어로 표기된 종교심이라는 것이다. 하여 이 '종교적인 미지의 X'는 해당 언어권의 문화에 따라 다르게 구체화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에서 에리히 프롬은 제1성서 속에 표현된 '종교적인 미지의 X'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고대 이스라엘 문화권의 인식 범주 내에서 그 신과 신앙이 이해되고 있다는 뜻이다.

우선 책의 제목은 '창세기' 3장 5절을 인용한 것이다. 이것은 저자가 독자를 향해 말하는 핵심적 메시지이지만, '창세기' 텍스트에서는 뱀이 여자(하와)를 유혹하면서 한 말이다.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 하느님처럼 되어서 (…)"

프롬은 이 구절을 일반적인 해석과는 굉장히 다르게 읽어낸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인 미지의 X'를 '하느님'(엘로힘. 하느님이라는 뜻의 '엘'의 복수형)이라고 표기한 '신들'을 중심으로 표현했다. 그 신들은 권위적이고 배타적이다. 해서 자기의 형상을 닮은 존재, 곧 신성을 가진 존재를 만들었음에도 그 신성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고 자신들만 독점하였다. '첫 인간들'은 그것을 거슬렀다.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것이다.

▲ 윌리엄 블레이크의 . (출처 //www.wikipaintings.org/)

신들은 이들 인간을 저주하였다. 하여 신은 말한다.

[하와에게]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아담에게]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삶은 이러했다. 그것은 자연과의 조화가 깨진 가운데 생존투쟁을 하는 삶, 노동하고 출산하며 사는 고욕의 삶을 의미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주장을 편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처럼, 프롬은 바로 이것을 '자유를 향한 여정'의 출발점으로 해석한다. 권위주의적인 신성으로 종교심을 표현하던 사회, 그러한 지배적 관념에도 불구하고 제1성서는 그것에 거스르는 분열적 종교성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분열성에서 그는 인간의 자유를 향한 이스라엘 신앙의 '진보의 역사'가 가능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분열성이 준 역사적 진보 덕에 신에 관한 경험도 진보했다. 아담과 하와의 하느님은 권위주의적 신이었다면, 모세의 '이름 없는 하느님'은 법치적 주권자로 진화했고, 12세기 유럽의 유대주의 사상가 마이모니데스(Maimonides)의 하느님은 본질적 속성이 없는 하느님으로 진화했다.

이는 마치 현대 선교신학과 종교신학에서 현대적 신성의 의미로 새롭게 강조되는 '성령'이라는 삼위일체론적 수사와 유사하다. 여기서 성령은 신의 형상의 해체를 의미한다. '성자'는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기에 성자 이미지 배후에 제국의 종교인 그리스도교 체제가 얽혀 있어 종교간 대화에 적절하지 않다는 문제제기가 있었고, '성부' 개념은 유일신적 신앙을 갖지 못한 종교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간 대화에서 많은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담론적 특징을 지닌다는 비판이 많았다.

반면 '영'은 형체가 없는 것, 누구도 어떤 대체물로 형체를 만들어 독점할 수 없다는 함의를 지니기에 다종교적 세계에서 반독점적 태도로 대화하고 협력하는 그리스도교적 신학의 거점적 문제제기로 안성맞춤이다. 그것은 모든 종교와 비종교를 아우르는 신성 혹은 진리적 가치에 대한 긍정이고, 동시에 신성을 주장하는 모든 우상에 대한 부정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프롬은 자유를 향한 인간 진화의 역사를 에덴을 떠나는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시작하는 것도, 그 선조인 아브라함이 고향,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새로운 민족의 형성사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저 민족의 형성사는 자유를 향한 미지의 여정의 역사라는 주장이 담겨 있다는 것이 그의 요지다. 그리고 이것은 모세를 거쳐 예언자의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자유를 향한 역사가 진보적으로 노정되고 있다고 해석한다.

▲ <갈릴래아의 예수>(안병무 지음, 한국신학연구소 펴냄). ⓒ한국신학연구소
요컨대 그는 '자발적 유민'의 역사를 제1성서에서 발견해냈다고 말한다. 정착지의 삶은 안정된 듯하지만, 그 속에 사는 이들을 무기력하게 하여 결국에는 노예로 전락시켜 버린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떠나고, 아브라함이 우르와 하란을 떠나고, 모세가 이집트를 떠나고, 우리가 자본주의를 떠나야만, 그런 체제들로부터 떠나는 자발적 유민이 됨으로써만 체제의 우상들의 질서에서 벗어날 수 있고, 진정한 자유를 향한 혁명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얘기겠다.

이렇게 본다면, 내가 앞에서 이 책의 독자로 언급한 멀티신자는 단순히 여러 종교를 전전하며 그러한 자신의 개방적 신심에 만족감을 얻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프롬의 권고는 익숙한 곳, 자신이 하는 일상이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는 한 그냥 머물러 안주하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안주하려는 욕망에서 벗어나, 자유의 여정을 향해 영혼의 미지의 여행을 떠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이것으로 프롬의 조언이 끝난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좁은 의미의 종교성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롬은 소비사회로 한창 치닫기 시작한 20세기 중반 이후의 미국과 유럽을 바라보면서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를 썼다. 그는 고대 이스라엘의 우상들처럼 현대 소비사회에서도 무수한 우상들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음을 직시하고 있다. 특히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기계와 그 시스템에 스스로 포박되어 도리어 그것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보다 최근 프랑스의 사상가 들뢰즈는 기계의 노예가 된 인간이라는 관점보다 더 나아가 인간 자신이 기계(의 일부)가 되어버렸다고 주장한다. 한국계 독일 사상가 한병철은 기계가 된 인간이 자발적으로 기계처럼 일하다 몸과 정신이 중증질환에 걸린 사회를 '피로사회'라고 명명했다.

그런 현상을 미국과 유럽보다 더 적나라하게 겪고 있는 한국을 살피면, 세계의 거의 모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를 향해 치닫는 세상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과로사회다. 한병철 유의 피로증후군을 가장 심각하게 체감하는 사회는 다름 아닌 한국이다. 그런 점에서 기계와 그 시스템이라는 우상, 그것에서 벗어나 자유를 향한 여정의 떠나라는 권고는 한병철의 제안만큼이나 귀에 쏙 들어온다.

한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은, 최근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의 여러 사회들처럼, 아니 그들 사회보다 훨씬 심각하게 '비자발적 유민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것은 한병철의 피로사회론이 말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에리히 프롬이 말한 자발적 유민론이 담지 못하는 현상이다.

프롬은 소비사회에서 기계와 시스템에 사람들이 노예화되고 있음을 지적했는데, 오늘 우리사회는 기계와 시스템의 체계에서 퇴출된 이들로 넘쳐나고 있다. 비자발적 유민들은 노예가 아니라 '방출된 노예'다. 노예는 주인에게 예속되었지만 동시에 주인에 의해 생존이 유지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한데 방출노예는 예속의 권리마저 빼앗겨버렸다. 그리고 그중 많은 이들이 최소한의 자존성까지 괴멸되고 있다.

특히 그들 중 상당수가 가해나 자해 중독성을 드러내고 있다. 가해 중독성에 대한 사회적 담론은 '악인'에 관한 담론으로 이어진다. 또 자해 중독성에 대한 사회적 담론은 '무능력자'에 관한 담론으로 이어진다. 하여 이들 비자발적 유민들, 그들 중 다수는 '악인'이 되거나 '무능력자'가 된다. 그리고 시민사회는 이들을 체제에 의해 배제된 이들이 아닌 악인으로 혹은 무능력자로 취급함으로써 그들을 배제한 체제의 공모자가 된다.

최근의 몇몇 사상가들은 이런 비자발적 유민 현상을 주목하면서 성서를 묻기 시작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예수를 통해 비자발적 유민 현상을 살폈고,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바울을 통해 이 문제를 살폈다. 나 또한 최근 바울에 관한 저작에서 수많은 난민과 유민, 특히 방출된 노예들이 넘치고 있다는 점에서 1세기 지중해 연안의 대도시들과 현대 신자유주의적 메트로폴리탄들 사이의 유사성을 주목하였다.

▲ <사도 바울>(알랭 바디우 지음, 현성환 옮김, 새물결 펴냄). ⓒ새물결
이들 비자발적 유민들은 마치 유기견처럼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지중해 연안의 대도시들로 속속 모여들었고, 대도시는 이들로 인해 수많은 병리적 문제를 앓고 있었다. 사회는, 특히 대중은 이들을 악인이나 무능력자로 취급하고 그들에 대한 배타성과 적대행위를 선동하는 이들에게 포획되곤 했다. 한데 바울은 비자발적 유민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운동의 한 주역이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신학은 오늘 우리사회의 비자발적 유민 현상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하나의 전거이다.

하여 에리히 프롬이 주목하지 못한 현상인, 이들 '악인'과 '무능력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비자발적 유민들은 자유를 향한 여정을 떠날 최소한의 잠재력마저 잃어버린 존재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기계와 시스템에 의한 노예화 메커니즘에서 탈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과 아울러 그 체계가 방출하는 노예들의 현상을 문제제기하고 그것이 일으키는 문제들을 주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현안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멀티신자는 한편에서는 기계와 시스템의 질서에서 탈출하려는 에토스를 추구하는 자가 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체계에 의해 방출되고 있는 이들을 돌보고, 그런 사회가 일으키는 무수한 병리성을 문제제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배타적이지 않고 대화적인 종교성의 주역인 멀티신자의 진정한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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