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8월 5일
"대통령 부인 동반, 이 부통령을 방문"
11부 장관과 2처장의 조각 인선을 완료한 이승만 대통령은 4일 하오 5시 50분 부인 동반하여 혜화장으로 이시영 부통령을 취임 후 처음으로 방문하고 6시 10분 이화장으로 돌아왔다. (<경향신문> 1948년 8월 6일)
5시 50분에 혜화장으로 갔다가 6시 10분에 이화장으로 돌아왔다? 앉았다가 바로 일어섰단 말인가? 같은 날 같은 신문 다른 기사를 보면 사정을 알 수 있다.
"부통령 수원에"
부통령 이시영 씨는 돌연 지난 4일 하오 7시 반경 당지에 도착하여 시내 차준담 씨 댁으로 향하였는데 동 일행의 자동차는 3대이며 내원(來原)의 목적은 아직 알 수 없다 한다.
7시 반경 수원에 도착했다면 이승만이 찾아오기 전에 혜화장을 떠났다는 이야기다. 이 움직임에 어떤 뜻이 있었는지 보여주는 기사 또한 같은 신문에 실려 있다. 관련된 기사들이 갈팡질팡 실린 것으로 보아 돌발사태 앞에 편집진이 당황한 것 같다.
"조각 인선 문제에 불만, 이 부통령 일간 사직?-중대 성명 보류, 초각의에도 불참"
조각 인선에 있어 이 대통령의 지나친 독단적 처사에 함분(含墳)한 나머지 앙앙불락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끊고 혜화장에서 굳은 침묵과 명상에 잠겨 있던 이시영 부통령은 지난 4일 모종의 중대 성명을 발표할 것으로 예측되던 중 돌연 이화장 측의 만류로 이것을 중지하고 동일 오후 수원 수 명을 대동 혜화장을 떠나 모처로 사관(舍館)을 옮기어 새로운 구상에 들어갔다. 그런데 측근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번 조각에 있어 내외상을 필두로 각 각료의 전형을 무여 대통령 일개인의 자의로 했을 뿐 아니라 이 부통령에게 사후 각료의 명부를 보내어 '이리이리 결정했다'는 정도의 통지에 불과한 데 이 부통령은 극도로 분개하여 사의를 굳게 가지고 이것을 성명하려던 것이라 한다.
이 부통령의 그 같은 심경은 5일 초 국무회의에 궐석한 것을 보거나 또는 지난 3일부 본지에 보도된 바와 같이 "나는 나대로 이미 결심한 바가 있다"고 본보 기자에게 강경 심사를 암시한 것으로 보더라도 넉넉히 규지할 수 있는 일로서 만일에 이 부통령이 공식으로 사의를 천하에 표명하는 경우엔 이 대통령을 비롯하여 현 내각은 어떤 딜레마에 빠질는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에 있어 일반 민중으로부터 약체내각의 빈축을 받느니만치 크게 주목을 끌고 있다.
8월 6일 대법원장 김병로와 체신부 장관 윤석구가 수원으로 이시영을 찾아갔다. (<조선일보> 1948년 8월 8일) 윤석구는 새 정부의 유일한 한독당계 국무위원이었다. 두 사람은 이시영과 30분간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튿날 찾아간 국회의장 신익희는 불과 10분간의 요담을 나눴다고 한다. 이시영이 신익희와는 별로 할 얘기가 없었던 모양이다. 오히려 비서를 7일 밤 보내 이시영 가까이서 하룻밤 자고 오게 한 국무총리 이범석이 소통을 위해 더 실속 있는 노력을 한 셈이다.
결국 이시영은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8월 9일 서울로 돌아왔는데, 이승만을 만나기보다 먼저 경교장을 방문하고 김구와 요담한 사실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이튿날 제5차 국무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했고, 그에 앞서 기자 회견에서 "그동안 몸이 괴로워서 정양하고자 시골에 가 있었다"고 하면서 "내 언동으로 돕지는 못하나마 파괴 같은 것은 하여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경향신문> 1948년 8월 11일 "몸 괴로워 정양, 난관 있어도 밀고 가자").
이승만의 처사를 마음으로는 용납할 수 없지만, 이승만이 못할 짓을 한다 해서 자기까지 못할 짓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부통령을 사임함으로써 새 정부가 깨어질 때 책임질 만한 대안이 없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다. 같은 날 <동아일보> "우선 정권 회복-귀경한 이 부통령 담" 기사 끝에는 이범석 총리가 이 부통령 기자 회견에 앞서 기자단에게 질문은 하지 말 것을 요청하고 부통령의 담화 발표 후 기자들의 질문을 가로막은 사실이 적혀 있다. 부통령이 새 정부의 잠재적 '내부고발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언론인 우승규는 조각 인선에 대한 이시영의 불만이 특히 총리, 외무, 내무의 세 자리에 초점을 둔 것으로 파악했다(<경향신문> 1948년 8월 7일 "초대 이범석 내각의 해부 1"). 이시영이 경무부 수사부국장 이만종을 불러서 만난 사실만 봐도 고문 살인 연루 혐의가 있는 장택상의 기용에 반대했을 것은 분명하다. 윤치영에 관한 이야기는 이 일기에서 많지 않았지만, 며칠 전(8월 2일) 일기만으로도 그에 대한 당시 여론이나 이시영의 의견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시영이 수원으로 가던 날 아침 윤치영이 방문했으나 면회를 거절했다는 기사도 보인다. (<조선일보> 1948년 8월 5일)
이범석에 대해서는 이시영이 근본적인 반감을 갖지 않았을 것으로 우승규는 보았다. 국방부 장관이 그의 적임이라고 인정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인(武人)인 이범석이 정치적 책임을 더 크게 갖는 자리에는 맞지 않는다고 보았을 것이라 한다. 장택상과 윤치영의 기용 등 이승만의 말도 안 되는 조각 방침에 이범석이 동의한 것을 정치인 아닌 무인으로서의 한계로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다.
새 내각의 인선 내용에 불만을 가진 것은 이시영만이 아니었다. 가히 거국적인 불신과 비판의 대상이었다. 8월 6일자 <경향신문>의 "초대 내각과 각 정당 반향" 기사를 보면 이승만의 직계 세력인 독촉마저 흔쾌한 지지를 못하고 있고, 대부분 우익 단체도 비판적 태도다.
◊ 독촉=독립 완수의 현단계적 목표는 미군정으로부터 하루바삐 행정권 이양을 받아 유엔의 승인을 받는 데 있으나 국부적인 내각 구성원에 대한 불만은 없는 바 아니나 대국적 견지에서 금반 초대 내각을 지지하는 것이 우리 국민의 당면한 임무일 줄 안다.
◊ 대청=뜻밖이다. 민생 문제라든가 기타 제 문제를 타개할는지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서북청=섭섭하다. 초당파적이라고 내걸고도 오히려 편파적인 결과를 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더구나 이번 조각에 서북인이 한 분도 선출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 이북인대표단=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으나 월남 동포의 사활 문제를 해결 못하는 정부는 단명일 것이라는 점만을 지적해 둔다.
◊ 독로당=자주성 없는 정부에 대한 시시비비를 말할 흥미조차 도무지 없다.
◊ 신진당=무엇이라고 말 할 수 없다.
◊ 한독당=관심이 없으므로 말하기 싫다.
◊ 민련=처음부터 민심을 안가지고 있다.
◊ 여자국민당=기대와는 어긋나는 점이 있으나 외정의 혹독한 경험이 있는 우리는 불평불만은 안하겠다.
◊ 조민당=초대 조각이 너무 의외에 감이 없지 않다. 그중에 여자 장관이 선임되었다는 것은 여권 옹호의 선진국에서도 보기 드문 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비약적인 발전일 것이다.
◊ 민독=우리 당으로선 거기에 대하여 언급할 수 없다.
◊ 한민=후일 이에 관해 정식 담화를 발표하려 한다.
같은 날 <조선일보>에는 조각 내용에 대한 여러 개인의 논평이 실렸는데, 재미있는 내용이 많다. 국회의원 중에서는 이청천의 "비평하려 들자면 여러 가지로 말 할 수 있으나 일절 언급하고 싶지 않다", 김약수의 "내각이라기보다는 이 박사 비서진이라 말하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이남규의 "초당파적 내각이라 하나 현실을 무시한 데 실망했다. 이러한 조각을 한 뜻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김영동의 "대통령의 독재도 좋으나 민의에 이반된 데 실망했다" 등 논평이 있었고, "이번 조각은 전체로 보아 국내 세력을 소홀히 한 감이 불무하며 (…) 백성은 실질적인 것을 바라는데 너무 형식만 갖춘 것 같이 인상을 줌은 유감"이라는 변호사 정순석의 논평, "금반 조각은 너무나 정실 관계로만 되어 있으며 정실로 하더라도 강력한 조각이나 되었으면 좋을 것을 그렇지도 않고 (…)" 하는 대법원 이 아무개의 논평(이상기 대법관으로 필자는 추측),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하는 정보국장 김광섭의 논평이 있었다.
어떤 인물들이 각료로 임명되었기에 그토록 세간의 평이 나빴을까? 당시 신문에 보도된 장관-처장들의 경력을 뽑아본다.
◊ 김도연 재무장관
서울 출신 당년 55세 한민당 중위 / 1919년 3월 일본 경응대학 경제학과 졸업 / 1927년 8월 뉴욕 컬럼비아 대학 경제학사 획득 / 1931년 아메리카 대학 경제학 박사 학위 획득 / 1931년 6월 연희전문학교 강사 / 1935년 4월 조선잠사회사 감사역 / 1946년 5월 민주의원 의원 / 동 10월 입법의원 의원 / 1948년 5월 대한민국 의회 의원
◊ 이인 법무장관
경북 대구 출신 52세 / 일본 명치대 법과 졸업 / 경성법학원 강사, 물산장려회장, 어학회 간부 등 역임 / 어학회사건으로 3년간 집행 유예, 석방 후 총무 겸 부장 등 역임 / 현재 과정 대검찰청장
◊ 조봉암 농림장관
경기도 강화 출생 50세 / 1921년 중앙대학정경과 졸업 / 1920년 3·1 운동 사건으로 서대문감옥에서 1년 징역 / 1925년 27년 양차에 걸쳐 조공 대표로 모스크바 코민테른에 파견 / 1934년 중국 상해에서 활약 중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감옥에서 7년 징역 / 1945년 1월 해외연락 관계로 인천에서 일본헌병대사령부에 체포되었다가 8·15 해방으로 출옥 / 1946년 민전에 참가 후 동년 이탈 / 1947년 3월 민주주의독립전선 의장단 참가 / 1948년 5월 대한민국 국회의원
◊ 민희식 교통장관
본적 서울시 계동67의22 / 1908년~1911년 중국 연대명법학당 재학 / 1911년~1915년 귀국 후 가정에서 학업 습득 / 1915년 9월 도미 / 1918년 5월 콜로라도 주 골덴고등학교 졸업 / 1922년 5월 콜로라도 주 광산학교 입학 / 1922년 9월 네바다주립대학 경제과로 전학 / 1924년 5월 동교 졸업 / 1924년 5월 캘리포니아 하계대학 동양무역 및 국제통상과 수료 / 1925년 9월 귀국 후 조선총독부 철도국 취직 / 1928년 의원퇴직 / 1945년 8월 한국인 직원 요청에 의하여 교통국에 재취직 / 1945년 12월 운수국장 고문을 원명 / 1947년 2월 운수부장 취임 (<경향신문> 1948년 8월 4일)
◊ 윤치영 내무부장관
서울 출신 당 51세 / 일본 와세다대 법과 졸업 / 미국프린스턴대학에서 3년간 국제법 및 외교 연구 / 컬럼비아대학 연구과에서 1년간 국제법 및 외교 연구 / 조지워싱턴대학 국제법 및 외교 연구과에서 BA의 학위 수득 / 아메리칸대학 학사원에서 국제법 및 외교학으로 MA 학위 수득 / 조지워싱턴대학 법과에서 국제법으로 LLB 학위 수득 / 카네기국제평화재단 국제법 및 외교 연구부에서 5개년간 연구 / 대한민국임시정부 워싱턴주재 구미위원부 위원 / 하와이동지회총본부 이사 겸 재무부장 / 제2차 태평양대회 한국대표로 출석 / 경성중앙기독교청년회 부총무 / 민주의원 비서국장 / 국제법 및 외교연구회 이사장 / 조선민족청년단 이사 / 주간태평양 주필 겸 이사 / 국회의원
◊ 안호상 문교장관
경남 의령 출신 48세 / 중동학교 수료 후 일시 동경에 유학, 중국에 건너가 상해오송동제대학 예과(독일인 경영) 필업 후 독일에 유학, 뮌헨대학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학위 획득 / 귀국 후 보전 교수 역임 / 서울대학 교수 및 건국실천원양성소 교원으로 현재에 이름.
◊ 전진한 사회장관
강원도 고성 출신 48세 / 1928년 와세다대 정경학부 졸업 / 1926년 협동조합운동사 조직위원장 피임 / 1928년 사상범으로 1년간 복역 / 1939년 금간산중에 은거 / 1945년 전국협동조합총본부 위원장, 민통 노농부장, 대한노총 위원장 역임 / 1948년 국회의원 피선
◊ 윤석구 체신장관
충남 서천 출생 57세 / 한영중학교 중업 / 도만(渡滿)하여 독립단에 참가 / 군산메리벌덴여학교서 교육에 종사 / 한약업에 종사 / 해방 후 군산건준위장 독촉군산지부장 비상국민회의 대의원 한독당군산위원장 입의 의원 등 역임 / 현 국회의원 무소속구락부 간사장
◊ 임영신 상공장관
전주 출생 당48세 / 미국남가주대학 졸업 / 중앙보육학교장 / 중앙여자전문대학교장 역임 / 해방 후 여자국민당 당수 민주의원 의원을 역임 / 재작년 민주의원 대표로 도미하여 국련에서 활약하고 현 중앙대학 학장.
◊ 장택상 외무장관
경북 칠곡 출신 56세 / 에딘버러대학 졸업 / 파리강화회의 임정구미위원부 조선대표 / 고 이관용 씨 수행 귀국 후 교육계 종사 / 해방 후 국민대회준비회 외교부 피임 / 현재 서울시 상임고문 제1총감부경무총감 겸 수도경찰청장
◊ 유진오 법제처장
서울 출생 당44세 / 경성대학 졸업 / 보전 교수 겸 법정대학장 / 국회 헌법기초위원회 전문위원
◊ 김동성 공보처장
개성 출생 1909년 / 중국 소주 동오대학 유학 / 1912년 미국 아칸소 주 칸웨이 시 헨드럭스·애카데미 졸업 / 1915년 오하이오주립대학 3년 수료 / 1918년 귀국 / 1920년 동아일보사 입사 / 1921년 하와이에서 열린 만국기자대회 출석 / 1921년~22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워싱턴군축회의출석 / 1924년 조선일보 편집인 취임 / 1932년 조선일보 편집국장 / 1945년 합동통신사 사장 취임 금일에 이름 (<동아일보> 1948년 8월 5일)
안호상, 전진한처럼 중량감이 떨어지거나 검증 안 된 느낌이 드는 인물에 대해서도 불만이 있었지만, "말도 안 된다!" 하는 손가락질을 모은 것은 장택상, 윤치영, 임영신의 세 사람이었다. 장택상은 최근 터진 고문 치사 사건까지, 지난 3년 동안 너무나 악명을 떨친 사람이었고, 윤치영과 임영신은 아무 주견 없는 이승만의 '비서'였다. 김약수의 "이 박사의 비서진" 논평이 그래서 나왔다.
8월 4일 국회에서 새 의장단이 선출되고 이튿날 김병로 대법원장 인준안이 통과됨으로써 새 정부의 윤곽이 확정되었다. 국회의장 선거에서는 신익희가 재석 176인 중 103표를 얻어 56표의 김동원을 눌렀다. 신익희가 비운 부의장 자리를 놓고는 경쟁이 치열해서 2차 투표까지 과반수 득표자가 없었고, 결선 투표에서 87표를 얻은 김약수가 74표의 김준연을 겨우 따돌렸다. 두 차례 선거에서 모두 한민당이 패퇴한 사실이 눈길을 끈다. 한민당이 부의장 자리 하나를(김동원) 이미 확보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독촉계와 무소속이 힘을 합쳐 한민당을 견제하는 경향도 있었던 것이다. 제헌국회에서 무소속(소장파)이 상당한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한민당과 이승만 사이의 대립 관계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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