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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의 경제학, 삼성이 '1등 먹은'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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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깽판'의 경제학, 삼성이 '1등 먹은' 비결? [새로운 정치경제학] '한국 재벌' 연구한 박형준을 만나다
임수경이 평양으로 갔던 해였다. 참교육을 내건 전교조가 설립됐고, 1490명의 교사가 학교에서 쫓겨났다. 대학 사회의 주도권은 여전히 학생운동권이 쥐고 있었다. 독일에선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선 인민해방군의 탱크가 학생들을 깔아뭉갰다. 이른바 '3저 호황'이 막을 내린 시기로 이 무렵을 기억하는 이들도 있겠다.

때는 1989년 어느 날, 한 공과대학 신입생이 학생회관에 있는 연극 동아리 문을 두드렸다. 당시 대학 동아리가 으레 그랬듯, 연극 동아리라고 해서 꼭 연극만 하는 건 아니었다. 사회과학 세미나와 집회 참가가 필수 과목이었다. 세미나 커리큘럼에서 핵심은 정치경제학이었다. 당시엔 마르크스 경제학을 이렇게 불렀는데, 올바른 표현은 아니다. 구소련의 정치경제학 교과서를 거의 베낀 책이 교재로 쓰였다.

강의실 밖의 사회과학 고수들, 다 어디로 갔나

당시 대학가엔 사회과학 고수들이 많았다. 이들이 꼭 사회과학 대학에 학적을 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들이 공부하는 사회과학은 대부분 강의실에서 가르치지 않는 내용, 주로 마르크스주의 이론이었다.

강의실 밖 사회과학 고수들 가운데 일부는 활동가, 또 일부는 직업적인 연구자가 됐고, 나머지 다수는 평범한 생활인으로 산다. 연극동아리 문을 두드렸던 신입생 역시 나머지 다수가 될 뻔 했다. 토목공학 전공을 살리면 재벌 계열 건설회사 취업은 쉬운 일이었다. 지금과 달리, 대기업 취업 문턱이 몹시 낮던 시절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길을 택했다. 대학 시절 품었던 생각에 대한 미련 때문이다. 연극 동아리 문을 두드리던 신입생 시절엔 예상하지 못했던 진로였으리라.

학적 상 전공과 실제 공부하는 내용이 다른 생활을 청산하기로 했다. 영국으로 건너가 마르크스의 소외론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시절,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파국', '위기' 등의 낱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들이 보기에 한국 경제는 자본주의 일반의 성격만 지닌 게 아니었다. 종속성이라는 특징이 또 있었다. 식민지, 또는 신식민지라는 규정을 빠뜨릴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한국 경제는 가까운 어느 시점에 무너지거나, 적어도 성장은 멈춰야 했다.

이런 진단이 맞았더라면, 강의실 밖 사회과학 고수들 가운데 꽤 많은 수가 가던 길을 계속 갔을 게다. 그러나 현실은 진단과 달랐다. 1980년대 말은 '저달러·저유가·저금리'의 이른바 '3저 호황' 시기였고, 그 이후에도 한국 경제는 그럭저럭 성장세를 이어갔다. 반면, 강의실 밖 사회과학이 모범으로 삼았던 사회주의 국가들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정치경제학 교재에 뭐라고 쓰여 있건 간에, 현실의 모순은 그대로였으므로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투사로 남았다. 중요한 건 실천이고 이론은 공허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정치경제학 역시 이론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점점 수가 줄었고, 강의실 밖 사회과학 고수들은 각자 먹고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마르크스의 저술을 손에서 놓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에게 마르크스 경제학은 구체적인 현실을 분석하는 도구가 아니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윤은 착취에서 비롯된다"라는 명제를 움켜쥔 걸로 족했다. 그들은 1990년대 중반 내내 문화비평을 하거나 프랑스 철학자들의 난해한 글을 읽으며 지냈다.

▲ 박형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그가 바로 연극 동아리방 문을 두드린 문제의 '공과대학 신입생'이다. ⓒ프레시안(김봉규)

위기 앞에서 손 놓은 사회과학


그렇게 다들 위기, 파국 등의 낱말을 잊었다. 정치경제학 세미나를 할 때는 그렇게 자주 쓰던 말이었는데. 그러다 갑자기, 까맣게 잊고 지내던 낱말이 현실로 뚝 떨어졌다. 1997년 구제금융 사태. 한국경제가 망할 뻔한, 진짜 위기였다. 사람이 아플 때 의사가 간절하듯, 사회과학은 사회의 변화가 급류를 탈 때 절실하다. 그런데 막상 위기가 닥친 자리에서 사회과학 논쟁이 허전했다. 적어도 마르크스 이론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전직 토목공학도가 보기엔 그랬다.

1997년을 계기로 한국의 사회, 경제, 정치, 문화는 거대한 변화를 겪었다. 대개들 신자유주의와 정권 교체라는 키워드로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그걸로 변화의 본성을 설명하기엔 부족해 보였다. 물론 사회의 변화 앞에서 학자들이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곳곳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대표적인 게 '주주자본주의' 진영과 '재벌과의 타협론' 진영 사이의 논쟁이다. 전자의 대표 주자는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현 경제개혁연대)에서 활동했던 경제학자들이다. 후자의 대표 주자는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다. 대안연대로 묶인 연구자, 전문가들이 이런 입장이다. 경제학설사 흐름에 따라 거칠게 나누면, 전자는 신고전파 이론에 가깝다. 상대적으로 시장 원리에 충실한, 경제학 이론의 주류에 속한다. 후자는 발전국가론이다. 국가의 중립적인 역할이 경제 성장의 핵심 동력이라는 입장이다. 그리고 이런 양 쪽의 논쟁은 접점을 찾지 못한 채 방치돼 왔다. '경제민주화'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올랐던 지난해, 장하준 교수와 정승일 사회민주주의센터 공동대표, 이종태 <시사IN> 기자 등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부키 펴냄)라는 대담집을 출간하면서 논쟁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들 세 명은 후자 쪽의 대표 주자들이다. 그러나 논쟁이 겉돌기는 마찬가지였다.

양 쪽 진영 모두 나름의 완결성이 있다. 따라서 양 쪽 지지자 역시 자기 확신이 견고하다. 그러나 현실을 설명하기엔 부족해 보였다. 전자가 시장을 신비화 했다면, 후자는 국가를 신비화 했다는 판단이다.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현실 속 시장과 국가는 그 자체로 완결적인 질서를 가진, 서로 동떨어진 구조물이 아니다. 몸으로 경험하는 시장은 썩 효율적이지 않으며, 실제로 겪어본 정부는 별로 깨끗하지 않다. 국가와 시장은 칡넝쿨처럼 서로 얽힌 채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가깝다. 시장 또는 국가를 세상의 다른 질서와 동떨어진 구조물로 이해하는 태도가 현실감이 떨어져 보이는 이유다.

국내 산업자본과 외국 금융자본의 대립 구도는 허구다

▲ <재벌, 한국을 지배하는 초국적 자본>(박형준 지음, 책세상 펴냄). ⓒ책세상
그렇다면, 대안은 뭘까. 이리저리 헤맨 끝에 만난 사람이 케나다 요크 대학에서 강의하는 조너선 닛잔 교수였다. 그의 '권력자본론'을 통해 자본과 국가, 시장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새로운 눈을 얻게 됐다. 이런 눈으로 1997년 금융 위기를 분석하는 논문을 써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극 동아리방 문을 열고 들어가던 1989년 어느 날부터 시작된 세상 고민이 한 매듭을 짓는 순간이었다. 최근 <재벌, 한국을 지배하는 초국적 자본>(책세상 펴냄)을 출간한 박형준 박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이야기다. 이 책은 앞서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저자의 박사 논문 '지배자본과 한국자본주의의 전환-냉전에서 지구화로'를 보완한 것이다. 국가와 시장이 반드시 대립하는 것도 아니며, 국가 합리성, 시장 합리성 모두 진보진영의 이상이 될 수는 없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1997년 위기 이후 진행된 한국사회의 급격한 변화 역시 이전 시기와의 '구조적 단절'이라고만 볼 수 없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1997년 이후 진행된 변화의 핵심은 국내 재벌이 외국 자본과 상호 융합하여 한국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한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저자는 국내 산업자본은 선하고 외국 금융자본은 악하다는 구분법에 그가 동의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다. 국내와 국외의 구분 자체가 의미 없다는 것. 중요한 것은 '지배 자본과 사회' 사이의 대립이다.

자본은 권력이다

ⓒ프레시안(김봉규)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일하는 그를 만났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려면, 이번 책에서 그가 사용한 이론 틀을 알 필요가 있다. 그의 지도교수인 조너선 닛잔의 '권력자본론'인데, 한국의 많은 진보 지식인들이 공유하는 마르크스주의와는 전혀 다른 성격이다. 물론, 주류 경제학 이론과도 완전히 다르다.

생산, 또는 화폐라는 키워드로 자본주의를 이해하려던 게 기존의 정치경제학(또는 경제학)이다. 마르크스 이론 역시 이 범주 안에 든다. 그러나 실제 자본주의, 그리고 시장경제의 역사를 살피다 보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예컨대 아날 학파의 수장격인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자본주의를 생산 활동이나 시장경제와 등치시키는 관점을 거부한다. 시장에서 화폐를 매개로 교환행위가 이뤄지는 건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전부터 있었던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징은 무엇인가. '권력'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하는 건 이 대목이다. 흔히 '과시적 소비'를 뜻하는 '베블런 효과'로 잘 알려진 소스타인 베블런도 비슷한 생각이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생산 활동과 전혀 별개의 개념이다. 생산에 투입된 노동력으로부터 자본주의적 이윤의 원천을 찾았던 마르크스와는 거리가 먼 주장인 셈. 닛잔 교수의 '권력자본론'은 베블런의 이런 입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개념이다.

자본주의의 예찬자 또는 비판자 모두 자본주의의 높은 생산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권력'이라는 키워드로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학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자본은 생산의 효율을 높이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전략적인 사보타주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고 권력을 행사하는 게 자본이다. 베블런은 사보타주를 "생산현장에서 효율성을 의도적으로 퇴보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정치경제학자 홍기빈은 <자본주의>(개념사 시리즈, 책세상 펴냄)라는 책에서 베블런과 닛잔이 사용하는 사보타주 개념을 "공동체 전체의 물질적 활동에 대한 '깽판 놓기'"라고 설명했다. 토지, 자원, 혹은 생산 설비, 컴퓨터 소프트웨어 등 공동체의 물질적 활동에 필수적인 사물에 대해 배타적인 소유권을 설정한 뒤 자신들에게 일정한 대가가 보장되지 않는 한 아무도 그걸 사용할 수 없도록 강제하는 힘, 그게 바로 자본이다.

'깽판' 놓을 수 있는 힘이 권력

물이 필요한 마을이 있다고 하자. 주민들이 나서서 우물을 파야 한다. 여기에 필요한 다양한 지혜와 지식은 마을 공동체 전체가 공유하면서 전승해 온 것이다. 우물 파는 작업에 주민을 동원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강압을 쓰는 경우부터 명예나 물질적 이익 등을 내걸고 꼬드기는 방식, 또는 인간의 이타적 속성을 잘 드러내게끔 하는 어떤 방식 등. 그래서 우물을 제대로 팔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까지는 자본주의와 무관한 '산업 활동'이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있었고, 구소련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있었던 활동이다.

일단 우물을 팠는데, 그걸 누군가가 배타적으로 소유한다면. 그래서 공동체의 나머지 구성원들이 그에게 어떤 대가를 지불하며 우물을 쓰게 해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이제부터가 자본주의다. 적어도 '권력'이라는 키워드로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이들은 그렇게 본다. 우물을 소유한 자는 자신이 기대하는 이윤을 얻지 못한다고 판단하면, 우물을 폐쇄할 수 있다. 또 자신에게 이윤을 보장하는 수준으로 책정된 가격에 따라 비용을 지불한 사람에게만 우물물을 공급할 수 있다. 비용을 지불할 수 없는 사람은 배제된다. 이게 권력이다. 마을 공동체 전체의 효율이라는 관점에선 답답한 노릇이다. 그러나 공동체의 물질적 활동에 "깽판"을 놓는 것, 요컨대 사보타주를 하는 게 자본의 핵심적인 속성이다. 당연히 이런 사보타주 행위는 우물 소유자의 결심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제도의 뒷받침이 필수적이다. "돈 없는 사람은 물마시지 말라"라는 선언을 현실로 구현하는 건 물리력이다. 돈 안 내고 물을 마시는, 요컨대 물을 훔치는 주민을 적발해서 처벌하는 행위, 그게 국가의 역할이다. 우물을 여러 곳에 파고, 소유자 역시 여러 명이 된다면, 그땐 권력끼리 충돌하고 연합하는 일이 생긴다. 국가는 좀 더 복잡한 역할을 하게 된다. 어떤 경우건 자본과 국가는 서로 뒤엉킨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자본은 생산성 향상을 원한다? 실제론 반대!

사보타주는 권력의 일반적인 속성이다. 자칭 '1등 신문' <조선일보>의 힘이 기사의 질에서 나온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1등 신문'이 누리는 권력은 공동체에 "깽판"을 칠 수 있는 가능성에서 나온다. 멀쩡하게 일하던 고위 공직자에게 업무와 무관한 일로 시비를 걸어 한방에 내동댕이칠 수 있는 힘, 그게 권력이다. 이렇게 "깽판"을 치고 나면, 공동체는 혼란에 빠지고 모든 일의 효율은 떨어진다. 대신,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은 '1등 신문'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춰주게 된다. '1등 신문'의 권력은 더 세진다. "생산성을 의도적으로 떨어뜨리는 행위"라는 사보타주에 대한 베블런의 정의에 딱 들어맞는다. 권력은 모두 마찬가지다. 노조가 파업의 가능성으로 사용자를 압박하듯, 자본이라는 권력 역시 사보타주의 가능성으로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을 압박한다.

이런 이론 틀은 경제학의 세계에선 낯설지만, 일상 경험에 비춰보면 오히려 쉽게 다가온다. '전략적 사보타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 확대하는 사례는 주변에서, 특히 폭력적인 남성 관리자들에게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박형준 연구위원의 작업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는 이런 이론 틀을 수용한 데 그치지 않았다. 한국의 지배 자본인 재벌의 형성과 성장, 한국경제의 위기와 성격 변화 등을 닛잔 교수의 '권력자본론'으로 실증적으로 분석하고 검증했다. 자료를 수집하고 통계를 분석하는 일에 꼬박 10년이 걸렸다. 그만큼 내용이 묵직하다. 박 연구위원의 책을 독자들에게 권하는 이유다. 지난 2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프레시안 편집국 회의실에서 나눈 이야기를 간추렸다.

발전국가론, 국가의 한 쪽 면만 봤다

프레시안 : 박사논문을 책으로 냈다 길래, '재미'라는 면에서는 별 기대를 안 했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흥미로웠다. 재미있는 표현이나 예시가 많이 눈에 띄었다. 예컨대 재벌의 경영권이 자식들에게 대물림 되는 과정에서 계열분리가 되는 현상을 봉건 영주가 영지를 떼주는 '봉분' 개념 또는 고대 부여족이 남하하면서 고구려, 백제, 왜 등의 지역에 새로운 정치권력을 만드는 현상 등에 빗대 설명한 경우 등이 그렇다. 권력 현상이라는 점에선 재벌이나 고대 왕조나 비슷한 면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비유일 게다.

재벌 문제를 놓고 주주자본주의를 긍정하는 측과 발전국가론을 지지하는 측이 논쟁을 벌였다. 이 책은 전자, 즉 주류 경제학의 입장에 대한 비판은 일단 전제로 놓고 시작한 느낌이다. 대신 후자, 재벌과의 타협이 가능하며 국가가 중립적인 입장에서 산업 발전을 이끌 수 있다는 발전국가론에 대한 비판에 무게가 실린 것 같다. 요컨대 장하준 교수에 대한 비판이 종종 눈에 띈다.

박형준 : 장하준 교수의 이론적 근거인 발전국가론은 새로운 유행이 아니다. 다만 한국 상황에선 갑자기 불거진 것처럼 비칠 수 있다. 이건 학생운동 탓이 크다. 발전국가론이 유행하던 시기는 1980년대인데, 당시 대학가에선 마르크스주의가 대세였다. 종속이론이라는 틀로 한국경제를 바라보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렇다 보니, 외국 학계에서 주목받던 발전국가론은 한국에서 제대로 관심을 끌기 어려웠다.

이후 1990년대를 지나면서, 학생운동이 몰락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은 문화 영역에서만 남게 됐다. 마르크스주의로 경제 현상을 분석하는 경우는 찾기 어려워졌다. 진보 경제학을 마르크스주의가 독점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마르크스주의가 퇴조하자, 진보 경제학 담론에 공백이 생겼다. 그러다 1997년 금융위기가 터졌다. 그때 공백을 메우며 들어온 게 발전국가론이라고 본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반영된 면도 있다. 이런 점에서 시기가 좋았던 셈이다. 또 장 교수의 뛰어난 능력과 글 솜씨 역시 발전국가론이 대중적인 관심을 끌게끔 한 이유가 됐다고 본다.

그러나 발전국가론은 1980년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급격한 성장을 이루던 시기에 발 맞춰 나온 이론이다. 지금 상황에 어울리는 이론인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또 국가의 역할을 지나치게 중립적으로, 긍정적으로만 묘사한 것도 동의하기 힘들다.

게다가 GDP로 측정할 수 있는 발전만 갖고 국가가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따지는 것 역시 잘못이다. 지난 시기, 국가가 일방적으로 재벌 편에 서서 경제정책을 펼치고 노동기본권을 철저히 억압하면서 만들어진 안전불감증 문화, 노동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시각에서 나온 노후 대책 부재, 시험으로 속성인재를 양산하는 교육 문화 등에 대해선 왜 눈을 감는가. OECD 내 산업재해 사망률 1위, 노인 자살률 1위, 주당 노동시간 1위 등의 기록은 그 결과물이다. 장 교수는 국가의 산업정책 개입, 금융 통재를 통한 자원 배분 등 생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국가의 모습만 선별적으로 강조한다. 국가의 산업정책을 이야기할 때는 발전국가 모델의 특수성을 이야기하지만, 재벌의 폐해 등을 이야기할 때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라며 보편성을 강조하거나 신자유주의에만 책임을 돌린다. 이게 옳은 태도인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이 세상에 주주자본주의 모델과 발전국가 모델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모델뿐인 양 말하는 이들이 있다. 이건 잘못이다.

ⓒ프레시안(김봉규)

마르크스 이론은 19세기 경제학일 뿐

프레시안 : 사회과학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사회과학 담론이 부실하다는 느낌이다. 1997년 구제금융 사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등은 사회의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그런데 이런 시기를 설명하는 이론 틀이 너무 앙상하다. 한국에선 신고전파의 범주 안에 있는 주류경제학과 발전국가론 외엔 다른 입장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굳이 꼽자면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있겠다. 한때 대단한 영향력이 있었고, 지금도 상당수 진보 지식인들에겐 생각의 관성으로 남아 있는데, 정작 지금 눈앞의 현실을 설명하는 데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대목 가운데 하나가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비판이다. 이른바 진보 사회과학 서적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해 분명히 선을 긋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과거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했던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마르크스주의를 그냥 잊고 지내거나 무조건 단절하는데만 급급했던 것 같다. 반면, 이 책의 입장은 과거의 문제의식을 이어가면서 동시에 마르크스주의를 나름의 방식으로 넘어서려는 시도로 읽혔다.

박형준 : 마르크스 경제학은 기본적으로 19세기 정치경제학이라고 본다. 그 당시 기준으로 보면, 마르크스 이론은 요즘의 미래학이나 다름없었다. 한계와 위대성이 동시에 있다고 본다.

그런데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을 지나면서 자본주의가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주식시장의 발전, 경영과 소유의 분리 등이 그 예다. 하지만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은 여전히 19세기의 틀로 20세기의 자본주의를 설명하려 든다. 여전히 노동가치론과 공황론으로 정리된다.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은 누구나 자본의 축적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실질적인 분석 틀을 만들어낸 경우를 보지 못했다. 노동가치론의 한계 때문이다.

화폐 가치로 표현되는 가격 체계를 추상적 노동의 투여량으로 측정되는 가치체계로부터 도출해내는, 이른바 전형 문제가 대표적인 사례다. 온갖 수학적 방법을 동원했지만 결국 해결하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은 정성적인 담론만 이야기한다. 계량 분석이 없다.

예컨대 삼성 자본의 축적 문제를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인) 노동가치론으로 분석할 수 있나. 하지 못한다. 결국 지난 100년 동안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은 말싸움만 했다. "<자본>의 어떤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한다"라는 식의 고루한 논쟁이다.

진보적인 정치경제학자들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를 지배계급이라고 정의했지만, 막상 노동가치론에서는 부르주아를 19세기 이전의 물물교환업자처럼 취급한다. 이게 한계다. 단순히 생산 영역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통제하고 지배하는 사회 계급의 시각에서 가치론을 접근하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사회정치적 관계에서 상품과 이윤의 규정 요소를 찾으려는 가치론이 필요하다. 조너선 닛잔과 심숀 비클러의 '권력자본론'에 주목한 이유다.

가격은 권력이 정한다

ⓒ프레시안(김봉규)
프레시안 :
이 책을 읽으면서 통념이 깨지는 느낌을 받는 독자들이 많을 듯하다. 대표적인 게 '사보타주' 개념이다. "자본은 효율을 추구한다"라는 믿음은, 진보건 보수건 비슷하게 공유한다. 그런데 이 책에선 그게 아니라고 했다. 자본은 스스로 효율을 떨어뜨리는 '사보타주'를 한다고 했다.

박형준 : '권력자본론'이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과 결정적으로 구분되는 대목이 '사보타주' 개념이다. 베블런이 발전시킨 개념이다.

마르크스주의 역시 가치 자체는 생산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베블런이 말하는 '전략적 사보타주' 개념에 따르면, 가치는 '남을 배제할 수 있는 힘에서 나온다'라고 설명할 수 있다. 최근 한국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부당한 '갑을관계'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런 문제가 좋은 사례라고 본다.

시장 가격을 이해하는데서 마르크스 경제학과 주류 경제학은 닮은 점이 있다. 노동 투입량, 혹은 효용에 따라 가치가 정해지고 그게 시장 가격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하지만 이 책이 따르고 있는 '권력자본론'의 입장에선 반대 방향으로 이해한다. 먼저 정해지는 게 이윤이라는 입장이다. 요컨대 강한 권력을 지닌 '갑'인 삼성전자는 '을'인 협력업체와 거래할 때 먼저 자신이 원하는 이윤율부터 정한다. 거기에 맞춰 가격이 정해지고, 납품이 이뤄진다. 권력의 단계마다 같은 방식이 반복된다. 비정규직의 임금이 정해지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자본이 사회적 절차에 미칠 수 있는 힘, 사보타주를 통해 비용을 외부에 전가하고 이익을 사유화할 수 있는 능력, 이런 것들이 반영된 게 가격이다.

박정희는 산업 아닌 영리활동을 지원했다

프레시안 : 지난해부터 불거진 '경제민주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낳은 효과 가운데 이런 게 있다. 예전에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기업인, 재벌총수에 대해 '노력, 또는 능력의 결과'라고 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경제민주화' 논쟁을 거치면서 "재벌의 영향력은 다른 사회 구성원이 누릴 몫을 약탈해서 얻은 것"이라는 인식이 꽤 확산됐다는 느낌이다. '약탈'까지는 아니어도, 재벌의 성공이 개인의 노력만이 아닌 사회적 결과물이라는 인식은 상당히 널리 퍼졌다. 시장 가격이 권력의 반영이라는 논리는 이런 인식을 뒷받침한다고 본다.

이는 다시 재벌의 형성과 국가의 역할이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재벌의 성공은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의 지원을 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이른바 낙수 효과가 작동하던 시절에는 대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다. 그러나 낙수 효과가 사라진 지금은 대기업에 대한 지원이 설득력을 지니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동안 쌓인 사회적 지원의 결과물인 재벌과 국가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느냐라는 질문이 나온다. 발전국가론 입장에선 '재벌의 경영권을 보장해주는 대신, 재벌이 국내 산업에 계속 투자하게끔 하자. 또는 복지국가의 재원조달에 기여하게끔 하자'라는 타협론을 제시한다.

박형준 : 먼저 이야기 하고 싶은 게 정확한 범주 구분이다. 장하준 교수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이라는 구분법을 쓴다. 기능적으로는 가능한 구분이다. 그러나 본성이라는 면에선 옳은 구분법이 아니라고 본다. 베블런은 "자본은 오로지 금융이다"라고 했다. 그 말이 맞다. 삼성전자 공장은 실물이지만, 이 역시 채권과 주식의 형태로 존재한다. 산업자본은 선하고, 금융자본은 악하다거나, 산업자본은 보호하고 금융자본은 통제해야 한다라는 등의 구분은 타당하지 않다.

산업 활동(인더스트리, Industry)과 영리활동(비즈니스, Business)라는 구분이 옳다고 본다. 산업 활동은 자본주의와는 관계가 없는 활동이다. 공장을 짓고 물건을 만드는 활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잘 이뤄졌다. 영리활동은 산업을 사적으로 전유함으로써 이뤄진다. 즉 다른 사람은 사용하지 못하게끔 규제하는 권리를 바탕으로 사용료를 내게 하는 것이다. 이건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이뤄진다.

흔히 박정희가 산업을 키웠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산업 활동은 특정 개인의 리더십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다양한 사회적 자원이 투입되는 과정이다. 박정희가 한 일은 소수 재벌이 산업을 사적으로 전유하는, 영리활동을 지원한 것이다.

1960년 기준 상위 10대 기업 가운데 오로지 두 개, 즉 삼성과 LG만이 1, 2차 경제개발5갸년 계획이 끝난 1972년까지 기존 지위를 지켰다. 나머지 기업들은 대부분 탈락했다. 그런데 1972년 기준 상위 10대 기업들은 내부에서 순위 변동은 있었지만, 대체로 안정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다른 기업이 그 속으로 들어온 사례가 드물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이들 소수 재벌을 전폭 지원했다. 고정된 멤버가 정권과 결탁해서 일종의 분배연합을 구성했다. 물론, 뇌물과 부정행위가 이들을 연결하는 접착제였다.

넓이 지향과 깊이 지향

ⓒ프레시안(김봉규)
프레시안 :
책에서 흥미 있게 봤던 개념 가운데 하나가 '넓이 지향 축적체제'와 '깊이 지향 축적 체제'라는 개념이었다. 지금 한국은 '깊이 지향'인데, 자본이 사업영역을 넓히기보다 비용을 줄이는데 몰두한다는 게다. 그래서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양극화와 사회 갈등이 심해진다고 했다.

박형준 : 권력은 늘 영역을 확장하려 한다. 자본 권력뿐 아니라 모든 권력이 그렇다. 넓이/깊이 지향도 자본 축적의 분석 틀인데, 우선 넓이 지향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신규 사업 확대다. 과거엔 군사정부가 외국 자본에 대해 울타리를 쳐줬다. 그 안에서 국내 재벌들이 정권과 결탁해서 여러 사업 영역을 나눠가졌다. 이렇게 하면 신규 사업 분야에서 손쉽게 영향력을 키울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엔 위험이 있다. 시장의 한계를 넘어 과잉생산을 하게 된다. 1997년 금융위기는 이런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재벌이 넓이 지향으로 마구잡이 확장을 했는데, 과잉생산의 늪에 빠졌다. 이런 조건에선 '사보타주'라는 자본의 권력 행사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위기가 온다. 넓이 지향의 두 번째 방법은 기업 인수 합병이다. 이렇게 되면 기업 자체의 크기는 커지지만, 산업의 영역은 그대로다. 기업 간 경쟁이 줄어드니까 '사보타주'라는 권력 행사가 쉬워진다. 축적 위기를 돌파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깊이 지향의 한 방법은 스태그플레이션을 활용하는 것이다. 불황과 물가상승이 함께 이뤄지는 스태그플레이션은 주류 경제학 이론으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권력자본론의 입장에선 쉽게 설명이 된다. 다른 한 방법은 비용 절감이다. 기술 혁신을 통한 비용 절감은 한계가 있다. 결국 비정규직을 늘리고, 고용 불안을 높이고 협력업체를 쥐어짜는 방법이 남는다. 한국이 지금 이런 단계다. 역사적으로 보면, 깊이 지향 축적체제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사회적 갈등이 커지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넓이 / 깊이 지향' 개념은 현 정부가 강조하는 '창조경제' 구호와 함께 생각해볼 여지가 있어 보인다. 과거 고도성장기, 즉 넓이 지향 축적 체제를 경험한 이들은 지금처럼 기업들이 신규 사업에 소극적인 상황이 답답하게 여겨질 게다. 그러니까 '창조경제', '기업가 정신 활성화', '창업 지원', '신규 투자 확대' 등의 구호를 내건다. 깊이 지향 체제에서 빚어지는 사회적 갈등을 넓이 지향 체제로 돌아가는 것을 통해 풀고자 하는 모양이다.

박형준 : 자본 축적의 역사에서 깊이 지향 체제를 거치는 것은 필연적이다. 다만 정치인들 입장에선 이 과정에서 겪는 사회적 갈등에 대한 부담으로 계속 새로운 구호나 비전을 만들어내야 하는 강박을 느끼는 듯하다.

요즘 한국 재벌들을 보면, 해외에선 넓이 지향을 택하고 국내에선 깊이 지향을 택한 듯하다. 국내에선 비정규직을 늘리고, 해외에 공장을 짓는다. 재벌은 산업자본이므로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이 없는 한 이유다.

재벌은 초국적 부재소유자다

프레시안 : 1997년 위기의 한 원인으로 넓이 지향 축적 체제에서 비롯된 과잉생산을 꼽았다. '1997년 위기'를 바라보는 시각 역시 진영에 따라 확연히 갈라진다. 주주자본주의를 긍정하는 측에선 주로 국가 탓을 한다. 정실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게다. 시장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게끔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 반면, 발전국가론자들은 시장 탓을 한다. 그래서 전자는 주로 부패한 재벌과 싸우고, 후자는 투기적 금융자본을 공격한다.

박형준 : 흔히 1997년 위기를 계기로 한국사회가 구조적 단절을 겪었다고 한다. 국가가 후퇴하고 신자유주의 체제가 됐다는 게다. 그건 사실과 다르다. 변화의 속도가 1997년을 계기로 빨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인 변화의 방향은 그 전부터 예정돼 있었다. 각종 자유화 조치들이 이미 진행 중이었다. 또 멀쩡하던 경제가 갑자기 무너진 것도 아니다. 1997년 이전부터 이미 대기업의 이윤율은 하락하고 있었고, 구제금융 신청을 하기 전부터 약 10개 재벌이 법정관리 상태였다.

1997년 위기를 계기로 한국경제의 세계화가 급진전했다. 이 과정을 설명하며 '생산적인 국내 산업자본'과 '비생산적인 외국 금융자본'이라는 대립 구도를 설정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잘못이다. 세계화는 국내 재벌과 외국 자본이 상호 융합해서 한국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한 현상으로 봐야 한다. 자본은 서로에게 사보타주를 가하며 계속 경쟁하지만, 어떤 한계에 부딪히면 연합을 모색한다. 동서고금의 모든 권력 싸움이 그랬다.

따라서 1997년 이후 진행된 변화의 핵심은 국내 재벌과 외국자본이 소유권을 융합해서 초국적인 지배력을 형성함으로써 한국 사회에 대한 자본의 권력을 강화하고 축적을 확대한 것이다. 따라서 대립 구도는 국내 자본 대 외국 자본이 아니다. '지배적 자본 대 사회'라는 대립 구도가 옳다. 이 과정에서 재벌을 중심으로 조직된 지배블록은 초국적 부재 소유자의 위치에 자리매김 했다. 일종의 부재지주와 같은 개념이다. 자본의 소유권이 산업 부문에 있건 금융 부문에 있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발전국가론자들은 주주자본주의의 위험을 이야기하며, 재벌의 경영권이 외국 투기자본에 넘어갈 위험에 대해 경계한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의 재벌 총수 일가가 스스로 주주자본주의 질서를 받아들였다는 점을 무시한다.

재벌은 권위주의 체제에 결코 도전하지 않았지만, 민중이 피 흘려 쟁취한 민주화 과정에 무임승차했다. 그리고 과거 군부를 중심으로 조직돼 있던 지배블록 내의 권력 네트워크를 자신들 중심으로 재편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한 세계화는 국내 산업자본이 투기적인 외국 금융자본에 종속된 게 아니다. 권력으로서의 자본이 국가의 경계를 너어선 것이다. 재벌을 중심으로 짜여진 한국의 지배계급은 이런 흐름을 타고 초국적 부재소유자의 구조에 편입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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