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의 증언이 언론을 통해 외부로 알려지는 과정에서 진의가 왜곡되거나 잘못 알려지면 재판에 영향을 준다."
"전직 국정원장으로 국정원법에 제한이 있다. 국회에서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선서하지 못함을 양해해달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원세훈 전 국정원장. 대한민국 그 누구보다 법에 가까웠을 이들은 지난 대선 당시 선거법 위반 혐의 등으로 검찰 고발돼 재판 절차 진행 중이었다. 위법 혐의를 받으면서도 이들은 "법대로 하자"며 '증언감정법 3조 1항 및 형사소송법'에 따라 선서 거부권을 행사했다. 거짓 없는 진술 보장을 위한 증인 선서에 대한 거부는 곧 "위증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청문회장에선 "국민에 대한 기만이자 모독"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들의 거부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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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좌파 발 못 붙이게 해야"… 다시 보는 원세훈-김용판 공소장
이들은 무엇이 두려워 증인 선서를 거부했을까. 검찰의 공소장에 따르면, 이들의 혐의는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연결된다. 원 전 원장은 국정원 직원들에게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을 하달함으로써 인터넷상의 선거 개입 활동을 조장했다. 김 전 청장은 수사 과정에서 이같은 사실을 알고도 의도적으로 축소·은폐했다. 결과적으로 이같은 행태들이 모여 대선 결과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줬다는 게 검찰 측의 판단이다.
우선 원 전 원장은 매달 열리는 부서장 회의에서 각종 지시사항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특히 정부 정책 등에 반대하는 세력을 '종북좌파'로 지목하며 척결을 주문하기도 했다.
"세종시 등 국정 현안에 대해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좌파단체들이 많은데 정공법으로 대응해야 한다."
"좌파 교육감들이 주장하는 무상급식 문제에 대해 포퓰리즘적 허구성을 국민에게 적극 홍보해야 한다."
"종북좌파 척결은 물론이고 그 동조세력도 면밀히 점검하고, 종북좌파 세력이 국회에 다수 진출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우리 사회에 발붙일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직원들은 지시사항에 대한 세부 이행 계획과 시행 결과 등을 원 전 원장에게 보고했다. 원 전 원장의 재임 시기 심리전단팀은 1개 팀에서 4개 팀 70여 명으로 확대됐고, 매월 1200~1600건에 이르는 댓글 활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김 전 청장의 경우, 국정원 직원 댓글 수사를 맡은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 디지털증거분석팀에 외압을 행사해 축소 발표를 하도록 한 혐의를 받고 있다.
당시 디지털증거분석팀은 국정원 직원 김 씨의 노트북에서 '오늘의 유머' 사이트 관리 방식과 30여 개의 ID, 비밀번호 등이 담긴 텍스트 파일을 찾아내 윗선 보고했다. 그러나 김 전 청장은 관할 경찰서인 수서경찰서 측에 "증거분석 결과를 넘겨주지도, 알려주지도 말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대선 3일을 앞둔 지난해 12월 16일, 경찰 측은 수사 내용을 축소·은폐한 채 발표했다.
▲ 지난달 16일 국회 국정조사에 참석한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프레시안(최형락) |
혹 떼려다 혹 붙인 청문회… 짙어진 '새누리-국정원-경찰' 커넥션 의혹
이들은 청문회에서 검찰의 이같은 공소 내용을 전면 부인했다. 대부분의 혐의에 대해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뗐다. 그러나 의혹 축소 노력에도, 이들의 작전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오히려 의혹의 싹만 더욱 틔웠다.
검찰 공소장에서는 각각의 혐의가 구체적으로 드러났다면, 청문회에선 이들 사이의 연결고리와 배후의 존재를 짐작하게할 만한 증언들이 연이어 나왔다.
가장 주목을 받았던 증언은 박원동 전 국정원 국장을 고리로 한 김 전 청장과 권영세 주중 대사 사이의 커넥션 의혹이다. 권 대사는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대선캠프 종합상황실장을 맡았다. 야당 측은 청문 과정을 통해 김 전 청장으로부터 경찰 수사 발표 당일인 지난해 12월 16일 박 전 국장이 전화를 걸어 두 사람이 통화한 사실을 확인했다. 박 전 국장 역시 통화 사실을 인정했다. 이어 박 전 국장은 권 대사와의 통화 여부에 대해선 "대선 무렵은 기억나지 않는다"면서도 "평소에 통화하는 사이"라고 답했다.
원 전 원장과 권 대사와의 통화 사실도 새롭게 나왔다. 원 전 원장은 청문회에서 권 대사와 대선 직전인 지난해 12월 13일 통화를 통해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관련 논의를 했다고 밝혔다. 당시 새누리당 의원들이 회의록 공개를 요구하자 상담 차 평소 알고 지내던 권 대사와 통화했다는 게 원 전 원장의 설명이다. 그러나 당시 권 대사는 의원 신분이 아닌데다 대선 직전이라는 민감한 시기 이뤄진 통화라는 점에서 '권영세 몸통설'이 일부 드러났다는 평이다.
이같은 증언 릴레이에 야당 측은 "제보와 귀신처럼 딱딱 정황이 맞아 떨어진다. 원 전 원장과 권 대사, 김 전 청장, 박 전 국장이 아주 긴밀하게 얽혀 있다"면서 '김용판-박원동-권영세-원세훈' 커넥션 의혹을 제기했다.
그런가 하면, 원 전 원장과 김 전 청장에 대한 공소 내용이 사실이라는 내부 증언도 나와 이들의 선거 개입 가능성을 더욱 높였다.
사건 발생 직후 초기 수사를 담당했던 권은희 전 수서 경찰서 수사과장은 지난달 19일 국회 국정조사 2차 청문회에 출석해 "지난해 12월12일 김용판 전 청장과 전화통화를 했다"며 "그 때는 수사팀에서 (국정원 직원) 오피스텔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하려고 준비하던 때였다. 그 때 김용판 청장은 저에게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청문회가 끝난 뒤 지난 2일 열린 원 전 원장의 2차 공판에선 민병주 전 국가정보원 심리전단장이 입을 열었다. 민 전 단장은 이날 원 전 원장으로부터 사이버활동을 통한 '국정지원 및 종북대응'에 대한 지시를 일부 받았다고 인정했다. 그는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에게 유·불리한지 등 정치적 고려는 하지 않았다"며 조직적 개입 의혹을 부인하면서도 "국가기관 명의를 사용하지 않고 일반 국민인 것처럼 글을 게시한 것은 사실"이라고 시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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