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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 들고 밥 먹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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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 들고 밥 먹은 시대’ 쟁점토론 '양김 집권 10년' <6> 유석춘
양김 10년을 평가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양김 시대를 전 시대와 비교하는 방법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ㆍ노태우로 이어지는 건국과 산업화의 시대는 어렵사리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 또 나라의 곳간을 채우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던 시대였다.

이에 비해 김영삼과 김대중이 주도한 10년은 민주화의 정착을 위해 곳간의 빗장을 풀고 밥상을 차려 놓고 국민과 함께 회식을 하자던 시대였다. 축적을 위한 산업화의 시대와 분배를 위한 민주화의 시대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우선 정치적인 차원에서 양김 시대는 앞의 시대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언론 출판 결사 집회의 자유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었고 이에 따라 공안기관의 물리력에 의지한 반대세력 탄압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물론 문제가 완전히 개선되었다고 할 수 없는 측면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정치적 자유의 폭은 엄청나게 확장된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최소한 대학에서 마르크스의 책을 읽는다고 잡혀가지는 않게 되었다. 또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의 필요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 강조되어 왔다.

***양김 시대의 경제는 한마디로 이율배반적**

그러나 경제적인 차원에서 양김 시대의 한복판에는 'IMF 위기'가 자리잡고 있다. 김영삼 정부의 후반에 시작된 경제위기는 김대중 정부의 전반에서야 비로서 '공식적'으로 극복되었다. 30년을 두 자리 숫자로 성장하던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서면서 실직과 고금리라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의 급작스런 등장은 한국 사회를 얼어붙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노동자의 제몫 찾기는 더욱 거세어졌고 결국에는 굴뚝산업의 공동화 현상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또한 확대되었지만 만족할 만한 정책 대안의 확보라는 기준에서는 아직도 많은 문제를 드러내며 표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양김 시대의 경제는 한마디로 이율배반적인 모습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민주화의 근본적 목표인 재분배를 위한 여러 정책적 대안이 모색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모색이 경제위기라는 암초에 부딪치면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좌초하는 불확실성의 시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과거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일하던 노동자들은 거꾸로 제몫 찾기에 거칠게 나섰고, 이에 대응한 기업과 정부의 역할 역시 경쟁력을 기준으로 한 엄격한 모습이기보다는 오히려 대중적 인기에 편승하는 기회주의적 모습을 보였다. 국민소득 만 달러와 OECD 가입을 기념하는 잔치는 40대 가장의 실직이라는 비극으로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양김 시대의 사회상 또한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양김의 집권과 함께 해소되리라 기대했던 지역감정은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금융이나 교육 혹은 의료나 언론과 같은 국민의 기본적인 생활과 관련된 제도에 대한 수술이 대규모로 시도되었지만 무엇하나 분명한 매듭 없이 혼란으로 귀결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화를 유보하며 곳간을 채우던 시대의 아픔이 이제는 끝나는가 하고 기대했던 국민들은 개혁의 뒤안길에 도사리고 있는 부정부패와 조우하면서 결국 곳간의 빗장을 푼 까닭이 당신들의 잔치를 위해서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산업화의 고통은 민주화의 배신으로 연장되었을 뿐이었다.

***다음 시대는 양김이 벌인 잔치상 치우는 설거지 역할**

양김 시대의 이런 모습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우리는 특정한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여러 가지 종류의 서로 다른 역할이 필요함을 알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상황을 빗대어 표현하는 말이 '밥상 차리는 사람 따로, 숟가락 들고 밥 먹는 사람 따로, 그리고 설거지하는 사람 따로'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물론 이런 서로 다른 역할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지면 그 일은 전체적으로 마무리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가장 생색을 내는 사람은 역시 '숟가락 들고 밥 먹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꼬집는 말이기도 하다. 나머지 역할은 그를 위해 필요한 전 단계와 후 단계의 작업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은 '고생한 사람 따로 있고, 광내는 사람 따로 있음'을 비꼴 때 사용되고 있다. 양김 시대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한국 현대사의 '숟가락 들고 밥 먹는 시대'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도록 한다.

양김 이후의 시대는 결국 양김 시대가 벌인 잔치 상을 치우는 설거지 역할을 떠맡아야 할 것이다.

권위주의 체제의 억압에 대한 반작용으로 채택된 민주화가 가져온 무분별한 인기영합을 추스르고 사회의 여러 집단이 스스로의 기여에 걸 맞는 제몫을 찾을 수 있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엄격한 자기관리가 필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두 번의 민주화된 정권이 보여 준 부패의 기록이 이를 요구하고 있다. 세계화라는 전지구적 환경 역시 이를 요구하고 있다. 통일이라는 민족의 당면 과제를 풀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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