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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걸음질 사학법'에 짓밟힌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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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뒷걸음질 사학법'에 짓밟힌 '열정' [기자의 눈]한 순진한 수학교사가 '反盧'로 돌아선 까닭
서울의 한 사립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이 모 씨. 그는 천생 '수학 선생'이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수학을 좋아했고, 그래서인지 추상적이고 논리정연한 것을 좋아한다. 세상 일에 대해서는 '순진한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애당초 적극적인 사회 참여는 자신의 몫이 아니라는 생각이 뚜렷했다. 그래서 '수학 선생' 역할에 충실하며 살자는 마음으로 지냈다. 그런데 이런 그가 지난 2000년을 지나며 확 변했다.
  
  뒤늦게 눈 뜬 사학 비리…비주류 정치인에 대한 기대로 이어져
  
  서울 상문고, 한서고 등 전국 50여 개 사립 중·고등학교에서 사학 분규가 발생했던 당시, 사립학교법 개정을 요구하는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도무지 '운동'에 관심 가질 일은 없어 보였던 그가 사학법 개정 운동에 동참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초임 교사 시절, 재단 관계자에게 성희롱에 가까운 모욕을 당하고도 참아야 했던 기억이 사학의 구조적 문제에 눈을 뜨게 했다. 사학 재단의 누적된 문제에 한 번 관심을 갖고 나니 걷잡을 수가 없었다.
  
  학교의 공사, 수학여행 등 이권이 걸린 사업에서 조금씩 리베이트를 떼는 것은 기본이었다. 이사장 집안의 개인적인 용무에 학생과 교사를 동원하거나, 학교의 자산을 편법적으로 빼돌리는 경우도 흔했다. 앞서 이런 문제를 지적했던 교사가 억울한 징계를 당했다는 이야기 역시 종종 귀에 들렸다.
  
  그에게 2002년은 또 다른 분기점이었다. 변호사 시절에는 훗날 전교조의 모태가 된 YMCA 교사협의회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고, 1999년 서울 종로 재보선에서 당선된 후에는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던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면 적어도 사학법만큼은 학교 구성원의 민주적 참여가 보장되는 쪽으로 바뀌지 않겠느냐는 기대를 품었다. 실제로 노 후보는 사학법의 민주적 개정에 대한 의지를 종종 밝히곤 했다.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단순한 관심이 아니었다. 노 후보에 대한 열렬한 지지였다. 노무현 당선의 드라마를 지켜보며, 많은 것을 배웠다. 원칙과 현실을 놓고 논쟁하는 법도 익혔고,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보수 언론의 위력도 절감했다.
  
  사학법 개정안, 국회 통과…사학법인들은 '불복종'.
  
  노무현 정부 출범 후, 사학법 개정이 예상보다 지지부진해도 그는 한나라당과 〈조선일보〉만을 탓했다. 개혁을 발목 잡는 세력의 힘이 아직 너무 센 탓이라고만 여겼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실망했다"고 말하는 주변 사람들과 논쟁도 숱하게 했다. "추상적인 진보를 외치기보다 사학법 개정 같은 구체적인 개혁 과제부터 차근차근 해결해가야 한다. 그러자면 한나라당을 비롯한 수구세력과 맞서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게 그의 일관된 논지였다.
  
  실제로 사학법 개정은 여권의 4대 개혁 입법 가운데 가장 높은 국민적 지지를 받았던 것이었고, 동료들과의 논쟁에서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지난 2005년 말, 개방형 이사제 도입 등의 내용을 담은 사학법 개정안이 여야 의원들의 몸싸움 끝에 통과됐다. "이번에도 안 될 줄 알았는데…." 품었던 기대가 꺾인 게 이미 몇 차례였다. 그래서인지 감격은 컸다.
  
  하지만 그는 요즘 착잡하기만 하다. 지난 13일 서울시 교육청의 발표를 접하며 이런 착잡함은 끝내 우울함으로 변했다.
  
  서울시 교육청은 이날 "서울시내 사학법인 137곳 가운데 지난 7일까지 개정 사립학교법에 맞춰 정관을 변경한 곳은 55곳(40%)에 불과하고 21곳은 조만간 개정할 의사를 밝힌 상태며 61곳(44.5%)은 정관 변경 의사조차 밝히지 않았다"고 밝혔다. 개정 사학법이 시행된 지 10개월이 지났지만, 이를 무시하는 사학법인이 더 많다는 내용이었다.
  
  개정 사학법의 핵심인 개방형 이사제 도입 현황에 이르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개방형 이사를 선임한 곳은 시내 사학법인 137곳 가운데 36곳(26.3%)에 그쳤다. 서울시 교육청이 개정 사학법을 무시하는 사학법인에 대해 환경개선사업비와 시설지원비 지급 중단 외에도 법인 임직원들의 해외 연수와 포상도 제외하는 등의 내용이 담긴 제재 방안을 담은 공문을 시내 사립학교에 발송했음에도 그렇다.
  
  "노 대통령이 사학법 양보 주문했다니…."
  
  대부분의 초·중·고 사립학교가 정부 지원을 통해 운영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립학교 교사인 이 씨는 이유를 알고 있다. 이 씨는 "사학법이 재개정될 것이 뻔하니까"라며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한숨은 이미 오래 된 것이다. 지난해 4월,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김한길 원내대표와 한나라당 이재오 원내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김 원내대표에게 사학법 문제에 대한 양보를 주문했다는 기사를 보면서부터 생긴 변화다. 사학법 개정안 통과 소식에 환호한 지, 불과 4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뿐 아니다. 노 대통령은 올해 2월에도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사학법이 처리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합의해주기도 했다.
  
  노 대통령이 언급한 '사학법 양보'의 내용은 개방형 이사의 요건 완화다. 개정 사학법에 반발한 사학법인들의 핵심적인 요구 사항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 씨에게 서울시 교육청의 발표 내용을 전하자 "사학법 개정운동에 동참하면서 세상을 제법 배웠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노무현 정권에서는 다를 줄 알았는데, 결국 사학 재단이 이겼다. 정치인들의 말에 일희일비한 게 부끄럽다"고도 했다.
  
  앞으로 더 개혁적인 정치 세력이 등장해도 그는 쉽게 믿음을 주지 못 할 듯 했다. 개혁을 내걸고 표를 구하는 정치 세력에 대한 신뢰가 크게 허물어진 것이다.
  
  숨은 열정 끌어내 집권한 세력이 '정치에 대한 실망' 부추기는 역설
  
  그런데 비주류 정치인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힘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대중의 정치적 관심이었다. 흔히 노무현 후보를 열렬히 지지한 것은 학생운동을 경험한 386세대라고 여긴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앞서의 이 씨처럼 정치의 중요성에 뒤늦게 눈을 뜬 이들이 큰 역할을 했다.
  
  이 씨에게 사학법 개정은 스스로의 삶이 던지는 문제였다. 그리고 사학법 개정에 대한 기대로 노 후보를 지지한 이 씨처럼 삶 속에서 겪은 문제를 합리적으로 풀어내는 리더십을 기대하며 노무현 지지자가 된 경우가 지난 2002년에는 꽤 많았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런 과정에서 개인의 삶과 정치가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을 배웠다. 이런 깨달음은 사회 모순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로 이어질 수 있고, 그것은 한국 민주주의 성장을 위한 소중한 자산이다.
  
  하지만 이런 깨달음이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으려면 '정치에 대한 신뢰'가 필수적이다. 대중의 숨겨진 정치적 열정을 끌어내 집권에 성공한 노 대통령이 역설적으로 '정치에 대한 실망'을 부추겼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자신이 남긴 역사적 성과를 스스로 허무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미래의 가능성까지 꺾는다는 점에서 '정치에 대한 실망'은 '정치적 무관심'보다 더 위험하다.
  
  물론 이런 상황이 노 대통령만의 책임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대선 주자'들은 과거의 노무현 후보처럼 대중에게 울림을 낳는 의제를 던지지도 못 하고 있다. 후보 경선의 규칙처럼 평범한 이들의 삶과 아무 상관 없는 쟁점을 놓고 싸울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앞서의 이 씨처럼 정치적 열정을 실망으로 돌려받았던 이들이 더욱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런 냉소가 '민주주의의 독'이 되리라는 점 역시 분명하다.
  
  '순진한 사람들'이 더 이상 상처 입지 않는 정치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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