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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은 '무제한 감청'의 길 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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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국정원은 '무제한 감청'의 길 열려 한다 '와이브로' 기술유출에 대한 분노 이용해 통신비밀법 개정 압박
"15조 원 가치의 '와이브로 기술'이 미국으로 샐 뻔 했다. 국부 유출을 막기 위한 법 개정이 시급하다."

21일 대부분의 언론이 보도한 내용이다. 하지만 이런 보도가 더 큰 논란을 낳고 있다.

우선 미국으로 샐 뻔했다는 기술의 가치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또 검찰과 국정원이 '국부 유출'에 대한 대중적 분노를 이용해 국민 사생활 침해 가능성이 큰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려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게다가 이 개정안에는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관련 혐의만으로도 감청을 허용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서 연구원들에게 모욕감을 줄 뿐 아니라, 그들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신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원 전체를 잠재적인 범죄자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국정원, '와이브로'관련 기술 해외유출 적발

이날 언론이 보도한 내용은 국가정보원이 지난 18일 배포한 보도자료에 자세히 담겨 있다. 국정원은 당시 보도자료에서 '21일 조간부터 보도가능'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보도자료의 내용은 이렇다.

포스데이타 전직 연구원인 김모 씨는 같은 회사 전직 연구원 정모 씨 등 4명과 함께 지난해 말 미국에서 IT업체를 설립했다.

회사를 창업하기에 앞서 이들은 포스데이타에서 근무하던 지난해 6월부터 '와이브로'(WiBro) 관련 기술 자료를 하드디스크와 이메일 등을 이용해 회사 밖으로 빼돌렸다. 이들은 이렇게 빼낸 자료를 활용해 새로운 회사에서 '와이브로' 관련 연구를 더 진행한 뒤, 회사를 미국 업체에 매각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은 국정원에 파악됐으며, 검찰은 지난 20일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포스데이타 전직 연구원 정모 씨 등 3명과 현직 연구원 황모 씨를 구속기소했다. 그리고 검찰은 미국에 체류 중인 주모자 김 씨 등 3명에 대해서도 국내 소환을 추진 중이다.

'와이브로'는 정보통신부가 국내 IT업체들과 함께 지난 2004년부터 개발에 들어가 지난해 6월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 차세대 무선 휴대통신 기술이다. 국정원에 따르면 이번에 적발된 이들이 회사 밖으로 유출한 것은 개발 과정의 기술 분석 자료인 '테크니컬 메모'와 '기지국 채널 카드', 장비에 대한 테스트 결과, 관련 장비 설계 문서 등이다.

유출된 기술자료, 과연 15조 원 가치인가?

이번 자료 유출 피해 규모에 대해 언론이 '15조 원'으로 보도한 것 역시 국정원과 검찰의 발표를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 발표 내용은 포스데이타 측의 입장을 따른 것이다. 국정원 보도자료에는 "금번 유출된 기술은 국내 S사(삼성전자)와 P사(포스데이타)가 각각 5000억, 900억 원을 투자하여 개발한 세계 최초의 원천기술로 즉시 상용화가 가능하고, 해외 유출에 따른 피해액만 15조 원(P사 및 검찰 측 추산액)에 이르고 있다"고 돼 있다.

포스데이타는 포스코 계열 IT업체로 지난해 매출은 3379억 원, 자산 총계는 2701억3800만원, 자본금은 407억 7600만원 규모다. 이날 언론 보도, 그리고 국정원 보도자료 대로라면 포스데이타가 보유하고 있던 자료가 낳을 피해액이 포스데이타 자산 총계의 55배를 넘는 셈이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포스데이타 관계자는 "15조 원은 포스데이타만의 기대이익이 아니다. 관련 업체들의 매출 예상치"라고 설명했다. 포스데이타가 입을 피해액을 15조 원으로 보도한 일부 언론 기사는 일단 사실과 다른 셈이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15조 원'이라는 수치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와이브로' 기술의 전망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평가한 결과라는 것이다.

기술가치평가 전문업체인 테크란 전형욱 기술평가본부장은 "언론에 보도된 내용은 매우 러프한(거친) 전망"이라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는 "신기술이 미래에 창출하게 될 경제적 가치를 산정하는 것은 몇 단계의 가정을 거치는 작업이다. 언론에 보도된 '와이브로'의 기술 가치는 이런 가정을 모두 매우 긍정적인 경우로 설정했을 때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와이브로' 관련 기술 개발은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 향후 10년 간 한국의 먹을거리를 만들어야 한다며 적극적으로 추진한 사업이다.

하지만 국내 시장에서는 HSDPA(high speed downlink packet access, 고속하향패킷접속) 기술이 와이브로와 경쟁하고 있다. 또 KT에 비해 와이브로 관련 투자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던 SK텔레콤이 HSUPA(high speed uplink packet access, 고속상향패킷접속) 기술을 내년부터 상용화할 방침이다.

와이브로와 HSDPA 및 HSUPA는 개념 차원에서는 전혀 다르지만, 이용자 입장에서는 유사한 기능을 발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런 경쟁의 결과를 점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그 결과를 알지 못 하는 한, 와이브로 기술의 정확한 미래 가치를 산정하는 것은 무리다.

그럼에도 기술 유출 사건이 발생하면, 회사 측은 피해액을 되도록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 전문가들이 국정원 보도자료 속의 "피해액만 15조 원(P사 및 검찰 측 추산액)"이라는 문구를 썩 신뢰하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기술 유출에 대한 분노 틈타 휴대폰 감청 합법화 하겠다?

회사 측이 기술 유출 피해 규모를 부풀리는 이유는 향후 진행될 소송 및 보상 등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국정원 측은 왜 회사 측의 입장을 그대로 따라서 홍보할까. 일단 기술 유출 관련자 검거의 공로를 스스로 과대포장하기 위해서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예상 피해액이 클수록 기술 유출자를 잡아낸 국정원의 공로가 돋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보 인권 문제에 오랫동안 천착해 온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은 좀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이들은 국정원과 검찰이 지난 20일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기술 유출 범죄에 대한 감청 허용 등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며 "국회에 계류 중인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빨리 처리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에 주목한다. 즉 국정원의 오랜 숙원이었던 '합법적 감청'을 위해 이 사건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활용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현재 기술 유출 범죄에 대해 수사기관이 혐의만으로 감청할 수 있도록 규정한 통신비밀보호법(통비법) 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돼 있다. 이날 국정원과 검찰의 주장은 국회가 통비법 개정안을 빨리 통과시키라는 압박인 셈이다.

그런데 통비법 개정안은 '기술 유출 혐의가 있는 사람에 대한 감청 허용'의 내용만 담고 있는 게 아니다.

이 개정안은 과거 불가능했던 이동전화와 인터넷에 대한 감청을 허용할 것, 통신 이용자의 위치정보까지 포함한 통화내역 자료를 1년 이상 의무적으로 보관하고 정보·수사기관의 요청을 받으면 제공할 것, 모든 전기통신사업자는 의무적으로 감청 장비를 설치하고 그 비용은 국가가 부담할 것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정당한 사유 없이 전기통신사업자의 협조 의무 제공을 거부한 자'에 대한 벌칙 조항도 포함돼 있다. 민간 통신업체에서 정부가 요구하는 감청설비 부착을 거부할 경우, 처벌받는다는 뜻이다.

내용이 알려질 경우, 호의적인 여론을 기대하기 힘든 내용들이다. 실제로 지난 3월 국회 법안심사소위에서 논의됐을 당시에도 일부 의원들이 "개인 단위로 휴대하는 이동통신 감청은 집이나 사무실에서 공동 이용하는 유선전화 감청보다 개인 신상정보 노출의 폭이 훨씬 크다"며 반발해 법안이 처리되지 않았다.

'감청 합법화'는 국정원장의 숙원 사업"

진보네트워크 활동가 장여경 씨는 "지난 2005년 소위 'X파일 사건'이 드러나면서 국정원은 여론의 심한 비난을 받았다. 그때부터 '감청 합법화'는 국정원의 숙원 사업이 됐다"며 말문을 열었다. 'X파일 사건'은 지난 1997년 대선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가 광범위한 불법감청을 한 일을 가리킨다.
▲ 김만복 국정원장은 휴대전화 감청을 허용하도록 통신비밀법이 개정돼야 한다고 줄곧 주장해 왔다. "정보는 국력이다"는 구호로 정당화될 수 있는 개인정보 수집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프레시안

실제로 김만복 국정원장은 지난해 11월 24일 국회 정보위 국정감사에서 "국가 안보를 위한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이 시급하다"며 "선진국과 같은 합법적 감청 지원 관련 기술표준 등의 도입이 가능토록 법 제도를 보완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정원 제1차장 재직 당시에도 통비법을 개정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여야 의원들을 자주 만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진보네트워크 활동가 장여경 씨는 "국정원 등 정부당국이 여론의 반발을 우려해 공청회조차 열지 않고 소리 없이 통비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며 "개인의 사생활 정보는 인권 문제다. 이런 '정보인권'을 지키기 위해 통비법 개정안의 문제점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머릿속의 기술, 감시로 유출 막겠다는 발상이 反인권적

사생활 침해 위험 외에 통비법 개정안이 연구개발직 종사자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정보인권'이라는 단어가 국내에 소개됐을 당시부터 관련 활동을 해 온 함께하는시민행동 박준우 정책팀장의 지적이다.

박 팀장은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감청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대로라면, 연구개발직 종사자는 여행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 또 회사 밖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도 샅샅이 조사해야 한다. 기술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면서 "감청 등을 통해 기술 유출을 막겠다는 발상 자체가 비현실적"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박 팀장은 "지난 2004년 열린우리당 이광재 의원 등이 주도해 '산업기술유출방지및보호지원에관한법률(기술유출방지법)'안을 발의했을 당시에도 비슷한 지적이 나왔지만 무시됐다"며 "연구개발직 종사자 인권에 대한 문제제기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당시 발의된 법안에 따르면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과학기술자의 전직을 제한하고, 국내 기업이 첨단산업기술을 해외에 매각하거나 이전하려면 정부(산자부장관)의 승인절차를 거치도록 돼 있다.

당시 한국과학기술인연합 등은 "과학기술자의 전직을 제한하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직업선택의 자유'를 훼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법의 입법 취지는 모든 과학기술자를 잠재적 산업스파이로 규정하는 것과 다름없어 인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리고 이런 반발이 이번 와이브로 사건을 계기로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뉴스 포탈 사이트에 게재된 '와이브로' 사건을 다룬 기사 아래에 달린 댓글은 기술을 유출한 연구원들을 비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기술을 유출한 연구원들을 이해할만한다"는 내용도 만만치 않다. 신기술을 개발한 연구원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통해 기술 유출을 막으려 하기보다 처벌과 규제를 통해 기술을 보호하려는 정부와 기업에 대한 반발 심리가 드러난 셈이다.

"연구원을 소모품 취급하는 한, 기술 유출 못 막아"

게다가 검찰과 국정원의 주장대로 기술 유출 '혐의'만으로 감청이 허용될 경우, 상당수의 직장인들이 감청 대상이 될 수 있다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IT벤처 기업의 경우 사무 관리직 직원은 소수에 불과하며, 거의 전 직원이 연구개발직, 기술직, 기술영업직으로 구성돼 있는 게 보통이다. 통비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혐의'만으로 이들의 대화를 감청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또 대기업 연구소에서는 이미 메신저 차단, 이메일 검열 등 자체적인 보안 규정이 엄격히 유지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통비법 개정안까지 통과되면 직원에 대한 사생활 침해 수위가 과도해진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앞서 박 팀장이 연구개발직 종사자의 인권 문제를 지적한 배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날 기사를 접한 연구개발직 종사자들이 직접 토로한 반발은 한층 더 적나라했다. 한 삼성전자 연구원은 "이번 기술유출 사건을 보도한 매체 대부분이 신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원에 대한 감시를 강화해야 한다는 논조를 취했다. 연구원을 '예비 도둑' 취급하는 발상이다"며 격한 분노를 드러냈다.

이 연구원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과학자가 꿈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후배들이 고시나 의대 편입 등으로 대거 이탈할 때도 이런 꿈을 쫒아 연구실을 지켰다. 연구가 천직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런데 이제는 나도 연구소를 떠나고 싶다"는 말을 거듭했다. "기술을 보호하겠다"는 취지의 대책이 오히려 연구원의 기술 개발 의지를 꺽어버린 셈이다.

또 다른 연구원은 "황우석 사태 당시, 박봉에 혹사당하는 연구원의 이야기를 미화하여 보도한 기사를 보고 분통이 터졌다"며 "과학기술자를 '국익'을 위해 무조건 희생하는 존재가 아닌 지식노동의 대가로 생계를 꾸리는 시민으로 대하는 시각이 절실하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연구원을 '인격이 없는 소모품' 취급하는 언론과 정부, 경영진의 태도가 지속되는 한, 첨단기술 유출은 막기 힘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이들의 목소리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가장 확실한 기술 유출 방지책은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태도에서 출발한 대책"이라는 주장이다.

기술 유출의 방지책은 '직무발명에 대한 보상 강화'

최근 첨단 기술의 해외 유출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한국 경제의 지속 가능한 성장의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연구개발직 종사자의 인권을 존중하면서, 기술의 해외 유출을 막을 방법은 없을까.

과거 일본에서도 비슷한 논란이 벌어졌다. 당시 일본 사회가 끌어낸 해법이 '직무발명에 대한 보상 강화'다. 그리고 이런 해법은 한국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법률 체계 및 기업 문화 등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연구원에 대한 낮은 보상, 문화적 차이? 제도적 차이!

신기술이 나라 밖으로 유출되는 방식은 다양하다. 그러나 그 이유는 대체로 비슷하다. 연구개발직 종사자에 대한 외국 기업의 보상 수준이 국내 기업보다 현저히 높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일본 기업의 경우, 한 분야에서 뛰어난 성취를 거두는 전문가형 인재보다 조직을 폭넓게 장악할 수 있는 관리자형 인재를 높이 평가하는 문화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차이가 생겼다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이런 문화적 측면보다 발명에 대한 보상 제도의 차이에 주목해야한다는 설명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

일본인 나카무라 슈지 씨는 니치아화학 연구원으로 재직하던 지난 1993년, 청색 발광다이오드(LED)를 개발해 '일본의 에디슨'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리고 이 발명을 계기로 무명의 중소기업이었던 니치아화학은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회사에 이렇게 큰 기여를 한 슈지 씨에게 돌아온 보상은 보상금 2만 엔(약 16만 원)과 과장 승진의 혜택뿐.

이런 보상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던 슈지 씨에게 2000년 초 미국 샌타바버라 대학이 거액의 연봉과 함께 교수 직을 제안했다. 슈지 씨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당시 그가 일본을 떠나며 한 말이 일본 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다. 슈지 씨가 남긴 말은 "나는 일본을 사랑했지만, 일본의 시스템에는 실망했다"라는 것. 당시 일본 언론은 슈지 씨의 말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직무발명에 대한 보상 강화' 문제를 공론화했다.

미국에서는 정부나 기업에 고용된 사람이 한 발명으로 큰 수익을 냈을 경우, 수익 중 일정 비율을 발명가에게 돌리는 제도가 발달했다. 반면 일본에서는 피고용자의 발명은 그가 속한 조직의 몫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일본의 교류가 활발해지면, 슈지 씨처럼 일본을 떠나는 유능한 발명가가 늘어갈 것이라는 게 당시 일본 언론의 지적이었다.

일본 법원 "연구원의 발명으로 얻은 수익 가운데 일부는 해당 연구원의 몫"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슈지 씨가 미국으로 떠난 2000년 말, 니치아화학은 슈지 씨가 회사 기밀을 유출했다며 소송을 걸었다.

이런 소식을 접한 슈지 씨는 격분했다. 그래서 이듬해 슈지 씨는 회사 측이 자신이 개발한 제품의 특허를 독점 사용해 부당 이익을 얻었다며 200억 엔(약 2000억 원)의 대가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200억 엔은 소송 최대 한계 금액이다.

그리고 2004년 1월, 일본법원은 1심에서 파격적인 판결을 내렸다. 회사 측이 소송액 전액, 즉 200억 엔을 슈지 씨에게 지급하라는 것. 당시 판결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 등 주변 국가에도 큰 충격을 낳았다.

이어 2005년 고등법원은 회사 측의 지급액을 약 6억 엔(약 57억 원)으로 줄였다. 하지만 이런 소송을 계기로 "피고용자의 직무 상 발명으로 회사가 이익을 얻었을 경우, 일정한 비율을 보상해야 한다"는 판례는 일본 사회에 자리 잡았다. 그 이후 일본 법원은 이와 유사한 판결을 연이어 내렸다. 지난해 10월에는 해외 특허를 통해 기업이 얻은 수익도 직무상 발명을 한 직원에게 보상해야 한다는 판결도 나왔다.

이런 판결의 배경에 있는 것은 직원의 직무상 발명에 대해 정당한 보상 없이 규제만으로 일관할 경우, 일본 경제의 성장을 가능케 했던 유능한 기술자들이 미국으로 흡수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다.

회사 측의 양보 필요한 '직무 발명 보상', 한국에 뿌리내릴 수 있을까

한편 직무상 발명에 대한 일본 사회의 태도 변화는 유사한 법 체계를 가진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 법원은 지난 2004년 동아제약 전직 연구원인 왕모 씨가 회사를 상대로 낸 직무발명 보상금 청구소송에서 1억7600여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일본 법원이 나카무라 슈지 씨에게 200억 엔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린 뒤, 나온 판례다.

왕 씨는 이 회사 제품개발연구팀 재직 당시, '먹는 무좀약' 제조 관련 기술을 개발하는 데 참여했다. 동아제약 측은 왕 씨가 개발한 기술을 지난 2000년 1월 한 다국적 제약사에 넘기는 대가로 지난 6월까지 92억여 원을 받았으나, 왕 씨에게는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았었다. 결국 왕 씨는 2004년 소송에서 승소하여 보상금을 받아냈다.

이처럼 직원의 직무상 발명에 대해 회사 측이 보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오자 정부는 지난해 9월 발명진흥법의 직무발명 관련 규정을 개정했다. 노사가 자율적으로 직무 상 발명에 대한 보상 체계를 도입하도록 권고하는 내용이 도입됐다.

그 이후 특허청은 기업들을 상대로 직무 발명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홍보를 진행해 왔다. 하지만 이런 홍보가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직무발명에 대한 보상'은 사용자 측의 양보가 전제돼야 하는데, 이는 정부의 권고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에서 늘고 있는 기술 유출 사건들이 직원의 직무 발명에 대한 기업과 사회의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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