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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 어이 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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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 어이 만수!" [별을 쏘다·21] '별 중의 별', 그 이름 이만수
이렇게 마구 이름을 불렀다가 혹 그 큰 손에 한방 맞지나 않을까 걱정이 들기도 된다. 그저 MBC <만원의 행복>이라는 오락프로그램에 잠깐 출연해 인천 와이번스를 홍보한다는 젊은 연예인을 격의 없이 격려하던 그 여유 있는 웃음, 넉넉한 사람됨을 기대할 따름이다.

솔직히 이만수 씨, 이만수 선생, 이만수 코치라고 부르기 어색하다.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2년 선배라고 해서 만나보지도 못한 그를 뜬금없이 '형님', '선배'라고 하는 것도 어설프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 우리에게 그는 이만수, 만수다.

싸가지 없고 되먹지 못해 그랬는지 모르지만 학교 다니던 그때도 우리끼리는 그냥 '형' 자 빼고 '만수'라고 막 불렀던 것 같다. 경북고와의 라이벌전이 벌어지는 야구장에서 몰래 들여온 소주를 나발로 까면서 아저씨들이 외쳐대는 소리도 "야 이놈, 만수야!"였다.

그가 멋지게 홈런 한방을 때려댈 때, 그가 홈으로 돌진하던 상대 선수를 몸으로 막아낼 때, 그가 관중석을 보며 씩 웃어줄 때 우리는 모두 만수와 함께 킬킬거리고 즐거워했다.

우리는 모두 만수와 함께 킬킬거리고 즐거워했다

그렇다. 만수는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푸근한 가슴이었다. 강고하게 우뚝 선 사내다운 장딴지였다. 헤 웃는 커다란 얼굴이었다. 주는 것 가릴 것 없이 잘 먹어대는 착한 아들이었고, 수다 떨기 좋아하는 귀여운 남자였으며, 있는 척 똥 폼 잡지 않는 촌놈 그 자체였다. 우리와 똑같이 가난하고 무식한 그런 놈이었다.

흔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식이었다. 하루 내내 뻘건 전등을 켜놓는 정육점 식당 아줌마의 새끼였고, 시커멓게 그슬린 건설 노가다 아저씨의 아들이었으며, 제3공단 공순이들의 씩씩한 동생이었다.

대구에 자식 유학 보내놓은 영덕 어부와 문경 광부들에게, 주산 꼽은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는 구남여상 누이들에게, 호호 늙은 앞산 용두골 할매 할배들에게 그는 또 누구였고 무엇이었을까?

공납금 달라고 떼쓰는 게 아침의 의례였던 그 지긋지긋한 70년 대 말, 팍팍하기 짝이 없던 유신말기의 목마르고 가난한 인∙민에게 만수는 드문 물건이었다. 괜히 민중의 흥을 불러일으키는 광대였고, 민중에게 숨통을 터주는 해학적 웃음의 코미디언, 만수는 그런 희한한 놈이었다.

고교 시절 그를 기억한다
▲ 대구상고 시절 제 3회 청룡기 우승 당시 선배 한명이 당시 주장이었던 이만수 선수를 등에 업고 즐거워하는 모습 ⓒ이만수 공식 홈페이지()

그와 내가 1년을 같이 다닌 대구상고는 이제 없다.

다중 실업의 시대에 실업계 학교도 덩달아 퇴출되고, 지금은 '상원'이라는 인문계 학교로 바뀌었다.

작년 옛 교정을 찾았을 때 고층 고급 아파트들에 뺑 둘러싸인 낡은 본관 뒤편에는 공부하던 교실도, 운동장도 없었다.

'1원이요, 37원이요…' 선생이 불러주는 대로 열심히 주산 알을 튕기고 있을 때, 그 때 야구장에서는 깡깡 공을 날려대는 상쾌한 소리가 들려왔었다.

중학교 밴드 때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젓가락으로 미친 듯 드럼 질 해대며 얘들과 꽥꽥 소리를 질러댈 때, 그때 그들은 나무에 매단 버스 타이어를 열심히 뻥뻥 두드려 대고 있었다.

진학반 한 친구가 맘에 들지 않는 선생을 번쩍 들어 교실바닥에 내다 꽂을 때, 옆 반에서는 칠성파 '짱'이 깨진 유리로 악악 자기 손목을 그어댈 때, 그때 그들은 '어이어이' 괴성을 외치며 운동장을 몇 바퀴 채 돌고 있었을까?

수업 땡땡이 치고 간 당구장에서 시비 붙은 사대부고 학생의 식칼에 맞아 동기 녀석이 어이없이 그 자리에서 절명할 때, 그들은 연습실 안에서 코치와 선배들로부터 어떤 단련을 받고 있었을까? 기억은 고스란히 남는다.

만수는 그렇게 나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었다. 모자에 잘난 흰 테를 박고 다니는 '경북고 짜식'들을 보면 언제든지 한판 붙을 듯 호기를 부리며 시부려대다가, 담벼락 붙은 옆 부고 여학생들의 본 척도 하지 않는 경멸의 시선에 잔뜩 주눅 든 채 십대의 후반을 보냈다. 절망하며, 도망치고 반항하며, 그래서 얻어터지면서 그렇게 그 구질구질한 시절을 보냈다.

내가 만수고, 만수가 우리다
▲ 1987년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스 소속으로 활약하던 이만수 선수 ⓒ연합뉴스

이 글을 쓰며 만수를 떠올리 때,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 만수 때문에 이 글을 생각했을 때 뚜렷한 이미지가 있다.

1학년 어느 노는 시간 친구들과 우르르 연습 구경나갔을 때, 야구선수들은 무슨 이윤지 모두 엎드려 야구 방망이로 마구 두드려 맞고 있었다. 만수는 달랐다.

수 십 방 맞고도 끄떡없이 툴툴 털고 일어나는 미련한 그에게서 받은 신선한 충격, 감동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뭘까? 결코 억압되지 않는 역능에 대한, 벤야민이 말하는 '무의지적 기억'? 악대부 시절 걸레밀대로 돌림방 맞으면서 무슨 오기 탓인지 악착같이 버틴 나만의 특별한 체험 탓인가?

아님 만수를 외쳐대는, 그 고난과 간난의 시대를 함께 산 프롤레타리아트 인∙민 다중 모두의 공통된 뭔가가 있는가?

딱 짚어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만수와 나의 일체감, 만수와 우리의 공감대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역사의 물질성이 짙게 배어있는 것 같다.

폭력이 난무하고 억압이 횡횡하는 지리멸렬한 시기에 우리는 그에게서 해학을 얻고 위안을 찾았으며, 잘난 것들의 지배를 악착같이 버텨낼 못난 놈들의 영웅기질을 발견했던 것 같다.

그 음모의 여유를 바탕으로 삶을 함께 공모하고 개척해 나갔으며, 말 그대로 몸으로 때우면서 시대의 암울을 버텨냈다.

내가 만수고, 만수가 우리다. 만수는 결코 잘나지 못하다. 머리도 그리 똑똑하지 않다. 차라리 미련하고 우둔하다. 그러나 정직하다. 또 그렇기 때문에 쉽게 어울려 한편이 되고, 본능적으로 못된 놈, 못된 짓을 구별해 낼 수 있다.

70년대 말의 보통사람들은 이렇듯 만수와 함께 유신의 야만적 지배를 비껴갔다. 그들에게 비판적 의식, 진보적 이념은 거리 멀다. 소박한 몸의 존재, 성실한 육체의 존재, 건강한 몸놀림의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잘난 이들과 달리 국가권력 앞에서는 괜히 주눅이 들지만, 여전히 해학적 무기로 주변의 '권력들'은 대충 제치고 조롱할 수 있었다.

전혀 낯설지 않은 우리의 익숙한 영웅, 유쾌한 헐크

일제 식민지 유산일지 모를 '노나 마니스' 어쩌고 하는 요상한 응원가를 꽥꽥 불러대며 떼를 지어 종합운동장 등지로 몰려다녔다. 기차를 타고 친구들과 첫 서울 상경에 나선 것도 동대문운동장에서 있은 청룡기대회 결승전 아니었던가 싶다.

졸업 후 그가 한양대로 진학했을 때, 나아가 대구라이온즈에 입단했을 때도 그를 열심히 쫒아 다녔다. 박지성의 유나이티드 멘체스터를 많은 이들이 열광하듯이, 그때는 내게 한양대와 삼성이 바로 '우리 편'이었다. 그가 무슨 연유인지 훌쩍 미국으로 떠나버렸을 때에도 나는 만수의 행적을 계속해 추적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화이트삭스의 기록에 유독 신경이 쓰였다.

그곳에서의 그의 성공에 고마움을 느낀 게 과연 나뿐이었을까? 박찬호의 성공담에서 느낀 감정과는 전혀 질감 다른 것이었다. 그는 더 이상 화려한 스타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흥미로운 영웅임에 틀림없다. 특권층의 보장된 경로 외부에서 스스로 길을 개척해야 하는 평범한 인∙민 다중의 친구다. 그래서 실감나게 느껴진다.

자족적으로, 주체적으로 삶을 경영하고 있는 사내로 다가온다. 몇 년의 세월이 지나 제법 나이 든 중년이 되어 인천으로 돌아왔을 때도 그는 전혀 낯설지 않은 우리의 익숙한 영웅, 유쾌한 헐크였다.
▲ 지난 5월 인천 문학야구장에서 열린 KIA 대 SK의 경기 클리닝 타임에 이만수 수석코치가 팬티 차림으로 팬들과 함께 그라운드를 돌았다. 그는 "문학구장에 만원관중이 들어차면 팬티만 입고, 문학 구장을 돌겠다"고 약속했었다. ⓒ연합뉴스

속옷 바람으로 인천구장을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 추태라 전혀 느껴지지 않은 연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대상화, 객관화시킬 수 없는 우리 일원. 그에게서 나 자신의 일편을 발견하니, 참 묘한 일이다.

솔직히 요즘 야구를 거의 보지 않는다. 프로야구가 시시해진지 오래고, 고교야구는 채널 4개뿐인 내 텔레비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에 동대문운동장을 들락거린다. 야구보다는 그 근처의 사람이 좋고 물건이 좋아서다. 낡은 고물을 찾고, 깊은 멜랑꼴리를 느낀다. 악착같이 과거의 흔적을 복구시키고자 하며, 현재의 얼굴을 담아보고자 한다.

그러면서 역사와 빈곤, 모순과 비대칭을 지울 주변의 판타스마고리아 구축과정을 아니꼽게 지켜본다. 쇄락의 길로 접어든 야구장은 이제 곧 철거될 운명이다.

"만수야!" 부르던 우리의 목소리도, 그 정서와 유대의 따스한 감각들도 따라서 사라지는 것인가? 모든 딱딱한 것들은 대기 속으로 녹아든다는 데, 만수의 기억조차 이제 흩어지기 멀지 않았는가?

이만수는 지금 살아 활약 중이다. 그가 이제 무슨 꿈을 꾸고, 앞으로 또 어떤 별이 될지 모르겠다. 이 땅에서도 최고의 야구 지도자가 될지 흥미롭게 지켜볼 일이다. 아니면 또 때려치우고 남들이 해보지 않은 전혀 새로운 사업을 꾀할 것인가?

지금까지의 만수에 비춰볼 때, 앞으로의 행적도 궁금증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만수 이야기는 그래서 과거 완료형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다. 스포츠뉴스뿐만 아니라 연예오락의 충분한 소재감이다.

신자유주의의 시대, 비정규직과 실업의 시대, 계급양극화의 시대에 우리의 영웅께서는 과연 우리를 어떻게 즐겁게 해줄 것인가? 내게 또 어떤 산뜻한 기억의 행복을 주실 것인가?

휴가로 내려온 한 여름의 대구에서 모처럼 동기 몇 녀석을 만났다. 그들은 장효조와 김시진, 이만수 위아래의 족보를 줄줄 꾀고 있다.

포수석에서는 이만수가 얼마나 재미난 농을 던지는지, 그러면서도 후배들에게는 붕붕 돌아가는 방망이 소리로 모범을 보여주면서 얼마나 엄격했는지, 이야기가 그치지 않는다.

이런 많은 전설을 남긴 그는 분명 별을 쐈다. 뭇별과 뒤섞인 말 그대로의 '별 중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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