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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라싸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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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그날 라싸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화제의 책] <티베트, 말하지 못한 진실>
지난 3월 티베트 사태 이후, 베이징 올림픽과 맞물려 한 동안 티베트는 국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티베트 문제는 곧 언론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과연 우리는 티베트의 진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아니, 티베트의 진실을 제대로 알고자 한 번이라도 진지한 접근을 한 적이 있는가? 최근 국내에 소개된 <티베트, 말하지 못한 진실>(홍성녕 옮김, 알마 펴냄)은 바로 이런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의 태도에 경종을 울리고자 나온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미 1990년에 나온 책이다.

신재식 호남신학대 교수는 <티베트, 말하지 못한 진실>이 시각 때문에, 시간 때문에 보지 못했던 티베트의 또 다른 진실을 말한다. 그는 티베트 사태가 있었던 바로 그날 라싸에 있었다. 그는 그날 라싸에서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끔찍한 현실"을 직접 목격하고, 또 그 현실이 언론을 통해서 선정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을 보았다.

신재식 교수는 다시 묻는다. 우리는 과연 티베트의 진실을 제대로 알고 싶긴 하냐고. <편집자>


중화주의의 제물, 티베트

손에 잡힌 책이 또 티베트에 관한 것이다. 아쉬움이 무척 컸나보다. 꼭 다섯 달 전, 3월 15일, 그날 나는 라싸에 있었다. 티베트 소요가 있던 날. 그날 이후 티베트는 외국인에게 빗장이 걸렸다. 단체 여행마저 막았으니,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배낭 여행객이야 말할 것도 없다. 여행 금지가 아니었으면, 카일라스 순례를 포함해서 서티베트의 이곳저곳을 돌았을 것이다.

그런데 티베트 책으로 눈길이 간 것은 이런 아쉬움의 무의식적인 발로만은 아니었다. 그 책을 손에 든 날은 광복절이었다. 티베트를 처음 갈 때, 충칭(重慶)에 들러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했던 기억이 새롭다. 임시정부와 광복절 대신 건국절이 설레발치고, 정부의 언론 통제가 문제되고, 베이징 올림픽이 '중화(中華)주의' 선전장이 되는 와중에, 티베트로 다시 눈길이 간 것이다. 티베트는 광복, 중화주의, 탄압, 언론 통제가 함께 만나는 교차점이다.

티베트는 나에게 원(原)과 한(寒)의 땅이다. '설역고원(雪域高原)' 티베트는 사방 지평선이 보이는 넓은 고원과 눈으로 가득한 동토다. 겨울은 물론이거니와 여름도 만만찮게 추웠던 땅이다. 중화주의자에게 티베트는 원(願)과 한(漢)의 땅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족(漢族)의 땅으로 만들기를 염원하는 그런 탐욕의 대상일 뿐이다. 티베트 사람에게 티베트는 원(怨)과 한(恨)의 땅이다. 잃어버린 주권과 빼앗긴 땅, 말살되어가는 문화와 역사를 지켜보는 이들에게, 자신들의 땅은 슬픔과 원통 그 자체다.
▲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 궁 앞에 있는 오성홍기. 중국의 티베트 지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신재식

나에게 티베트는 원(圓)과 환(環)의 땅이다. 티베트에서는 모든 것이 둥글다. 삶은 윤회라는 고리를 따라 돌고 돈다. 코라(마니차를 돌리면서 시계 방향으로 사원을 도는 순례 의식) 길도 둥글다. 조캉 사원의 바코르, 간덴 사원의 코라의 길, 카일라스 산의 순례의 길도 둥글다. 사람들은 탑을, 사원을, 궁을, 산을 그렇게 둥글게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한 만다라의 핵심도 둥그런 원이다. 티베트에서는 이렇게 마음도 둥글어지고, 몸도 둥그런 길을 걸어간다.
▲ 칭짱 철도. ⓒwdtour.com

그런 둥근 티베트를 일도양단(一刀兩斷)하는 선(線)이 생겼다. 둥근 땅을 가르는 철(鐵)로 만든 긴 칼, 칭짱 철도가 그것이다. 티베트의 심장을 향한 쭉 뻗은 철검은 티베트에 생채기가 아니라 치명적인 상흔을 남긴다. 중화주의자에게 이 긴 철도는 쇠로 만든 용(龍)이다. 중화주의는 이 철룡(鐵龍)을 타고 승천하려고 한다. 이들에게 티베트는 자신들의 비상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중화주의를 위한 제물이 된 현실, 이것이 오늘의 티베트이다.

읽기 힘든 책, <티베트, 말하지 못한 진실>

이번에 손에 잡은 책, <티베트, 말하지 못한 진실(Tibet, The Facts)>은 좀 색다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올해 봄·여름 사이에 티베트 관련 책을 다수 접했다. 대부분이 티베트 역사나 문화를 소개한 것이거나, 개인 감상이 담긴 여행기에 가까운 책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부류가 아니다. '중국 고발서'다, 이 책은. 중국이 티베트를 강점하는 과정에서, 또 그 이후에 저지른 만행을 알리고 있다.

잠시 책 이야기를 짚어보자. 누가 썼는가? 폴 인그램이다. '과학적 불자협회'(Scientific Buddhist Association, 현재는 OPTIMUS, 영국 소재 비영리단체)라는 단체 소속이다. 그는 1984년에 이 단체가 행한 조사를 바탕으로 썼다. 이들은 현재 4판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한글 번역본은 1990년에 개정된 3판이다.

이 책은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부분은 중국이 티베트에 가한 야만적 폭력을 다루고 있다. 1부는 1950년대부터 이어진 티베트 강점 과정에서 티베트의 문화와 역사가 얼마나 파괴되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중국 강점에 대항한 티베트의 오랜 투쟁과 함께. 1부가 탄압 총론이라면, 2부는 각론이다. 지금(1980년대 후반까지) 티베트에서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는 인종적, 경제적 차별과 동시에 환경 파괴 등을 항목별로 고발한다. 3부에서는 국제연합, 미국, 영국, 인도 등이 보여준 티베트 정책을 다루고 있다. 4부는 주로 인도와 중국과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인도의 티베트에 대한 잘못된 정책을 비판한다. 5부에서는 중국이라는 붉은 용의 신화 형성과 그 환상 깨기를 다루고 있다.

책의 의도는 분명하다. 사실을 보여주고 문제를 삼는다. 즉 '고발'과 '이슈화'다.

오늘 티베트의 문제는, 티베트의 실제 상황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의 언론 통제 때문이다. 관제 언론의 일방적인 선전이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또한 일부 서구인들과, 영국과 인도의 잘못된 그래서 실패한 대중국 대(對)티베트 외교 정책은 오히려 중화주의 신화를 형성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 <티베트 말하지 못한 진실>(홍성녕 옮김, 알마 펴냄) ⓒ프레시안

실제로 책의 내용은 대부분 티베트의 억압 상황을 고발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민족, 역사, 문화, 경제, 환경까지 전방위적으로 수탈당하는 티베트의 현실을 기술하고 있다. 인종 차별로 인한 민족 말살의 위기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나,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 사람들이 당한 것에 비교 될 정도라고. 경제적으로는 스페인이 남미에 행했던 것 이상으로, 중국이 티베트가 수탈하고 있다고. 이로 인해 생태 환경마저도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당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렇게 이 책은 티베트의 총체적 위기와, 이를 불러온 중국을 고발한다.

언론 통제가 있는 곳은 늘 그렇듯이, 티베트는 '소문'과 '유언비어'가 흘러다닌다. 감추어진 과거의 사실들을 햇볕 아래 드러내는, 자료 수집에 들인 수고는 무지 크다. 이 책의 일차적인 가치는 여기에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티베트 관련된 많은 서적들 가운데 독특한 위상을 지닌다.

'고발'로 가득한 책은 사실 '이슈화'를 목적으로 한다. '인권'과 '환경' 문제까지 포함해서 티베트를 국제 사회의 화두로 삼고자 한다. 적어도 국제 사회가 최우선적으로 관심 갖고 다루어야 할 시급한 문제로.

이 책은 중립적이지 않다. 비록 책의 이곳저곳에서 이 책은 티베트나 중국의 편을 들지 않는다고, '객관적'으로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제시한다고 선언하지만. '당파성'은 '객관적' '중립적'이란 말과 어울리지 않는다. 억지로 감추고자 한 치부를 들추는 것, 그 자체는 이미 분명한 편들기다.

이 책은 이런 '이슈화'를 위한 '선전전(宣傳戰)'을 시도하고 있다. 중국의 티베트 왜곡에 대한 국지적 '선전전(宣傳戰)'을 수행하고 있다. 책의 행간에서는 기자의 냉철함보다는 투사의 격정이 자주 흘러나온다. 이 책은 격문(檄文)이다.

그런데 읽는데 많이 힘들었다. 550쪽이 넘는 두툼한 책 분량, 일일이 확인해 가면서 읽은 400개가 넘는 각주, 다소 매끄럽지 못한 문장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내용이 티베트에 다소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알고 있는 내용이다. '소문'으로 들었던 고난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내용이 난해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읽기 힘들었던 것은, 왜일까?

책 자체가 의식의 수면 아래 있는 뭔가를 건드린 것 같다. 아마 '아쉬움'과 '괴리감' 때문인 듯하다. 이 책이 중국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는데,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그 부족한 무엇이, 자칫 티베트 현실을 오도하거나 책의 사실적 가치를 훼손할 수도 때문이다.

아, 그렇다고 예단하지 말라. 이 책의 내용이 틀렸다거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나 자신이 기본적으로 티베트에 우호적이라고 생각한다. 당위와 감성 모두에서. 티베트의 독립을 원한다. 그것의 현실적 가능성의 여부를 떠나서, 이들의 독립은 너무도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를 기반으로 하는 티베트의 역사와 문화와 삶은 종교의 본질과 초심을 되돌아보게 끊임없는 자극이다.

기록과 현실의 간극

뭐가 아쉽고, 뭐에서 괴리감을 느끼는가? 많이 늦었다는 아쉬움과, 내용이 주는 괴리감이다. 번역판은 3판을 번역했는데, 거의 20년의 차이가 있다. 자료 수집의 수고와 번역자와 출판사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20년의 변화는 쉽게 이을 수 없는 간극이다. 무려 20년의 단절. 미처 책을 읽으면서 계속 나를 묶어 두었던 것은 바로 내가 경험한 '최근'의 라싸 경험과 기록 사이의 단절이었다. 기록된 현실과 오늘의 현실이 주는 거리감은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도 크다.

중국이 너무 빨리 변화하고, 티베트 정책이 너무 많이 바뀌었다. 20년 전의 기록으로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중국의 티베트 정책은 갈수록 더 정교화 되고 체계화되고 있다. '문화혁명'기의 무대포식의 강압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의 '문화정치' 같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티베트가 너무 빨리 한화(漢化) 되어가기에.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과거의 자료는 때로 그 과거와 현실의 격차로 인해 그 과거 기록의 가치마저 훼손되는 경우가 자주 있으니까. 빨리 최근 개정판이 나와야 하는데.

이런 괴리감은 과거에 대한 해석에서도 발견된다. 티베트에 대한 중국 정책의 실패에 대한 비판이 종종 나온다. 중국 점령 전의 티베트 상황과, 중국의 무능력한 경제 정책으로 인해 티베트의 상황이 오히려 악화되었다는 것 등이 그렇다. 티베트 정책에 대한 중국 정부의 역량을 거론한 것은 거의 '해석'에 가깝다. 격정보다는 좀 더 객관적이고 체계적으로 접근에 대한 아쉬움. 이것이 저자와 나의 거리이고 괴리감이다.

책의 행간에는 딜레마가 느껴진다. 1992년에 달라이 라마가 보인 미래 티베트 정책에 관해서 특히 그렇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완전 독립이 아닌 고도 수준의 자치권을 요구했다. 외교권은 중국에 넘기고, 나머지는 티베트의 자율적인 권한 행사로.

이에 대해 티베트 사람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리는 모양이다. 젊은 층을 비롯한 일부는 여전히 티베트의 완전 독립을 주장하고 있다. 이로 인해 달라이 라마의 지도력이 상당히 손실을 입었다는 '소문'도 들었다. 책에서 필자(와 그 소속 단체)는 티베트의 완전 독립을 지지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렇지만 달라이 라마의 말이기에,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는 딜레마에 처한 듯하다. 완전 독립이라는 당위와 제대로 된 자치권마저도 어렵다는 현실 사이에서 고민, 이것이 티베트의 고민이다.
▲ 달라이 라마. ⓒ프레시안

달라이 라마는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것 같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티베트는 칭짱철도 개통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티베트의 완전 독립은 철도의 개통으로 물 건너갔다는 것이 중론이다. 유사시 철도를 통한 손쉬운 군사력 이동 때문이 아니다. 철도를 통해 엄청난 속도로 티베트의 중국화, 한족화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티베트 방문은 칭짱 철도 개통 1주일 후였다. 당시에도 라싸의 상권은, 심지어 바코르 상권마저도 거의 한족들에게 넘어가 있었다. 1년 후 두 번째 방문 했을 때 이 경향은 더했다. 전에 들렸던 티베트인이 운영하던 탕카 가게는 더 쪼그라들었다. 6개월 후 올 2월 말에 라싸에 도착했을 때, 그 가게는 한족에게 넘어갔다.

"나는 티베트 사람이다. 티베트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던 그 친구의 말이 귀에 생생하다. 거짓을 말하지 않는 장사치는 생존할 수 없는 곳, 거대 자본과 경쟁할 수 없는 곳이 오늘 티베트의 심장, 조캉 사원의 바코르 현실이다.

그날 라싸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책을 읽는 내내 지난 3월의 티베트 시위를 반추했다. 이 경험은 나에게 '인간 본성'과 '언론 본성'을 다시 새겨볼 기회였다. 라싸 시위가 나던 때, 나는 2주째 머무르고 있었다.

라싸는 그 며칠 전부터 분위가 조금씩 술렁거렸다. 달라이 라마 망명 기념일이 가까워 오고, 인도와 네팔에서 때를 맞춘 시위로 인해서 긴장이 높아졌다. 몇 군데 사원에서 2~3일 전부터 승려들의 시위가 있었고, 군인과 대치중이었다. 사원을 방문한 관광객마저 심하게 검문을 받았고, 승려가 몇 명이 다쳤느니, 죽었느니 하는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가 돌았다.

3월 15일 점심 무렵부터 본격화된 그 날의 시위는 이상했다. 시위대가 삽시간에 폭도화했다. 한족과 이슬람교도들이 운영하는 가게는 약탈과 방화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곤 한족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에 대한 집단 폭력이 시작되었다. 이방인이 더 이상 현장에 머무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머무르던 숙소에는 폭력으로부터 피신한 주변 상가의 한족들로 가득했다.
▲ 2008년 3월 15일, 주도 10대가 주도한 폭력 시위의 현장에 중국 경찰, 군인은 없었다. 피해자는 주로 중국인과 이슬람교도였다. ⓒ신재식

폭력화된 시위의 절정에 중국 경찰이나 군인은 없었다. 시위 초기에 사라진 경찰들은 난장판 후에 나타났다. 시가지가 화염으로 휩싸이고, 3시간 이상 걸린 방화와 폭력이 어느 정도 잦아들고서야. 경찰의 등장으로 시위대는 흩어졌다. 군인들이 나타난 것은 거의 저녁때였다. 그날 낮 라싸 시내에서 시위대와 군경의 공식 충돌은 없었다.

시위대가 일을 다 벌인 다음에야 군경이 투입되었다.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번 사건의 피해자는 겉으로 보기에, 중국인들과 이슬람교도들이다. 이건 사실이다. 이들에게 티베트 사람들의 방화와 약탈과 구타가 이어졌으니까. 문제는 관공서나 방송국이나 공공 기관이 아니라, 한족과 이슬람교도들의 가게와 슈퍼마켓, 은행이 대상이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히 갈렸다.

이 결과 실제적인 역사적 피해자가, 한순간에 현실적인 가해자가 되어버림으로서, 이들이 원하는 티베트의 자유라는 문제가 희석되어 버린 것이다. 아무튼지 중국 정부로서는 시위대를 진압할 충분한, 너무도 충분한 명분을 갖게 되었다. 이 3~4시간의 사건 전개로 인해, 티베트 사람들을 독립 투쟁이 아닌 단순 방화 폭도로 몰아 갈 수 있게 되었다.

티베트 사람들 제대로 낚인 것 같다. 시위가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폭력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는 누군가가 시위를 방조했다면. 중국 경찰의 능력이면 충분히 초기에 진압할 수 있었는데. 또한 시위에서 폭동으로 옮겨가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냥 순식간에 방화와 약탈과 구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를 배후로 거명할 정도의 조직화된 시위가 결코 아니다.

그날의 사건은 우리가 얼마나 쉽사리 폭력화 될 수 있는지를 시위대가 폭도로 변하는 순간이 얼마나 빠른지. 게다가 조직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가 얼마나 쉽게 감성대로 움직이는 지를.

그날의 주인공은 10대였다. 시위 현장에서 폭력을 행사한 대부분이 이들이다. 이들에게 티베트 독립이라는 슬로건은 중요한 것이 아닌가 보다. 이들에게서 시위가 주장하는 구호를 볼 수 없었다. 오직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동반하고 집단적인 폭력을 가하는 모습만 보여주었다. 나이나 성별을 불문하고 공격의 대상이었다. 인간이 가진 야만성과 폭력성은 계기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평화라는 종교적 가르침마저 순식간에 무력화시킨다. 그것은 선악의 이분법을 뛰어 넘는다.
▲ 라싸 시내에 전차가 등장한 것은 3월 15일 난장판 다음날인 3월 16일이다. 3월 라싸에서는 순식간에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끔찍한 현실이 있었다. ⓒ신재식

사람의 본성을 다시 본 것도 그렇지만, 언론의 본성도 또 다시 보았다. 그날 이후 함께 한 현지 친구에게 한국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언론의 속성이나 하는 짓거리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선정적이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을 만들어 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질문이 이렇다. 티베트 사람들 많이 죽었지요? 이미 죽은 사람들 숫자까지 정해놓고 있다. 기대하지 않는 대답에는, 침묵으로 반응한다. 정확하지 않는 사실을 가지고 가공해내는, 그 사건을 통해 자신들의 뜻을 발언을 하고자 하는 언론과 권력의 속성은 분명히 이번 사건의 보도에도 있다.

사건을 예단하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추고, 가공해서 상업화시킨 언론들. 남들이 흘린 피가 지면의 한 꼭지를 채우는 소모품이 되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서구 언론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티베트는 국제 정치 역학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견제구일 뿐이다. 필요하면 가끔 등장하는 양념처럼.

어느 국가나 언론이나 정말 티베트의 자유를 원하거든, 티베트를 이런 식으로 분칠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중국 정부를 향해 제대로 말해라. 뒷담화나 까지 말고.

글을 쓰는 도중, 정정보도가 나온다. 어제 달라이 라마가 140명의 티베트인이 죽었다는 말을 했다더니, 오늘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단다. 이렇다. 설과 소문, 사실과 진실이 난무하는 곳. 티베트는 그런 곳이다.

사람이 많이 죽어야만 티베트가 문제가 되고, 사람이 죽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가? 한 명도 다친 사람이 없을지라도 여전히 티베트는 문제다. 아무도 시위를 하지 않더라도 티베트는 여전히 문제다. 올림픽과 무관하게 티베트는 문제다. 올림픽마저 '중화주의 만세'로 끝났으니 더 문제다.

내년은 달라이 라마 인도 망명 50주년이 되는 해다. 또 얼마나 많은 소문과 사실, 왜곡과 진실이 매스컴을 탈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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