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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연합, 살고 싶으면 회원에게 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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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연합, 살고 싶으면 회원에게 물어라" [길에서 책읽기] <동네 에너지가 희망이다>
때때로 적과 싸우는 투쟁의 힘보다 자신을 성찰하는 용기와 힘이 무엇보다도 더 필요할 때가 있다. 오늘날 시민운동이 그렇다.

전면 쇄신을 선언한 환경운동연합 사태는 비단 환경연합에 국한되는 얘기만은 아니다.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니, 언론용 일회용 행사식 운동 방식이니, 프로젝트화된 운동이니 그동안 숱하게 지적되어 오던 내용을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 급기야는 최저생계비도 못 받고 헌신하던 수많은 시민운동가의 도덕성마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사실 공금 횡령 사건이란 개인의 도덕성 탓으로 돌려도 될 그런 일이다. 아무리 조직이 내부 감사 시스템을 완벽하게 마련한다 해도 부정을 저지르고 공금을 횡령하는 개개인은 늘 튀어 나오기 마련이다. 일제 강점기 그 엄혹한 시기에도 독립운동 자금을 둘러싸고 크고 작은 추문이 끊이지 않았다.

이승만은 하와이 조선 노동자들이 그야말로 뼈를 깎고 피땀 흘려 한두 푼씩 내놓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아무런 하는 일도 없이 외교관의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며 호화 생활을 누렸다. 하긴 이승만은 이미 1925년에 조선은 독립 국가를 운영할 능력이 없으므로 50여 년 동안 미국의 위임 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미국에 청원한 사건으로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탄핵당한 경력의 소유자였으니…. 그의 외교란 미국 정부와 의회에 가끔 이런 청원이나 하고 시시때때로 부정과 공금횡령 시비를 일으킨 것이 전부였다.

새로운 투명한 회계 제도를 도입한다거나, 감사를 철저히 한다고 선언하거나, 활동가들의 도덕성을 높일 수 있는 내부 품성 교육을 강화한다거나 하는 것도 물론 필요한 해결책이다. 그러나 거기에 그친다면 이는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전혀 진단하지 못한 돌팔이 의사의 처방전일 뿐이다. 창자가 끊어질 듯 아픈 암 환자의 배에다 빨간약을 발라준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 한국의 시민운동이 잃어버린 것은 대중운동이다. 대중조직으로서 숱한 시민단체들이 잃어버린 것은 다름 아닌 그 같은 대중운동 정신과 대중투쟁, 그리고 조직의 주인인 대중이다.

1987년 6월 항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태어난 한국의 시민운동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를 거쳐 지금까지 수많은 업적을 이루어냈다. 그 가운데서 핵심 업적은 한국에 비로소 '시민사회'를 일궜다는 사실이다.

6월 항쟁 이전 한국사회에는 시민사회가 없었다. 군사독재 정권은 시민사회의 형성을 용인하지 않았다. 북한이 사회를 국가가 흡수해서 전체주의 체제로서 국가가 곧바로 개인을 지배하고 통제하기 시작했던 것처럼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의 경찰독재 정권과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또한 철저한 반공 정신병동 안에 개인을 가두어놓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시민사회의 형성 그 자체를 금기시했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은 이런 감옥 안에서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싸운, 감옥 부수기 운동이었다. 당연히 이 당시의 민주화 운동은 감옥을 부수기 위한 가장 유효한 망치가 무엇인지에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노동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 재야운동을 비롯한 대부분의 대중운동 투쟁 조직체도 일사불란한 전투 조직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부지불식간에 준군사조직의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시민사회와는 다른 소수의 투쟁 결사체였다.

그런데 6월 항쟁 이후 군사독재 정권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나면서 민주화의 공간이 전혀 새롭게 열리게 시작했다. 그리고 비로소 이때부터 시민운동이 그 넓은 민주주의의 광장에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시민운동은 자연스럽게 이른바 전문성을 내세우면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 특히 교수들이 대거 전문가로서 참여하는 구조가 생겨났다. 실제로 전문성은 그동안 국가가 독점하고 있었던 영역이었기에 전문성을 내세워 국가 정책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또 대안을 제시하는 시민운동의 설득력은 그만큼 여론과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문가란 심하게 말하면 대중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용어를 써서 대중이 외면하게 만든 다음 밥벌어먹고 사는 사기꾼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더구나 대학이 학문 연구 조직이 아니라 취업 예비 학원으로 전락한 오늘날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군사독재 시절에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거나 동조했던 전문가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1980년대 말부터 이른바 전문가로서 시민운동에 이름 걸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대학 교수들이 자칭 시민운동가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미국에서 목회 관련 박사 학위를 받고 엉뚱하게 운하 전문가라고 자칭하는 '사이비 전문가'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시민운동이 어느 틈에 전문가 운동으로 변질되면서 시민운동이 대중운동 본령에서도 이탈하는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었다. 흔히 범하게 되는 잘못이 새만금 간척 사업처럼 대중 투쟁으로 풀어야 하는 문제를 법정으로 갖고 가는 경우이다. 연구 명목으로 이른바 '프로젝트'가 생기게 되고, 시민사회 활동가도 대중운동의 조직과 투쟁보다 전문성을 강조하면서 시민운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마치 대학의 교수나 연구자들이 되어야 마땅한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도 생겨났다.

물론 전문성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대중운동이란 어설픈 소문과 선동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엄밀하고도 치밀한 조사와 연구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대중운동의 전문성이란 이른바 전문가들의 전문성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로서 대중과 함께 하는 대중투쟁의 전문성이다. 이른바 전문가들이 현장의 대중투쟁과 대중운동을 조직해 나가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리고 사실 학위가 없어서 그렇지 현장 활동가들의 전문성을 이른바 대학의 전문 연구자들이 따라오기가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제 그런 왜곡된 전문가주의를 탈피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대중운동으로서 시민운동이 새로운 방식과 철학, 정책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자칫 본말이 전도된 엉뚱한 대안은 시민운동을 돌이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뜨릴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환경운동연합의 특별 쇄신 대책은 전문가에게 물어볼 것이 아니라 아무리 시간이 걸리고 중구난방이라 하더라도 우선 회원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지금의 환경운동연합은, 그리고 대부분의 시민단체들은 회원들이 밑에서부터 의견을 반영시킬 수 있는 대의구조가 제대로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 회원들로부터 회비를 받는 대중조직, 대중투쟁의 단체로서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민주주의 조직이라면 어떤 조직이든지 집행기구, 대의기구, 감사기구로 3권이 분립되어 있어야 마땅하다. 이것이 지금 문제의 핵심이다.

무식하고 전문성이 없는 것 같지만, 회원들이야말로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보고 있는 주춧돌이다. 대중은 때로는 매우 우매하고 중우정치의 피동성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특히 위기 시에는 어느 지성보다 뛰어난 능동의 혜안과 상식을 갖고 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민주화 운동은 군사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싸웠다. 그리고 실제로 무너뜨렸다.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시민운동은 과연 제대로 시민사회를 만들어냈는지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지금 막연한 시민사회가 아니라 공동체를 재기획해서 새롭게 형성해내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허구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대안의 경제, 대안의 사회체제 또한 이 같은 공동체의 재구성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민운동의 목적은 결국 새로운 시민사회,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이다. 그러기 위해 먼저 시민운동 단체들의 구성 자체부터 회원들의 공동체로 탈바꿈되어야 한다. 촛불이 지시하고 있는 바는 바로 이런 공동체의 형성이다.

▲ <동네 에너지가 희망이다>(이유진 지음, 이매진 펴냄). ⓒ프레시안
이유진이 <동네 에너지가 희망이다>(이매진 펴냄)에서 보여준 에너지 공동체 모색, 동네 에너지 운동은 이런 새로운 시민운동의 한 시도를 보여준다. 그동안 에너지 전환 운동은 전문가주의에 경도된 측면이 없지 않아 많았다. 에너지 관련 용어부터 '발전 차액 지원 제도'니 'RPS(의무 할당 제도)'니 뭐니 영어와 약자투성이로 일반 시민들이 이해하기에는 온통 어려운 전문 용어뿐이다. 이명박 정부의 말도 안 되는 에너지 정책을 놓고 에너지 관련 시민단체들이 모인 에너지시민회의의 대책도 주로 정부를 상대로 한 토론회와 언론 보도 자료 정도의 전문가주의 활동에 그치고 말았다. 에너지시민회의에서도 일반 시민들, 대중들은 없다.

에너지 독재 체제를 깨부수고 지역 자립의 분산된 에너지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길을 대중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대중투쟁이 없는 재생 가능 에너지 체제로의 전환은 불가능하다.

공동체운동 없는 시민운동은 이제 끝났다. 한국 환경운동의 역사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다채로움과 역동의 운동 역사였다. 그렇게 만든 주역은 다름 아닌 이 땅의 대중들과 그리고 대중들과 함께 한 뛰어난 헌신의 대중투쟁 활동가들이었다.

이제 다시금 다채로움과 역동의 창의력을 발휘해 발상의 전환을 이끌어내야 할 때가 왔다. 시민에서 지역 주민의 운동으로, 중앙과 국가 차원에서 벗어나 지역 공동체운동으로 시민사회운동이 전환되어야 할 때가 왔다. 부패 척결, 정의 실현의 국가에 앞서 평등과 우애, 환대의 공동체 재구성이야말로 먼저 실천해야 할 대안의 대중운동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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