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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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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 [길에서 책읽기] <세계사를 바꿀 달러의 위기>
▲ <세계사를 바꿀 달러의 위기>(빌 보너·에디슨 위긴 지음, 이경호·이수정 옮김, 돈키호테 펴냄) ⓒ프레시안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이미 미국발 금융 위기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시기를 예단하지는 못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터지고야 만다고 지적해왔다. 빌 보너, 에디슨 위긴 공저의 <세계사를 바꿀 달러의 위기>(이경호·이수정 옮김, 돈키호테 펴냄), 엘마 알트파터의 <자본주의의 종말>(염정용 옮김, 동녘 펴냄) 등이 그런 주장이 담긴 책들이다.

미국의 저축률은 거의 0에 가깝다. 그럼에도 미국의 소비지출은 무려 10조 달러 이상이나 된다. 1945년에 견주어 거의 70배 수준이다.

이렇게 풍요로운 대량소비 덕분에 미국의 가계부채는 2007년 말 13.8조 달러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문제의 주택담보대출 비중이 76%나 된다. 이 같은 가계부채 규모는 미국 경상 국내총생산(GDP)의 99.9%에 해당한다. 그리고 개인가처분소득의 150%를 넘어서는 수준이다. 1980년에는 가계부채가 개인가처분 소득의 절반 수준이었는데 레이건 이후 지난 30년간 이렇게 늘어났다.

가계부채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은 최대의 채권국이었다. 그러나 60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세계 최대의 채무국으로 전락했다. 미국의 부채는 2007년 3분기 현재 연방 부채까지 합해 약 45조 달러이다. 이는 미국의 자산가치 50조 달러와 맞먹는다.

미국의 국가 부채는 2007년 12월 기준으로 1분당 100만 달러(약 9억 2500만 원), 하루 14억 달러(약 1조 2950억 원) 꼴로 불어나고 있다. 2001년 1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취임할 당시 5조7000억 달러였던 미국의 국가 부채는 2007년 처음 9조 달러를 돌파해 2008년 10월 현재 10조 달러를 넘어섰다. 연방정부가 지난해 이자를 갚는 데 쓴 돈만 해도 4300억 달러나 된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뉴욕에 있다는 미국 국가부채시계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위에는 국가부채 액수를, 밑에는 이를 전체 가구 수로 나눈 가구당 평균부채 액수를 표시하고 있는 전광판이다. 1989년 미국의 국가부채가 2조7000억 달러일 때 한 부동산 개발업자가 미국 시민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타임스퀘어 벨라스코 극장 맞은 편 빌딩 외벽에 설치했다고 한다.

그런데 2008년 9월 30일 이 시계가 미국 국가부채 액수를 1달러로 표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국이 갑자기 어디서 떼돈이 쏟아져 들어와서 빚을 갚아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미국 국가부채 액수가 10조 달러를 넘어서면서 애초에 13개 숫자만 표시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는 전광판 숫자의 칸이 그만 모자랐기 때문이다. 시계는 15자리로 고쳐졌고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의 국가채무는 오히려 더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얼마 전 의회를 통과한 구제금융 7000억 달러와 추가로 구상 중인 액수까지 합하면 벌써 12조 달러를 넘는다.

생산보다 더 많은 소비를 한다는 것은, 더구나 소득보다 더 많은 소비를 한다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그런 이상한 일을 미국은 태연히 몇십 년에 걸쳐 지속해 오고 있다. 이미 미국은 무일푼의 신세이고 파산 상태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미국이라는 제국이 여전히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미국인들이 여전히 풍요의 소비를 계속하고 있는 것은 달러가 기축통화로 기능하는 이른바 팍스 달러리움 체제 때문이다.

1971년 이전에는 달러는 정확히 일정량의 금과 바꿀 수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달러를 더 발행하려면 그만큼의 금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1971년 달러의 금태환 폐지 이후 달러는 그냥 마구잡이로 찍어낼 수 있는 지폐가 되었고 실제로 1971년 이후 연방 정부가 달러를 마구 찍어내자마자 미국의 소비지출은 기하급수로 늘어났다. 세상에 종이를 찍어 물건을 살 수 있는 동화같은 일이 일어났는데, 지폐를 찍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달러 세뇨리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마술의 힘 덕택이다.

전 세계 각국의 항구에서, 특히 중국, 일본, 한국의 항구에서 날마다 물건을 가득 실은 배가 미국으로 떠난다. 아시아인들은 상품을 미국인들에게 팔고 그 대금으로 달러 지폐를 받는다. 그리고 그 달러 지폐로 다시 미국 재무부 장기채권을 산다. 미국은 달러를 찍기만 하면 된다.

미국인들은 아시아인들이 열심히 노동해서 저축해 놓은 돈으로 호사스런 소비생활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미 재무부 채권의 절반은 외국인들, 특히 아시아 3국에 있다. 1952년에는 외국인들의 재무부 채권 보유 비율이 5% 미만이었다.

미국의 신용은 더 이상 금이 아니다. 달러화의 가치를 보장하는 것은 그냥 미국에 대한 신용과 미국 국채에 대한 신용밖에 없다. 아시아 3국이 미 국무부 채권을 회수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미국은 파산을 피할 수 없다.

로마제국은 식민지에서 10% 정도의 세금을 거두어 제국을 운영했다. 미국은 세금 대신 빚으로 제국을 운영한다. 로마는 이집트에서는 밀을, 발칸 지역에서는 검투사들을, 갈리아 지역에서는 병사들을 데려왔다. 로마의 돈은 방대한 식민지에서 거둔 보물과 세금이었다. 그리고 세금을 거둘 수 없게 되자 로마는 망하고 말았다. 미국은 밀을 자급자족한다. 그러나 밀을 운송하는 트럭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들여온 것이다. 음식을 만드는 프라이팬은 중국에서, 가전제품은 대만에서, 옷은 말레이시아에서, 자동차는 일본에서 수입한다. 과학자들은 인도에서, 클래식 연주자들은 한국에서 오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끔 만드는 돈은 중국, 일본,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에서 들어온다. 물론 달러를 무제한 찍어서 말이다. 그리고 지금 미국은 더 이상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 제국의 붕괴는 필연이다. 1989년 소연방 제국이 스스로 무너졌듯 미연방 제국도 스스로 붕괴될 것이다.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는 사전 예고 방송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로 번지고 있는 것은 그만큼 미국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고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말해준다. 미국은 전 세계 에너지의 4분의 1을 소비하고 있고,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상품과 서비스의 15%를 수입한다. 미국은 최대의 채무국이자 최강의 군사대국이다. 그리고 덧붙여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현재 농사를 짓는 사람은 200만 명 남짓으로 줄었다. 그러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은 200만 명이 넘는다. 그 중 일부는 고문도 당한다.

물론 이번 미국의 금융위기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해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전히 달러는 기축통화이고 달러를 대신하는 새로운 기축통화나 지역 간 통화는 아직 모색 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미 제국은 더 이상 이전처럼 세계의 맹주가 아니다. 미국은 이제 기독교 공동체를 강하게 지향하던 건국 초기의 연방 국가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는 더더욱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처럼 전 세계에 메이드인아메리카를 세계로 수출하던 세계의 공장도 아니다. 그저 시시때때로 침략을 일삼는 늙은 제국일 따름이다.

부채를 갚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환율을 조작하는 방법도 있고 아예 갚지 않는 방법도 있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볼셰비키 정부는 서방 부채를 갚을 의무가 없다고 선언했다. 1840년대 공황기에 미시건,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등 미국의 일부 주들도 부채의 지불 의무를 완전히 부인해버렸다.

그 가운데 가장 유력한 방법이 전쟁이다.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은 모두 금융공황과 연관되어 있다. 지금의 금융공황도 그 탈출구가 전쟁일 수도 있음을 역사는 강력하게 상기시켜 준다.

어쩌다 미국이 이렇게 변했을까. 왜 세계의 공장이 세계의 거품으로 변하고 만 것일까.

답은 단순하다. 지금 전 세계 외환거래에서 실물경제 거래로 교환되는 2%를 제외하고 나머지 98%는 투기자본의 이동인데, 2조 달러가 넘는 투기자본이란 사실상 노동자들과 제3세계 인민들의 피와 땀을 착취한 돈들이다. 이제 그런 금융자본들은 실물경제와는 전혀 별개로 먹잇감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에일리언들로 변신해 버렸다. 미국이 월가의 금융자본주의를 선택한 순간, 그리고 연방국가가 강한 국가주의, 군사력주의를 선택한 순간, 미국의 유권자들이 민주주의를 팽개치고 일하지 않고도 호화판 소비를 즐기는 미국식 강도질 경제를 선택한 순간, 이미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의 길은 피할 수 없는 길이 되어 버렸다.

금융업이란 거칠게 말하면 일을 하지 않고 돈을 버는 악질의 고리대금업이다. 금융자본주의란 자본주의의 가장 악취 나는 진화이며 이윤이라면 지옥에라도 뛰어드는 자본의 속성상 필연의 자연선택이기도 하다. 금융자본주의란 기생충 자본주의로서 자본주의의 핏빛 황혼기이며 자본주의가 종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인민의 경제, 자립과 자치를 근본으로 삼는 호혜와 평등의 지속가능한 순환경제에서는 금융이란 이슬람에서 시행되고 있는 무이자 은행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린스펀은 금태환 폐지를 완강하게 반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연준 의장이 되면서 자신의 신념을 백팔십도로 바꾸었다. 그는 가장 강력한 지폐옹호론자가 되었고, 과거 연방적자 반대와 증세를 주장하던 입장에서 정반대로 연방적자 걱정 대신 증세를 반대했다.

그린스펀은 아이젠하워 이후 가장 낮은 금리를 유지함으로써 미국인들에게 더 많이 대출받아 더 많이 소비하라고 부추겼다. 집값이 올라 엄청난 거품이 생긴 상태에서 대출을 늘리는 것을 '재산가치의 추출'이란 알쏭달쏭한 말로 현혹시켰던 그린스펀 같은 자들, 일자리가 줄어들면 생산성 향상의 증거라고 말하는 밀턴 프리드만 류의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야말로 미 제국을 붕괴시키는 일등 공신들이었다.

문제는 이들의 추종자들과 복사판들이 한국에는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다. 리만 브라더스는 말할 것도 없고 여야 정치권에서부터 행정부, 언론, 학계를 막론하고 아직도 시장경제와 금융자본주의를 맹신하는 이른바 주류 경제학자들이 지천에 널려 있다. 사실상 미국을 모국으로 여기는 매판 식민 지식인들의 천지에 다름 아니다. 한국 경제의 앞날이 눈에 보이듯 훤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녹색평론> 2008년 11~12월호에 실린 글을 녹색평론사의 허락을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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