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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해, 광우병 포클레인을 막을 촛불이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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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해, 광우병 포클레인을 막을 촛불이 태어난다" [길에서 책읽기] <촛불 그 65일의 기록>·<촛불이 민주주의다>
어릴 적 기억이 난다. 소가 송아지를 낳을 무렵은 어린 나도 느낄 수 있는 묘한 술렁거림과 팽팽한 긴장감, 뜨거운 흥분과 활력이 온 집안을 하루 종일 휘감곤 했다. 방안 구석구석과 심지어 마당의 구석구석까지 그런 기운이 빽빽하게 가득 들어차 손님이라도 저절로 '아 이 집에 곧 송아지가 태어난다', 이런 사실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소는 주로 한밤중에, 때로는 새벽에 송아지를 낳았다. 그럴 때면 호야불과 함께 으레 촛농 떨어지는 촛불이 외양간을 밝혀주곤 했다. 송아지를 낳을 때는 아무도 함부로 외양간 근처를 가지 않았다. 주인도 마찬가지였다. 소는 연신 고통스러운 비명소리를 지르다 혼자서 송아지를 낳는다. 촛불은 그렇게 송아지가 태어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는 증언자였다.
▲ <촛불 그 65일의 기록>(경향닷컴 촛불팀, 경향신문사 펴냄). ⓒ프레시안

2009년 소의 해가 밝았다. 해가 뜨기 전 벌겋게 물든 새벽의 동쪽 하늘은 소띠 해가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는 촛불들의 잔치였다. 그 위를 송아지가 태어나듯 불쑥 소띠 해가 세상에 고개를 내밀었다.

모든 태어남은 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도 열 달을 어머니 뱃속에서 기다린다. 송아지도 비슷한 기간을 어미 소 뱃속에서 기다린다. 촛불이 2008년 한 해 내내 기다린 한국 사회의 미래는 그렇게 다시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이명박 정부가 가는 길은 미친 광우병 포클레인의 길이다. 전 국토를 공사장으로 만들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망치소리가 나야 한다는 말은 어찌 그리 40년 전 경제 개발 계획 당시의 박정희의 말과 똑같은지 모르겠다. 사실 이런 근대화, 서구화, 공업화, 경제개발과 성장의 세계관은 이제 속속들이 우리들 자신의 뼛속까지 내면화되어 있는 가치이자 세계관이다. 경쟁과 시장이 최고의 가치이고 인간 삶의 목표는 오로지 소비와 승리이다. 자연은 정복되어야만 하는 물건일 뿐이다.

그렇게 경제 개발과 성장과 대량 소비를 하루도 멈추지 않으면 마치 지옥에라도 떨어지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제인들로 변신한 사람들의 선택이 이명박이었다. 아직도 박정희를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선택이 이명박 정부였다. 우리는 지금 근 100여 년 동안 한국 사회가 추구해 왔던 이런 서구 자본주의 산업사회 세계관의 극단을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이들의 눈에는 포클레인으로 강을 산산히 파괴하는 것이 생태복원이고 녹색이다. 새만금을 공장으로 만드는 것이 환경 친화이고 녹색이다. 람사르 총회를 하면서 습지에 도로를 내는 것이 환경 친화이고 녹색이다. 이들은 태연히 녹색 살해를 저지르면서도 이를 녹색 성장이라고 부른다.

이런 세계관은 정도의 차는 조금 있을지 몰라도 여야가 따로 없이 공유하고 있는 관점이다. 한나라당이 푸른 옷을 입은 극단의 성장론자들이라면 민주당은 노란 옷을 입은 좀 덜한 성장론자들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도 오십보백보이다.

이명박 정부는 지금 나라를 열심히 포클레인으로 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나라를 열심히 팔아먹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세상에 재정경제부 장관이란 자(여기서 자는 놈 자이다)가 2008년 연말 소회랍시고 한다는 말이 단군 이래 자기보다 원 없이 그렇게 돈을 많이 쓴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그가 쓴 돈은 모조리 해외 환투기꾼들에게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는 사실 한국인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을 단 1년 만에 환투기꾼들에게 봉으로 갖다 바친 악덕 매국노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제 빈 나라 곳간은 알짜 공기업들을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사는 국제 투기꾼들에게 팔아먹은 대금으로 채우려 한다. 이것은 사실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이다. 일제가 한국을 근대화시켜준 은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른바 뉴라이트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세상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완용이 미국 회사에 운산 금광 채굴권과 경인철도 부설권, 서울 전차 부설권, 서울의 전등과 상수도 전화 가설권 등을 팔아치우고, 러시아에겐 경원과 종성의 사금광 채굴권, 압록강과 울릉도의 삼림 채굴권 등을 팔아먹으면서도 내세웠던 주장은 다 나라와 민중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완용은 엄청난 소개비를 챙겨 청운동 일대가 다 이완용의 땅이었다.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일제고사를 거부하고 체험학습을 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주었다는 이유 하나로 교사를 강제 해직한 청운초등학교 바로 옆에는 아직도 이완용이 살던 2층 석조건물이 있다. 정문 앞에서 초등학교 어린 학생들을 겹겹이 에워싸고 선생님에게 가지 못하게 막던 경찰들, 그런 경찰에게 강제로 일제히 감사편지를 쓰라고 강요했다는 교장(뒤에 선생님이라는 말을 붙이고 싶지 않은 자, 여기서도 자는 놈 자이다)이 있는 곳 바로 옆에는 또 청와대가 있다.
▲ <촛불이 민주주의다>(권지희 외 지음, 해피스토리 펴냄). ⓒ프레시안

이런 세계관에 대한 근본의 성찰이 촛불이었다. 광우병 걸린 포클레인에 대한 성찰이 촛불이었다. 우리의 삶을, 생명을, 우리의 공동체를, 그리고 우리의 정치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 반성의 시간이 촛불이었다.

그러나 촛불이 광우병 쇠고기 수입의 분노를 넘어 정치권력의 영역으로 넘어가자마자 그것은 전혀 다른 정치 투쟁의 장으로 변한다. 그리고 정치 투쟁은 근본에서부터 정치 세력의 문제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성찰과 반성의 녹색 정치 세력이 아직 폭넓게 조직되어 있지 않다.

한국 사회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참된 공동체 사회, 돈이 주인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이 주인이 사회, 정의와 평화와 평등이 넘치는 사회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공동체 정치세력은 아직 폭넓게 조직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촛불이 우리 모두에게 준, 그리고 촛불을 든 수많은 일반 시민들이 스스로 부여받은 과제이다.

정치는 더러운 것이라는 우리들의 생각 자체가 정치를 더럽게 만든다. 정치인의 부패와 뇌물, 무능을 욕하는 그 자체가 정치를 부패하고 무능하고 뇌물만 받아먹는 정치인들을 만들어 낸다. 정치는 촛불 시민들 스스로 일상의 정치 활동에 참여할 때 비로소 공동체 정치로 전환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일반 시민들이 누구나 정치에 참여해야만, 시민·사회단체들이 낡은 정치 중립을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고 과감하게 정치의 전면에 나설 때 한국의 정치는 변화되고 한국 사회는 변한다. 이것이 2008년 촛불의 교훈이다.

정치를 3년 내지 4년, 5년의 선거로 한정하는 정당 정치, 선거 정치에서 벗어나 지역에서부터 일상의 공동체 정치, 촛불의 정치로 탈바꿈 시켜야 할 소명이 우리 스스로에게 있다. 지금 당장 지역에서부터 2010년 촛불의 지방정치를 조직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금 지방정치는 광우병 걸린 지역 토호들의 포클레인 삽질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역은 녹색 공동체와 포클레인 광우병과의 치열한 전쟁터이다. 지역 정치라는 점에서 민주당은 전라도의 한나라당일 뿐이고, 한나라당은 경상도의 민주당일 뿐이다.

왜 진보정당조차 정치를 지역에서 출발하지 않고 중앙에서 하려고 하는가. 왜 진보정당과 시민·사회단체조차 지역을 외면하고 그렇게 중앙의 이미지정치에 매몰되어 있는가. 몇몇의 전·현직 스타 국회의원들에 의존하고 언론에 몇 줄 대중들의 뇌리를 자극하는 기사에 목을 매는 행태가 되풀이 된다면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이나 진보정당의 미래란 없다. 지역과 공동체의 뿌리가 없는 정당이란 결국 보수 언론과 결탁된 보수정당을 넘어설 수가 없다.

뜬금없이 반한나라 민주대연합을 말하는 것은 또다시 정치를 이른바 '비판적 지지'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철지난 고물자동차를 타고 절벽으로 질주하라는 말과 같다. 그것은 북한과 남한이 반공과 반미 환원주의로 늘 소동을 벌이는 이른바 '적대적 공존'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여전히 지역 토호들에게 갖다 바치는 진상이나 다름없다.

촛불 책 두 권, <촛불 그 65일의 기록>(경향닷컴 촛불팀 엮음, 경향신문사 펴냄)과 <촛불이 민주주의다>(권지희 외 지음, 해피스토리 펴냄)를 읽으면서 촛불이 밝힌 촛불 정치란 결국 지역과 공동체 풀뿌리 정치의 치열하고도 튼튼한 조직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소의 해 벽두부터 몰아친 한파에 시린 손으로 책갈피를 넘기며 든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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