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아직도 용산에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아직도 용산에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기고] 변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난 1월 20일 6명이 숨지는 용산 참사가 발생한 지 세 달이 다 되어간다. 그러나 여전히 상황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5명의 철거민 희생자는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했고, 재개발 사업은 한치도 달라지지 않은 채 강행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지난 9일 용산4구역 도시환경정비조합은 유가족, 철거민 등 20명에게 공사가 지연돼 손해를 입었다며 8억7000만 원의 손해배상소송을 청구했다.

사회단체로 구성된 '이명박정권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이 병원 영안실에서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는 유가족과 현재의 상황을 알리는 글을 보내왔다. 그는 "다시 한 번 힘을 보내주시기를 부탁한다"며 "많은 분들이 아직도 용산참사를 잊지 않고 있다. 여전히 우리에게 마음을 모아주고 있다는 것을 유족들께 느끼게 해드리고 싶다"고 호소했다.

올해 6주년을 맞은 민들레 국수집의 서영남 선생님께서는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쌀 스무포대와 상상도 못할 엄청난 양의 김을 보내주셔서 지금까지도 정말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부산의 안젤라 수녀님께서는 A4용지와 라면을, 늘 사람냄새 나는 공연을 펼치는 극단 '신명나게'에서는 베스트셀러 책 서른 권, 핸드크림 30개, MP3 플레이어 두 대를 보내왔습니다.

문규현 신부님께서는 오체투지를 떠나시기 직전 전주에서부터 손수 차를 몰고 올라오셨습니다. 떡국 떡 30㎏과 양파즙 한 박스를 두손 가득 드시고 신자들과 함께 모금한 후원금도 전해주셨습니다. 문규현 신부님과 전종훈 신부님, 수경 스님이 떠나신 그 고행의 길에 존경을 보내며 그분들의 정신이 온 세상에 평화와 용서를 전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교포사목 중 잠시 한국에 들르신 신성국 신부님과 신도림 성당의 최부식 신부님께서도 많은 후원금을 전해주셨습니다. 우리신학연구소 박영대 소장님도 정성을 모으셨다며 후원금 봉투를 들고 순천향대학병원을 찾아 주셨습니다. 늘 노동자들과 함께하시는 김정대 신부님, 멀리 해남에서 일이 있을 때마다 서울에 올라오시길 마다 않으셨던 진병섭 신부님, 한미 FTA 투쟁의 가장 선두에 계신 송기호 변호사님께서도 후원금을 보내주셨습니다.

수백명의 고발인 서명용지를 들고 영안실을 찾아 주셨던 인천 고강동 성당 수녀님과 사회복지분과장님, 수녀님들의 정성을 모아 정말 큰 액수의 후원금을 보내주신 성심수녀회 수녀님들께는 정말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후원금을 보내주신 많은 분들이 또 계십니다. 연락처가 없어 일일이 감사인사를 드리지 못함이 송구할 뿐입니다.

모두 다 너무나 감사드렸고 눈물나게 반가웠지만 문정현 신부님께 가장 애틋한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깨 수술을 하셔서 아직 회복이 다 되지도 않으셨는데 혼자 기차에 몸을 싣고 영안실에 오셨습니다. 유족들의 손을 잡고 한참을 우시고는 영안실에 오셔서 꼭 승리하자는 말씀으로 상황실에 힘을 주셨습니다.

그 다음 서울 상경길에 평택 대추리는 물론 전국을 누비던 꽃마차를 이끌고 용산참사 현장에 오셔서 매일 7시 촛불미사를 참사현장에서 봉헌하시겠다고 선언하시고 오늘까지 매일 이어오고 계십니다. 하루종일 용산참사 현장을 지키시며 용역들과 경찰들에 직접 또 맞서고 계십니다. 많은 분들이 신부님의 건강을 걱정하시고 만류하시기도 하시지만 솔직히 상황실 구성원들은 신부님이 함께 해 주시는 것이 얼마나 큰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신부님의 의지와 실천을 과연 우리들이 따라 갈 수나 있을까 걱정도 앞섭니다.

상황은 변한 게 없지만

용산 화재 참사로 철거민 5분과 경찰관 1분이 세상을 떠나신지 76일째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철거민 다섯 분의 시신은 냉동고 안에 계시고 유족들은 눈물과 한숨의 매일을 보내고 계십니다. 첫 번째 편지를 드리고 3주가 넘게 지났지만 상황이 달라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매일 촛불을 들고 있고 주말마다 추모대회를 하고 있고 용산 4지구에서, 순천향대학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경찰들과 하루에도 열두번씩 신경전을 벌이고 불심검문을 당하고 비디오 카메라와 망원렌즈 카메라에 '채증'을 당하며 싸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아마 이 자료들을 근거로 조만간 경찰은 또 범대위 활동가들에게 소환장을 날리겠지요. 그러면 또 누구는 조사를 받고 벌금을 내야할 테고, 누구는 수배자가 되던지 구속자가 될 것입니다. 용산범대위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막아서고 있는 경찰, 단 한번의 집회신고도 허가해 주지 않은 것은 분명 용산범대위가 밝히려고 하는 진실을 두려워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용산범대위 상황실 구성원들은 대부분 감옥에 갈 각오를 이미 다져두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이 참담한 탄압에 맞서 싸우다 보면, 다섯분 열사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무분별한 뉴타운 재개발사업에 제동을 걸기 위해 묵묵히 길을 가다보면, 감옥에 가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김태연 상황실장이 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있고 이종회, 박래군 공동집행위원장은 한달 넘게 수배중입니다.

용산참사 진상규명 투쟁 중 경찰의 소환장을 받은 이들이 십수명이고 네티즌 수십명에게도 무차별 소환장을 보내고 있습니다. 강하게 찍어누르면 일시적으로는 눌린 듯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다시 밀러올린 힘이 모이게 마련이고 찍어누르던 것은 무엇이든 부서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명박 대통령과 이 사회의 공권력은 제발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 참사 현장에서 천주교 촛불평화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희생자 유가족. ⓒ뉴시스

"갤러리 레아"와 "촛불방송국"이 오픈했습니다

지난 3주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기대를 걸었던 국민참여재판이 법원의 배제결정을 받았습니다. 일시적으로 실망하고 낙담하기도 했지만 십수명의 변호인단들이 밤낮없이 재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4월 9일부터 구속자 6인과 불구속자 3인 등 총 9인의 재판이 시작됩니다. 살려고 옥상에 올라갔던 사람들이 불에 탄 시신이 되어 돌아왔고 대화를 하자고 망루를 세웠던 사람들이 경찰을 죽인 살인자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화재의 원인은 누구도 밝힐 수 없는 미스테리가 되었지만 경찰의 이례적인 강경진압이 없었다면 화재도, 죽음도 없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화재 현장인 남일당 건물 바로 뒤에 위치한 고 이상림 님 부부와 구속된 이충연 용산 4지구 철대위원장 부부가 운영했던 레아호프를 문화예술인들과 미디어활동가들이 "갤러리 레아"와 "촛불방송국"으로 새롭게 오픈했습니다. 오픈식 사회를 제가 보았는데 오랜만에 떡과 막걸리를 나누며 흥겨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나가던 학생들도 떡을 먹으며 오픈식에 함께 했고 옆에 서 있는 경찰들과도 떡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죽음의 거리가 되었던 용산 4지구에 생동감이 넘치고 다시 활기가 가득 찼습니다. 수천 만원짜리 조각에서부터 시사만화가들이 그린 만화까지 문화예술인들이 함께한 작품들이 "갤러리 레아"를 가득 채웠습니다. 이후에 사진전, 시화전 등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이어질 것입니다. 앞으로 폐허가 된 빈 공간들에 생명과 평화를 불어 넣는 일을 계속 이어갈 것입니다. 용산 4지구를 서울시내의 명물거리로 만들 생각입니다.

우리는 또 철거민들의 사실적인 삶을 담은 구술집 <여기 사람이 있다>를 발간했습니다. 벌써 초판 2000부가 다 팔렸습니다. 책이 처음 나온 날 저는 첫 페이지를 네 번이나 읽어야 했습니다. 첫 페이지를 채 읽기도 전에 목이 메이고 눈이 뜨거워져 글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살면서 이토록 처철하고 분통터지는 이야기를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이렇게 눈물나는 철거민들의 삶을 외면하고 살았는지 제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리고 싶은 심정마저 들었습니다.

이 책을 팔아 우리가 큰 이익금을 남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분들은 분명 철거민들과 용산참사에 대해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어지실 것이라 믿습니다. 책 한권 읽기 쉽지 않을 정도로 요즘 다들 어렵고 힘듭니다. 하지만 이 책은 바로 내 누이의 이야기이고 내 아버지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심장에 울림을 남길 것입니다.

눈물나는 이야기들

여당의 국회의원들이 전철연을 테러집단이라고 매도하기도 했고 전철연이 순진한 용산 4지구 사람들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도 했습니다. 조 · 중 · 동에서 연일 보도를 했으니 아마 그렇게 믿으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리라 봅니다. 그런데 제가 석달여 동안 곁에서 본 전철연 사람들은 전혀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들은 너무나도 소박하여 '꿈'이라고 말하기도 어색할 지경입니다. 뻥튀기 한봉지라도 생기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하나씩 입에 물려주고 나서야 자기가 먹을 하나를 꺼내드는 아줌마들입니다. 힘들고 하기 싫은 일이 생기면 서로 자기가 하겠다고 손을 뻗는 형님들입니다.

너무나도 치열하고 절박한 생존의 현장에서 때로는 고함도 치고 경찰과 맞서기도 하지만 내일 아침 아이 도시락 반찬 걱정을 하며 집에 가는 길을 재촉하는 그런 '엄마'들이 대부분입니다. 과연 누가 이들에게 투쟁을 강요 한 것일까요? 누가 이들을 옥상 망루로 내몰았습니까? 바로 돈입니다. 자본과 그 자본을 비호하는 권력이 바로 주범입니다. 또, 가난한 사람들과 한동네에 사는 것이 불편해 참을 수 없는 바로 우리들이 공범입니다.

고 이상림 님은 부인과 함께 27년 동안 용산에서 '한강갈비'를 운영했습니다. 일대에서 육질 좋고 밑반찬 맛있기로 유명한 집이었다고 합니다. 한 자리에서만 27년 동안 장사를 했다면 그 사람이 사실 그 집의 주인인 셈이지요. 연로하신 부모님을 걱정하는 자식들에 권유에 1년 반 전 막내아들 내외와 함께 레아호프로 리모델링을 했습니다. 막내아들 내외가 편생 번 돈과 노부부가 가진 작은 예금으로 1억이 넘는 돈을 들여 정성스레 레아호프를 꾸몄습니다. 가게 앞을 쓸고 닦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던 고 이상림 씨가 막내아들 내외와 함께 살던 셋방도 가게가 있는 건물 옥탑에 있으니 이번 개발로 집과 생활터전을 다 잃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누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저항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그 칠십 노구를 이끌고 서른중반의 막내아들 손을 붙잡고 망루에 올랐다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까맣게 불타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막내아들의 면회만 다녀오면 파열된 인대 때문에 굽혀지지 막내아들의 다리가 걱정되어 식사도 못하십니다. 결혼한지 8개월 만에 남편을 감옥에 보낸 정영신 씨는 유족이자 구속자 가족으로 구치소와 집회 현장을 바쁘게 오갑니다. 지난 주말에는 제주도 4.3 행사에 가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이신 강우일 주교님도 만나고 왔습니다. 몸살이나 걸리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하얀 조리사 옷 대신 파란색 우비를 입고

고 양회성씨는 평생 요식업에 종사하며 모은 전재산과 친지들에게 힘을 빌어 용산 4지구에 삼호복집을 열었습니다. 두 아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일식조리사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만간 온가족이 함께 가게를 운영하는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에게 철거와 재개발은 평생을 준비한 꿈의 실현을 눈앞에서 앗아가는 절망적인 일이었습니다. 평생 요리만 알고 살던 고 양회성씨는 하얀 조리사 옷 대신 파란색 우비를 입고 망루에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일식조리사가 된 큰 아들 종원이는 석달 가까이 일을 못해 그동안 힘들게 손에 익힌 솜씨를 잃어버릴까 걱정이 큽니다. 둘째 종민이는 한달전 추모대회에 나갔다가 경찰방패에 맞고 바닥에 깔려 무릎연골이 파열되었습니다. 무릎 수술을 하고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집은 채 아버지 곁에 있겠다며 영안실로 돌아왔습니다. 목발을 집고라도 추모대회에 나가겠다는 종민이를 말리는 일은 주말마다 제게 중요한 일 중에 하나입니다.

고 윤용헌씨는 전철연 식구들에게 그렇게 인기가 좋은 분이었다고 합니다. 싫은 소리, 큰 소리 한번 하는 법이 없었고 궂은 일은 도맡아서 하는 든든한 오빠, 형이었다고 합니다. 올해 대학에 입학한 큰아들이 아버지가 끓여주셨던 라면이 먹고 싶다며 추모대회에서 읽은 편지는 드는 모든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고 2가 된 상필이는 영안실에서 겨우 잠에서 깨어 가방대신 걱정과 눈물을 등에 지고 등교를 합니다. 숙제할 공간도 없어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숙제만 겨우 하고 있습니다. 상필이는 어릴 적부터 눈이 많아 아팠다고 합니다. 큰 수술을 두 차례나 잘 견디어냈지만 곧 백내장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늘 착한 미소로 인사하는 상필이지만 이 번 수술은 정말 하기 싫고 겁이 난다고 합니다. 아직 어리기만한 상필이가 수술비 걱정을 할 때 저는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녀석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며 자리를 피했습니다. 정말 수술이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고 한대성씨는 조용하고 묵묵한 분이셨다고 합니다. 어머님도 아버님처럼 그렇게 늘 조용히 웃고 계십니다. 수원 신동의 집이 철거위기에 닥쳤지만 두 아들과 함께 소박한 행복을 누리고 사셨다고 합니다. 신동에서 집회 할 때 연대해 주었던 사람들이 고마워서 그날도 용산에 연대를 오셨다고 합니다. 큰 아들 승균이는 이제 상병을 달았고 제대가 1년이나 남았습니다. 이 친구가 걱정되어 부대에 특별히 부탁을 해 얼마 전 특별휴가를 나왔는데 따뜻한 밥 한끼 손수 지어 먹이지 못한 어머니는 조용히 눈물만 흘리셨습니다. 학교가 너무 멀어 친척집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는 막내 황룡이는 엄마랑 밤마다 길게 통화를 합니다. 어머님은 혼자 계시지만 든든한 두 아들이 참 기특하신 모양입니다.

술 한 잔, 밥 한 끼 사는 일에 머뭇거림이 없으신

고 이성수씨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분이셨다고 합니다. 주머니에 만원짜리라도 한 장 만져지면 술한잔, 밥한끼 사는 일에 머뭇거림이 없으신 분이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석달이 다 되어 가는데도 친구며, 후배들이 영안실을 자주 찾으십니다. 고 이성수씨 가족은 이미 13년전에 용인 수지에서 살던 집을 철거 당하신 경험이 있으셨답니다. 그때도 열심히 저항하며 싸웠는데 더 이상 수지에서 살 수 없어 성남으로 옮기게 되셨다고 합니다. 노점상을 하시며 살고 계셨는데 3년전 살던 집이 두 번째 철거되어 네 식구가 천막을 치고 살아오셨다고 합니다.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살던 집을 철거당한 사람의 심정을 우리가 감히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 속을 부단히도 썩였다는 큰 아들 상흔이는 한달전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원래 입대가 결정되어 있었는데 이일 때문에 미루었고 당장 동생 학교갈 차비라도 벌어야지 않냐고 하며 새벽시장 옷가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둘째 상현이는 다니는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에게 구속자 석방 서명을 천명이나 받아왔습니다. 유족들의 2세들이 대부분 저보다 아우들인데 이 친구들 보면서 제가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참아요 외로워도 나를 기다리는 가족 때문에
참다보면 가끔 잊어요 우리도 사람이란 사실을
반말하고 욕하는 사람들 앞에 주먹쥐고 일어서고 싶지만
고향형제 때문에 한국 오느라 진빚 때문에
참아요 참다보면 사람들은 잊어요 우리도 사람이란 사실을
우리도 때리면 아프고 슬프면 눈물나는 사람인데

참았어요 외로워도 달리 기댈 곳이 없기에
잊었어요 참다보면 나도 사람이란 사실을
반말하고 쉽게 욕하고 찝적대고 쉽게 해고하는 사람들 앞에
큰소리치고 욕하고 싶었었지만
이번 달 방값 때문에 어딜가도 마찬가지란 생각 때문에
참았어요 참다보면 잊어요 나도 꿈을 가진 여자란걸
잊는게 잊는게 두려워요 꿈을 잊고 사는게

우리도 때리면 아프고 슬프면 눈물나는 사람인데
사람들은 모른척 하죠 모른척 눈감고 살죠
모른척 눈감고 귀막아도 우린 숨쉬고 살죠
같은 하늘 아래 아프고 눈물흘리며 살아가요
- 뮤지컬 <빨래> 中 '아프고 눈물 나는 사람'(작사 추민주)


제가 좋아하는 뮤지컬 <빨래>에 나오는 노래입니다. 이 뮤지컬의 OST가 어제 배달되어 왔습니다. 아침 출근길에 CD를 듣던 중 이 노래가 나오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극중에서 몽골에서 온 이주노동자 솔롱고와 비정규직 여성 나영이 함께 부르는 노래입니다. 수십번 들은 노래인데 오늘 아침에는 이 노래의 가사들이 송곳처럼 제 가슴 구석구석을 찔렀습니다.

눈물이 마르길 기다리며

잊혀져가는 용산 참사 문제와 이 땅의 소외받고 억압받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이야기로 제게는 들렸습니다. 이 정권이 지금처럼 공권력을 앞세워 우리를 때리고 아프게하는 일들이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습니다. 세상이 우리들의 상처와 아픔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못들은 척, 보지 못한 척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야속한 마음이 사무쳐 운전하던 차를 길옆에 세우고 눈물이 마르기를 기다렸습니다. 해야할 다른 일들이 너무 많은데 이 노래 한 곡이 또 다시 제 발길을 용산참사현장으로, 순천향대학병원 영안실로 돌리게 합니다.

짧게 써야지 하면서 늘 글이 길어집니다. 하고 싶은 말들을 함축하는 방법도 알아야하는데 아직 내공이 부족하고 모자라 그게 잘 안됩니다. 매일 저녁 7시 촛불미사와 촛불추모문화제가 신용산역 2번출구 용산 참사현장에서 진행됩니다. 토요일마다 추모대회가 열립니다. 경찰에서는 '용산'만 나오면 집회를 불허하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범대위 활동가들을 다 구속시키겠다고 엄포도 놓고 있습니다. 촛불 시민 70명에게 무작위 소환장을 보냈다고도 합니다.

이렇게 끝을 낼 수는 없습니다. 책임있는 정부 당국자의 사죄가 있어야 합니다. 이 무모한 공권력의 피해를 반드시 보상해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돌아가신 다섯분의 명예를 회복하고 정성껏 장례를 치룰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 부문별하게 진행되고 있는 재개발과 뉴타운 사업을 전면 재검토 하게 할 것입니다. 아직도 용산에, 왕십리에, 가재울에, 흥인동에, 정금마을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양심이 남아있는 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해야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명박 정권에서 인권활동가로 살아간다는 것 또는 양심이 남아있는 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박해를 견디겠다는 심정으로 살아가야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용산참사의 희생자분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로 거꾸로 가는 이 세상을 바로잡기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전히 많은 분들의 지혜과 힘이 필요합니다. 다시 한 번 국민 여러분의 작은 정성을 부탁드립니다.

후원금과 후원물품을 보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액수나 양은 정말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아직도 용산참사를 잊지 않고 있다. 여전히 우리에게 마음을 모아주고 있다는 것을 유족들께 느끼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먹을 것이든, 입을 것이든 무엇으로든 보여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마음속에 담아 두시는 것만으로는 우리가 힘을 내기 조금 모자랍니다.

다시 한 번 힘을 보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지치지 않고 끝까지 가보겠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눈감고 귀막았던 이 처절한 생존의 현장을 결코 떠나지 않겠습니다. 다시한번 범대위와 유족대표의 계좌를, 후원물품을 보내주실 주소를 아래 적습니다. 부상자 치료비, 장례식장 대여료, 시신 안치비, 구속자 지원금, 어느 하나 모자라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누구나 다 가지고 계실 마음을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표현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두서없이 긴 글 끝까지 읽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범대위 대표 계좌
신한은행 140-008-234498(박래군)

◎ 유족 대표 계좌
농협 302-0018-2602-31(전재숙·고 이상림님 부인)

◎ 물품 보내실 주소
서울 용산구 한남동 657 번지 순천향대학병원 장례식장 4층
용산범대위 02-795-1444

* 이 글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도 실렸습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원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2-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