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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참사', 잊었다고 '탓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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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용산 참사', 잊었다고 '탓하지' 말자" [울부짖는 용산] 천천히, 그리고 단단히
29일은 경찰의 강경 진압 과정에서 6명이 숨졌던 용산 참사가 100일째 되는 날이다.

당시 사고 소식은 한국 사회를 경악케 했다. 철거 과정에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대형 참사였다. 경찰의 진압 과정부터 재개발 정책에 이르기까지 온갖 문제를 놓고 비판이 이어졌다.

검찰은 농성을 벌인 철거민만 기소하고 경찰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이후 정부는 용산 참사에 대해 일언반구하지 않았다. 정부의 제대로 된 사과와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철거민 유가족은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다.

사회 역시 참사를 잊었다. 지금도 매일 사고 현장에서는 촛불 집회가 열리지만 발길은 뜸해졌다. 그 와중에 현장 주위에서 철거 공사는 계속되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다시 굴러갈 수 있을까. 무엇이 문제일까.

<프레시안>과 '이명박 정권 용산 철거민 살인 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는 용산 참사 100일을 맞아 용산 참사를 통해서 한국 사회를 돌아보는 글을 공동으로 연재한다.

▲ 용산 참사가 일어난 뒤, 검찰은 철거민 20명을 기소했지만 경찰은 무혐의 처분한 채 수사를 일단락지었다. ⓒ프레시안

며칠전 만난 친구는 이사를 하면서 TV도 버리고 신문도 끊었다고 한다. 그렇게 버리고 났더니 마음이 평온하다고, 더이상 '열불 받는 일'이 없어서 좋다고 했다. '그렇구나' 하면서 커피를 마시는데, 커피 맛이 많이 씁쓸했다. 치워 버리고 나면 없어질까. 보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 걸까.

물론,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렇다. 그런다고 일어난 어떤 사건이 진짜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지금 아프리카의 어떤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는 것처럼, 알지 못한다면 나에겐 일어나지 않은 일과 다름없다. 인정하자. 동서고금 수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진실이 있다고 말을 했지만, 우리는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긴다.

하긴, 그 짧은 기간 동안 별일이 다 일어났다

2009년 4월 29일은 용산 참사가 일어난지 100일째 되는 날이다. 100일 전 새벽, 건물은 불탔고, 사람들은 죽었다. 그런데 왠지 벌써 한참 전에 일어난 일처럼 여겨진다. 왜일까? 하긴, 그 짧은 기간동안 별일이 다 일어나긴 했다. 김수환 추기경 님의 선종, 미디어법 날치기 강행, 언론 탄압, 강호순 사건, 장자연 리스트, 박연차 리스트,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 소환 예정까지.

누가 '다이나믹 코리아' 아니라고 할까봐, 구글의 유튜브 실명제 거부, 청와대 행정관의 성접대 사건 등 자잘하게 일어난 일들까지 합치면 정신이 없었을 정도다. 그러는 동안 용산 참사는 점점 눈에서 멀어져 갔다. 경찰과 검찰은 온갖 안 좋은 이야기만 쏟아냈다. 시위가 폭력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둥, 경찰이 맞고 지갑까지 뺏겼다는 둥….

강호순 사건으로 용산 참사를 덮으라는 청와대 행정관의 이메일은 여론의 호된 뭇매를 맞았지만, 결과적으로 보수 언론과 경찰·검찰은 그 지시를 충실하게 수행했다. 다만 강호순 사건이 아니었을 뿐. 그 와중에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30%대를 견고하게 다지고 있었고, 대운하를 비롯한 국민의 동의를 얻지 못한 사업들은 강행처리되고 있었다.

…그리고 용산참사는 잊혀졌다. 아니, 정확히는 눈 밖으로 멀어져 갔다.

왜 사람들이 분노하지 않느냐고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경찰은 무죄고, 죽은 사람들이 유죄다"라는 검찰의 조사 결과를 믿지 않았지만, 그리고 그것이 조사의 끝도 아니건만… 사람들은 그 '아무도 책임지지 않음'에 경악했고, 정해진 결과에 어이를 잃었으며, 결국 정권의 의도대로 환멸을 느끼며 체념했다. 남은 사람들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했지만, 사건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조금씩 다른 이슈로 고개를 돌렸다.

사회심리학자인 다니엘 길버트는 인간이 사소한 일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정말 중요한 위협에 대해선 무덤덤해지는 이유를 P.A.I.N(Personal, Abrupt, Immoral, Now)이라는 네 가지 요소로 설명한다. 인간은 개인적이고, 갑작스럽고, 부도덕하며, 지금 당장 일어나는 일에 먼저 반응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서 용산 참사가 지워지게 된 이유도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용산 참사는 눈 앞에 당장 닥친, 내 일이 아니다. 누군가는 왜 사람들이 분노하지 않느냐고 울면서 이야기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장 눈 앞에 닥쳐오는 일들을 해결하며 살아가기에도 삶이 버겁다.

탓하지 말자. 그러나 포기하지는 말자

…그러니까,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사람들을 탓하지 말자. 그런 조급함이 오히려 사람들을 지치게 만든다. 어쩌면 내 아픔은 그저 내 아픔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결코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 그렇지만 포기하지는 말자. 사람들에게 이런 아픔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을. 그 아픔이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란 것을.

당분간은 지리한 법정 공방이 계속 될 것이다. 당분간은 계속, 추잡함으로 사건을 덮으려는, 사람들을 환멸에 빠트리려는 저들의 노력이 계속 될 거다. 그렇지만, 지금은 잊은 것처럼 보여도, 기억은 계속 남는다. 중요한 것은 "왜 사람들은 그 사건이 끝났다고 여기는 거야?"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아직도 안 끝났어?"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용산참사가 어떻게 기억되어 남아있는가 이다.

아름다움으로 포장하자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비록 어리석지만, 그 어리석음을 이겨낼 만큼의 능력을 지난 수천 년간 계속 단련해 왔다. 그것이 이성이고, 문명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추상화시켜서 생각할 줄 알게되면서 인간은 이만큼의 사회를 만들어왔다. 그러니까, 본질을 말해야 한다는 말이다. 차분히, 눈에 보이기 쉽게.

불가능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 "이 끝없는 복마전 같은 재개발이 어떻게 이뤄지게 되었는지, 이런 개발을 통해 누가 얼마만큼 어떤 이익을 가지게 되며, 재개발에 열광하는 사람은 왜 어떤 이익을 노리고 사들이려고 하는지,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투명하게, 눈에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용산 참사가 일어난 재개발 지역에서는 철거 작업이 계속 이뤄지고 있다. ⓒ프레시안
이 끝없는 복마전 같은 재개발이 어떻게 이뤄지게 되었는지, 이런 개발을 통해 누가 얼마만큼 어떤 이익을 가지게 되며, 재개발에 열광하는 사람은 왜 어떤 이익을 노리고 사들이려고 하는지,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투명하게, 눈에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막연한 연대를, 막연한 분노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공감을 해야만한다.

복마전을 그림으로 풀어서 얘기해주고, 그게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 지를 얘기해야만 한다. 공권력이 가져야할 자세는 무엇인지, 이럴 때 정부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에 대한 원칙을 다시 얘기하고, 합의를 얻어나가야 한다. 다들 막연하게 알고 있는 것들을, 분명하게 그림으로 다시 그려야만 한다.

우리가 원하는 삶은 어떤 것이고, 세상은 어떤 것인지. 그러기 위해선 어떤 방법과 시스템이 필요한 지를. 그건 불가능할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리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일례로 10여 년전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아들 병역문제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이슈가 되었고, 그 이후 사람들이 어떤 공감대를 가지게 되었으며, 어떤 시스템적 변화가 일어났는지, 우리는 이미 분명하게 알고 있지 않은가.

천천히, 그리고 단단히 가야 한다

…사실 세상은 지나고나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변하는 것이니까. 뭐 지난 몇 년의 성과를 한 큐에 날려버리는 어떤 정권도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정권에 대한 '분노'만 조직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지난 1년간의 촛불 집회에서 그런 것을 분명히 보지 않았는가.

차가운 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100일 가까이 장례도 못치르고 있는 유족들에게 할 말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천천히, 그리고 단단히 가야 한다. 용산참사마저 법정에서 판결나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그런 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리고 그래야 사람들에겐 보일 것 같다. 왜 사람들이 망루에 올라갈 수 밖에 없었는지. 경찰은 무리하게 치고들어와 화를 자초할 수 밖에 없었는지.

뜬금없이, "우리에게 살 권리가 없다면, 당신들에게 지배할 권리도 없다"는, 촘스키의 책에서 읽은 문장이 자꾸만 입가를 맴돈다. 나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해야만 겠다.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인 모든 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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