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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중도실용주의라면 쌍용차 사태에 개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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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중도실용주의라면 쌍용차 사태에 개입하라" [기고] 인간 파괴의 '더러운 전쟁'을 중단하라
쌍용자동차의 긴장은 용역과 '구사대'를 등을 동원하여 파업을 깨고자 한 자본이 공장 외부로 철수하면서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선 듯합니다. 이 와중에 자본은 희망퇴직 기회의 재부여, 분사 및 영업직 전환을 통한 일자리 제공, 무급휴직 및 향후 우선 재고용, 협력사와 연계한 재취업 기회 제공, 5년 내 경영정상화를 통한 제한적 리콜제 시행 등의 인력 구조조정 방안을 담은 최종안을 제시하며 이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회사가 파산될 수 있다고 압박하고 있습니다. 아니 한 발 더 나아가 '공권력'의 투입가능성을 말하면서 그 내적 긴장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해고 통보를 받은 노동자들에게는 그것 자체가 파산 선고입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그들은 오직 노동을 통해서만 가족의 의식주를 해결하고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부모를 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그들의 생존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비정규직법 개정 문제에서 보이듯 노동자들은 한치 앞의 상황을 내다볼 수 없는 파리 목숨보다 못한 존재인데 자본이 그런 안을 들이대며 위협한들 어떤 노동자가 그것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일방적으로 제시된 안을요. 자본의 안에 대해 '죽은 자들'을 겨냥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정리해고를 모면한 노동자들, 즉 '산 자들'의 욕망을 자극하여 이른바 '노노갈등'을 증폭시키고 '경찰력'을 투입하기 위한 수순의 명분용이라는 비판이 가시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산 자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최종안조차도 진정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음의 예고편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남게 된 노동자들에 대한 3년의 기본급 동결, 2년간 상여금 250% 반납, 3년 동안 일체의 복지 반납 등에 더하여 정리해고를 통한 대폭적인 인원감축에도 불구하고 생산량을 늘리겠다는 계획을 내보이고 있으니 향후 노동강도가 얼마나 세질 것인가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하지만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과도한 인사 및 경영권 침해등과 같은 불합리한 노사관행을 개선하여 경영정상화의 기틀을 마련하겠다는 방침입니다. 이는 그 동안의 민주적 노동조합활동을 부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향후 노동자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징표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미 노동자들이 임금 조건 등을 포함하여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내놓고 회사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자고 제안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마다한 채 오직 인적인 구조조정만을 고집하면서 일방적으로 제시한 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파산 내지 공권력을 투입하여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니 이 어찌 양식 있는 태도라고 할 수 있나요. 한마디로 자본이 제시하는 대책은 노동자들을 노예로 만들겠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구조조정의 칼을 피해간 '산 자들'조차 '살아 있는 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본에게 노동자는 필요에 따라 취하고 버릴 수 있는 상품에 불과한 존재이기에 그런 것이겠지요. 그들에게 노동자는 결코 자신과 똑같은 인간으로 존재해서는 안 되기에 그런 것이겠지요.

▲ 회사 측의 결정에 따라 비조노원 등 '살아남은 자'들이 26일 노조가 파업을 벌이고 있는 쌍용차 공장 안으로 진입해 일시적인 충돌을 빚었다. ⓒ연합뉴스
사정이 이런데도 진정 노동자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눈물겨운 것인지 모르는 자들은 쌍용차파업을 두고는 배부른 노동자들이 매번 떼를 써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수법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 어려운 위기의 시기에 먼저 회사를 살려야 노동자도 살지 않겠는가라는 나름의 처방을 내 놓으며 소수가 다수를 위해 희생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말도 합니다. 그리곤 짐짓 이 문제에 대해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것처럼 행세하며 단속적으로 반복되는 노자 간의 갈등상황이 정말로 지겹다는 발언을 남기고 슬며시 사라집니다. 이제는 너무나 자주 들어 식상할 대로 식상한 것이 된 이러한 언술에 그래도 잠시 주목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무엇이냐구요. 이 세상에는 자본만이 자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그 자신의 인식,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수많은 '자발적 자본가들'이 존재합니다. 도대체 그들이 누구냐구요. 그것을 따지기 이전에 혹시 우리가 그런 자본은 아닌가요.

하지만 사실 필자도 이들 못지않게 그 어떤 반복되는 상황이 지겹습니다. 우리의 부모형제들이 일하던 박정희 정권 때에도 경제성장을 하여 빵이 늘어나면 '노사가 그것을 함께 나누며 번영된 민주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하였지요. 공개적 독재의 날섬이 너무 무섭기도 하였기에 노동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며 쥐죽은 듯 노동하였고 그 결과 자본과 권력 또한 자랑스러워하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것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 약속, 노동자의 그 소박한 꿈은 어디로 갔나요. 이후 그런 노동자들의 꿈과 희망을 대가로 선진국 클럽이라 할 OECD에 가입하였고 그 회원국이라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의, 상상할 수도 없는 평균 2316시간의 중노동을 하는데도 오히려 빈부격차는 심화되고 소수의 자본과 권력이 거의 모든 성과를 독점하니 이 또한 어찌된 일입니까. 온 집안 식구들이 파트타임이다 아르바이트다 해서 일을 해도 한 사람의 가장이 노동하던 때보다 생활하기가 더 어려우니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요. 이 정도의 엄청난 생산력을 지닌 나라에서 자식 하나 공부시키는 것이 이처럼 어려우니 세상에 이런 나라가 또 어디에 있을까요. 세계 10위라는 무역국의 지위를 넘나드는데도 최저임금을 깎자고 난리를 치는 나라가 진정 사람 사는 나라이기는 한 것입니까. 그들이 약속하는 그 좋은 시절은 언제 오는 것인가요. 이제는 지겨움의 정도를 넘어 정말 넌덜머리가 날 뿐입니다.

천문학적인 유동성이 이윤을 찾아 부동산과 증권 시장을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린다는데, 왜 그 돈은 노동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존재와 삶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조직되어 쓰이지 못하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국민의 공금인 연기금은 채권, 증권에 투자하여 엄청난 손해를 보면 오히려 그 부담을 노동자들에게 고스란히 전가하면서도 왜 그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이용될 수는 없는 것인가요. 거대 글로벌 자본들의 사내 유보자금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철철 흘러넘쳐나고 있다는데, 왜 그 축적에 기여한 노동자들에게 그것은 항상 그림의 떡에 불과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왜 주기적으로 경제위기가 오면 결국 노동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죽어나가야 하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죄라면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노동을 한 죄밖에 없는데 말이지요. 아마도 큰 죄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평소 비정규직노동자 등 가난한 자들과 더 함께 하지 못한 죄 말입니다.

이른바 학문의 수준에서는 국가의 성격, 그 위상과 역할을 둘러싼 적지 않은 이견들이 존재하지만, 이러한 암울한 현실 속에서 국가가 자본의 이해를 보장하는 기제라는 것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노자관계의 비대칭성이 국가에 의해 재생산되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조차 부정하는 무대포의 주장이 자본의 이데올로그가 아니라면 이 시대에 어찌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것을 어떻게 해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에서는 다소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쌍용차 문제, 나아가 지금 비정규직 문제 등이 단지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쌍용차 문제, 비정규직 사태를 만든 가장 근본적인 책임을 신자유주의 정권들, 그것을 옹호하는 사회정치세력들에게 돌릴 수 없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냐구요. 애초 기존의 불평등하고 부당한 사회관계들, 권력관계들을 온존, 심지어 역행시키려는 자들에게 일차적 책임을 돌리는 것은 그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근본적인 책임은 기존의 관계들을 해소, 극복하여 민주적 사회관계들을 만들고자 꿈꾸는 사회정치세력들, 이른바 '진보', 그리고 좌파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에, 그것의 현실적 표현인 이명박 정권에게 쌍용차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이유는 오늘의 쌍용차 사태를 만든 핵심당사자가 바로 국가라는 점에서 위임권력의 최소한의 양식을 믿고 싶기 때문입니다. 노동자들이 그렇게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노무현 정권은 산업은행을 통해 상하이자동차에 2700억이나 빌려준 것은 물론 기술이전을 제한하는 약정마저 없애는 특혜를 안기면서까지 매각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모두가 알고 있듯이 상하이자동차는 인수 후 1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는 약속은 물론 신차개발 등을 위해 그 어떤 투자도 하지 않은 채 오히려 핵심기술을 빼낸 후 그것을 부실덩어리로 만들어 놓은 뒤 나 몰라라하고 빠져나갔지요. 그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어땠습니까. 쌍용차의 매각 지체를 비판하며 더 빨리 매듭지으라고 직간접적으로 압박하지 않았던가요.

그런데도 지금 바로 그 매각의 핵심당사자들이 사태해결을 외면하면서 노동자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권의 후계자로서 '추모정국'의 최대수혜자가 된 민주당은 가장 커다란 책임을 져야 할 정치세력임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행동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해결의 열쇠를 쥔 이명박 정권 또한 묵묵부답입니다. 과거 노무현 정권의 아주 작은 흠집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듯, 모든 '권력 및 사정 기관'을 동원하여 저인망식 조사를 하던 그 집요함과 철저함이 무색하리만치 노동자들의 삶이 걸린 쌍용자동차 문제에 대해서는 '노사의 대화'만을 강조할 뿐 그저 손을 놓고 있습니다. 아마도 정치적으로는 갈등관계에 있으나 자본에 대해서는 "시장권력론"이니 "비즈니스 프렌들리"니 하며 경쟁적으로 구애하는 '애증의 친구' 사이 이기에 그런 것인가 봅니다.

그렇다면 선거철도 아닌데, 왜 애꿎은 서민을 들먹이며 재래시장을 찾아 불필요한 '떡볶이 논쟁'을 벌이는 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차가운 가슴으로 삶에 지쳐 움츠러든 가난한 서민들의 거친 손을 잡는 이유를 정말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의 부모와 자식이, 그들의 동료들이 바로 노동자들이라는 것을 진정 모르기에 그러는 것인가요. 그러면서 비정규직의 비참한 삶 운운하니 연민을 넘어 같은 인간이라는 점이 부끄럽기조차 합니다.


진정 중도이자 서민을 위한 정치세력임을 자임한다면, 위임받은 공적 권력으로서 행해야 할 최소한의 역할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아니 지금의 쌍용차 사태를 야기한 핵심당사자들이라는 점을 최소한 인정한다면 책임감을 가지고 즉각 문제해결에 나서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른바 '4대강 사업'에 수십 조 원을 들여 건설자본의 재생산을 돕고자 하는 마당에, 과거 상하이자동차에 2700억 원의 막대한 자금과 온갖 특혜를 주었던 마당에, 왜 공적자금 투여에 그렇게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것인가요. 알 수 없습니다. 올해 연말까지 구조조정을 마무리하겠다고 한 국정방침과 어긋나기에 그런 것이라면 그 생각이 무에 그리 중요한가요. 당신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쓰는 그 언술을 깨끗이 잊으셨나요. '정치는 살아 있는 생물이다'라는 그 말이요. 사회구성원들의 최소한의 삶과 존재를 부정하는 정치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반(反)인간, 따라서 반(反)정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말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최소한의 기대조차 부정하게 만드는 현실입니다. 그 것은 자신들의 책임과 역할에 민감하기보다 문제의 원인을 자꾸 타자에게 전가시키려는 권력의 오래된 습성 때문에 조성됩니다. 사익과 파당에 근거한 조중동과 같은 수구언론의 보도를 추종하며 쌍용자동차사태의 악화를 외부세력, '좌파'가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권력의 편협한 인식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물론 이러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요. 최근에는 용산사태에 대해서도 동일한 인식을 드러낸 바 있습니다. 그 누구도 그들의 고통과 아픔에 동조하여 함께 하지 않는다면 용산사태나 쌍용자동차 사태를 자본의 뜻에 따라 쉽게 처리하여 지금은 함포고복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니 답답한 것이겠지요. 안타깝지만 이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의 절박함을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지난 냉전시기를 지배한 반인간, 반정치의 찌꺼기입니다.

그렇다면 진정 '좌파'가 죄입니까. 이명박 정권이 돈 많고 힘 있는 자들의 편에 서서 권력을 행사하는 이른바 '강부자 정권'으로 계속 존재한다면, 그리하여 오직 경찰국가로 이 사회 전체를 끊임없는 전쟁터로 만든다면, 거기에 진보, 좌파가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요. 어떤 정치체제에서든 수탈, 억압, 배제, 차별당하는 이들의 존재와 삶을 옹호하며 자본과 권력의 부당한 행태를 비판하고 그것을 넘기 위해 노력하는 가장 민주주의적인 세력이 진보좌파라면, 어떻게 지금의 이 상황에 대해 나몰라할 수 있나요. 아니 진보좌파 이전에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산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어찌 이런 부당함을 그저 바라보고만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위임받은 권력임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공적 책임성을 느끼지 못하는, 말로만 중도를 외치는 정치세력들이나 할 수 있는 위선이지 진정한 진보좌파, 아니 양식 있는 사회구성원들이 할 수 있는 삶의 자세, 정치적 행태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그런 편협한 사고로부터 벗어날 때 자유로운 소통이 가능한 최소한의 공간이 마련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기화하지 못하는 공적 권력기관들의 존재는 문제해결에 그 어떤 의미 있는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적대적 긴장 만을 증폭시킬 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에는 여전히 양식 있는 많은 분들이 존재하기에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오늘의 쌍용차사태를 있게 한 그 정치세력들의 의미 있는 고민과 대책을 기대해 봅니다.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지금 이 순간 민주당 추미애 의원의 행동을 주의 깊게 바라봅니다. 왜냐구요. 그 까닭은 '비정규직보호법'이라는 악법을 제정한 과거 집권 자유주의정치세력의 일원인 그녀의 행위에 과거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의 의미가, 인간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성찰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환상의 짝꿍이 되어 그것을 통과시킨 한나라당과 지금의 집권 이명박정권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나요. 관련 상임위에서 비정규직법 3년 유예안을 몰래 상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모든 노동자의 비정규직화'라는, 이제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버린 그들 '자본의 당'의 목표를 다시 확인하며 절망합니다. 또한 그 모습을 보며 쌍용자동차에 경찰특공대를 동원하여 그 곳을 '제2의 용산'으로 만드는 것은 아닌가라는 소름 돋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도한 기우에 불과한 것인가요.

정치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를 자꾸 물거품으로 만들지 말기를 바랍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인간관계조차 갈기갈기 찢어 놓는 이 '더러운 전쟁들'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기를 기대해 봅니다. 아니 촉구합니다. 노동자들, 가난한 자들은 결코 누구의 노리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대중에게 어떤 아픔은 세월이 지나면 잊어지기도 하지만, 어떤 아픔은 한이 되고 분노가 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쌍용차 사태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이명박 정권의 정치적 행보를 지켜봅니다. 그 과정에서 그처럼 강조하는 중도실용의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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