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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업 거제시장, 김현철 목포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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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홍업 거제시장, 김현철 목포시장? [손호철 칼럼]양김의 화해와 지역통합을 생각한다
22년만의 때늦은 화해.

그렇다. 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두 기둥이었으며 '동지'였지만 87년 직선제 개헌과 함께 대통령자리를 놓고 '정적'으로 변했던 DJ와 YS,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화해를 했다고 한다.

열흘 전 김영삼 전 대통령이 DJ의 차남 김홍업 전 의원과 권노갑 전 의원, 한화갑 전 의원, 김상현 전 의원, 정대철 민주당 고문, 김옥두 전 의원 등 동교동계 인사 30여명을 초대했고 이 자리에 상도동계에서도 최형우 전 내무부장관, 김덕룡 대통령국민통합 특보, YS의 차남 김현철 여의도연구소 부소장 등 30여명이 참석해 두 진영이 화해를 했다고 언론은 전하고 있다. 답답하기만 한 세상에 오랜만에 '가뭄에 단 비'처럼 반갑기 짝이 없는 소식이다.

특히 YS는 이 자리에서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동지 여러분을 이렇게 만나게 되어 대단히 감개무량하다"며 두 진영의 투쟁 등으로 "이제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상당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나 우리 앞에는 아직도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다. 만연한 지역감정을 해소하고 국민을 통합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우리 민주화의 동지들이 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 기여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며 '국민통합'을 위해 다시 뜻을 모을 것을 주문했다니 때 늦었지만 반가운 일이다.

기왕 이렇게 화해를 할 것을, 김대중 전대통령이 살았을 때 두 지도자가 손을 잡고 화해를 하고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함께 발 벗고 나섰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어쨌든 YS의 제의에 대해 동교동계를 대표해선 권노갑 전 의원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시면서 남긴 역사적 화두는 용서와 화해, 화합이었다"며 "이제 우리 모두는 국민이 원하고 두 전 대통령이 원하는 동서화합을 이뤄야 한다"고 화답했다고 한다.
▲ 지난달 25일 오전 서울 동작동 국립현중원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에서 열린 故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00일 추모기도회에서 김홍업 전 의원이 김현철 여의도연구소 부소장과 만나 인사하고 있다. ⓒ뉴시스

이와 관련, 이 면의 "부마항쟁이 홀대받는 이유, PK의 정신분열?"에서 지적한 바 있듯이, 한국정치에 대해 가장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는 잘못된 통념이 있는데 그것은 한국현대사, 특히 70년대 이후 한국의 지역주의는 호남대 영남의 대결이었다는 생각이다.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1979년 10월에 일어난 부마항쟁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박정희 영남정권을 무너트린 것은 광주항쟁이 아니라 같은 영남인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부마항쟁이었다. 다시 말해, 90년 3당 통합 때까지만 해도 TK(대구 경북지역)와 PK(부산 경남지역)은 전혀 다른 정치세력이었다. PK는 야당적 성향에 'YS 요인'까지 더해져 70-80년대 호남과 함께 TK 군사정권(패권적 지역주의)에 대항하는 민주세력의 진지(저항적 지역주의)였다. 즉 PK는 TK가 아니라 호남과 동맹세력이었다.

이 점에서 87년 이전의 한국정치에서 지역주의는 독자적인 갈등구조로 자리 잡고 있지 않았고, 존재했더라도 기본적으로 민주대 반민주의 변형으로 호남과 PK의 연합 대 TK와 충청(육영수, 김종필 변수로 인한)의 대결이었다. 그러나 87년 양김의 분열과 함께 YS와 DJ,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뿐만이 아니라 PK와 호남이 '적'이 되고 말았다.

이 점에서 한국지역주의의 궁극적인 책임은 박정희와 전두환, 그리고 TK 군사독재세력에게 있지만 양김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 사실 이 점에서 뿐만이 아니라 87년 양김의 분열은 너무나 안타까운 한국현대사에게 몇 손에 꼽을만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그래서 개인적으로 87년 양김이 분열하지 않고 협력했더라면 한국현대사가 어떻게 다르게 전개됐을까를 그린 가상역사소설 [1987년]을 쓰려고 했었다).

첫째, 87년 양김의 분열로 결국 노태우가 당선됐고 문민화, 민주화는 5년 늦어졌다. 둘째, 양김이 손을 잡고 군사독재의 잔재들을 청산했어야 하는데 이후 한국정치는 그것이 아니라 양김 중 한 김이 군사독재와 손을 잡고(3당 통합과 DJP) 다른 한 김을 죽이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그 결과 JP와 같은 군사독재세력이 계속 살아남고 캐스팅보드를 쥐도록 만들었다. 세 번째, 가장 심각한 폐해로 민주대 반민주의 구도로 치러졌을 선거가 지역주의대결로 나아갔고 지역주의를 전면화시켰다. 그리고 동지였던 호남과 PK가 적으로 변했다.

네 번째, 민주화운동이 분열되어 이 같은 분열과 적대가 대물림하게 됐다. 이부영 등의 동지는 김근태가 아니라 정형근으로, 김근태의 동지는 이부영이 아니라 또 다른 안기부맨으로 DJ쪽으로 온 엄삼탁이 되고 말았다. 다섯째, 국민들의 허무주의를 가져왔다. 87년 6월항쟁에 대구도, 부산도, 광주도, 정도의 차이만이 있었을 뿐 큰 틀의 민심은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국민들이 직접 거리로 뛰어나와 만들어준 직선제를 양김의 분열로 노태우에게 헌납하는 것을 보고 국민들은 허무주의에 빠졌고 지역주의의 포로로 변해버렸다.

사실 87년 양김의 분열이 없었다면 냉전적 보수세력의 성지 영남지역주의에 기반한 거대여당 한나라당은 현재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또 영남민주세력으로 지역주의에 벽에 부단히 부딪쳐야 했던 노무현의 비극도, 친노 대 반노의 분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고 뒤늦었지만 두 진영이 화해를 하고 지역주의 극복과 국민통합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니 너무도 반가운 일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제 지역주의가 이미 너무도 깊이 착근이 되어 양김과 두 진영이 화해를 하고 지역주의 극복을 함께 설득하고 나선다고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또 두 진영이 87년 이후 걸어온 전혀 다른 역사성으로 인해 현재 정치적 입장에서 너무도 차이가 많다는 점이다. 즉 양진영이 과거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걸며 싸웠던 초심으로 돌아가 이명박 정부의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에 대해 우려를 함께 표시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중단을 촉구하고 나설 수 있는 처지가 전혀 아니다. YS와 상도동계는 오히려 MB정부의 정책을 기본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이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영남, 특히 PK 지역에 YS가 갖고 있는 상징적인 힘과 호남지역에 DJ가 갖고 있는 힘을 고려할 때, 작으나마 이들의 화해가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노력으로 승화되기를 기대해 본다. 개인적으로 낡은 계파정치, 밀실공천의 폐해를 너무도 잘 알고 있고, 이를 일관되게 비판해 왔다. 그러나 지역주의의 폐해가 너무도 크기에, 문득 엉뚱한 상상을 해보게 된다.

이번 화해를 계기로 김홍업 전 의원을 한나라당의 거제시장후보로 공천해 거제시장을 만들고, 김현철 부소장을 민주당의 목포시장후보로 공천해 목포시장으로 만들어 영남주민들과 호남주민들과 함께 호흡하고 고뇌하도록 만들면 어떨까? 김홍업 거제시장, 김현철 목포시장, 그리고 거제에서 아들을 돕는 이희호 여사와 목포에서 아들을 돕는 YS와 손명숙 여사, 실험해볼 만한 '아름다운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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