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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현실을 인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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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선생님, 현실을 인정하세요" [김명신의 '카르페디엠'] 수능 점수 발표 다음날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이 전국의 응시생들에게 전달되었다. 모두 한탄 반, 절망 반. 대학 입시 원서를 내보기도 전에 미리부터 재수행을 택하는 학생들도 주변에 여럿이다. 아는 고3 담임교사는 수능 성적표를 나눠줬는데 학생들이 받자마자 뿔뿔이 교실을 나가 결국 3분의 1이 남아 마지막 종례도 못했다며 한탄을 했다. 교실에 남은 학생들은 '현실을 인정하라'며 담임교사를 다독였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 어떤 학생을 키우는 것일까?

조간신문에 나온 수능 점수대별 응시 가능 대학의 명단과 점수를 보니 1~2점 차로 유명 대학이 갈린다. 수능 점수 1~2점이 무슨 큰 차이라고 대학이 달라지고 전공 과목이 달라지는 것일까? 더구나 지금 대학 배치표에는 부산대학교 정도가 예외일 뿐 서울대·연세대·고려대를 정점으로 'in 서울',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 두 시간 거리 등 통학 거리를 기준으로 대학 서열이 재편되었다고 한다. 배치표상 서열이란 것이 편의적이고 허망한데도 학생들에게는 위력이 있다. 더구나 한 반 40명 가까운 학생 중 5명 만 'in서울'을 한다니 수험생이 정상이면 도리어 이상한 것이다. 그러니 실수로 문제 몇 개 틀려 원하는 점수를 못받은 경우 망설임없이 재수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 2010학년도 수능성적표가 수험생에게 배부된 8일 오전 경남 마산시 마산여고에서 한 수험생이 성적표를 확인하고 있다. ⓒ뉴시스
교사들 말로는 한 반 40명 중 내신 성적 1등이나 7등을 비교할 때 1등은 1년 내내 1등이고 7등은 1년 내내 7등이라고 한다. 개인차가 있기는 하겠지만 1등과 7등 사이에 성품이 다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 창의성은 도리어 7등인 학생이 나을 때도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런데도 지금의 점수 경쟁은 고3 아이들의 목숨 줄을 잡고 흔들고 있고 배치표는 절대적이다. 수험생 엄마들은 "수능 성적이 발표된 후 아이가 옥상으로 갈까봐 마음을 졸인다"고 말한다. 아이들 성적과 사교육비를 걱정하느라 일부 엄마들 인생은 실종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고 수험생 눈치만 살피고 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아이들을 키우는 것일까?

'아이살리기운동본부'의 2006년 조사에 따르면 최근 3년 내에 '죽는 것만이 문제의 해결'이라 생각할 만큼 심각한 고민을 한 경우가 초·중학생 17.7%, 고등학생 21.7%라고 한다. 국내 10대 사망원인 가운데 자살이 2위를 차지하고 과도한 경쟁과 입시 지옥으로 10만 명 중 7~8명이 자살하여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십대 자살률을 보이고 있다. 우울증도 심각하다. 몇 년 전에는 한 초등학생이 학원을 전전하다가 지쳐서 '물고기처럼 자유롭고 싶다'며 자살을 하였다. 이러한 아비규환이 정상인가?

며칠 전 서울시청소년육성위원회 위촉식에 모인 20여 명의 위원 가운데에서는 입시 경쟁에 찌든 어린이에 대한 걱정, 스펙 경쟁에 나섰지만 미래가 오직 공포인 청년들에 대한 우려가 쏟아져 위촉식이 정해진 시간을 넘겼다. 한 위원은 "요즘 초등학생이 즐겨 하는 놀이 중에 강아지를 냉장고에 3분 넣어두고 냉장고 문을 열어 반응을 살피고 보살피고 1분 더 연장해 냉장고에 4분 넣어 두고 반응을 살피고 보살펴주는 게 있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 모인 위원들 중 일부는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나 같은 사람은 할 말을 잃었다. 입시스트레스를 겪는 3대 정신적 질병도 심각하여 초등학생은 ADHD(과잉행동장애), 중학생은 게임중독증, 고등학생은 우울증이 발생하고 있다. 아이가 어리다고 무조건 학원으로 돌리고, 내 아이의 경쟁심을 살살 부추기는 부모인 우리가 지금 제 정신인가?

서울의 고교선택제가 시행되면서 얼핏 보면 선택권이 늘어난 것 같지만 실상은 모두가 경쟁에 쫒기고 있고 공부 못하는 애들은 폭탄 돌리기처럼 구박덩이가 되어가고 있다. 공부못하는 학생은 일명 '반 평균 깎아먹는 학생'이라며 작은 잘못에도 퇴학이나 전학 중 택일하라고 강요받는다. 학교선택제, 학교 정보공개에 따른 고교 교장들의 고육책이지만 다들 불행해한다. 이 학생들은 이웃 고등학교로 전학가는데 거기서도 환영을 받지 못해 '폭탄'으로 불리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서열화에 가차없다. 고교 서열화, 중학교 서열화도 목전에 있다. 보험금 받아 강남에 살고 싶다며 부모를 살인한 사건도 생겼으니 앞으로는 부모 서열화도 없진 않을 것이다.

얼마 전 사법고시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젠 예외없이 강남 지역 고등학교에도 사시 합격선배 현수막이 걸린다. 창의력이 존중되는 글로벌 시대이자 사시 합격생 1000명 시대, 사시 합격이 무슨 자랑거리인가? 대학생들이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사법고시 아니면 공무원시험에 매달리는데 무슨 국가 발전이 있고 산업 발전이 있는가? 몇급 공무원 시험을 보느냐에 따라 청년들 인생이 서열화될 지경이다. 미래에 시인이 될 젊은이들이 광고회사에 목을 맨다.

주변 고3 학부모는 이명박 정부가 교육 부문에서 성공한 것이 오직 한 가지가 있다면 '경쟁 이데올로기를 내면화시킨 것'이라며 단언했다. 그 결과 서열 의식도 당연히 싹트고 학생들이 수없이 치르는 시험 성적을 통해 잘난 놈은 우대하고 못난 놈은 차별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힘이고 뭐고 간에 '성적이 안 좋은 나는 비정규직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전엔 학교의 우등생이 사회의 열등생이라면 인생 한판 뒤집기도 가능했는데 이젠 성적서열이 인생서열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어린 학생들이 성적에 따라 사람값이 달라지고 차별이 정당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국가로서는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명박 정부는 선거 기간에는 '돈'을 세상의 모든 가치로 만들어 놓더니 대통령이 되고서부터는 '경쟁'을 어린 학생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시장과 학부모들이 강력 결합하여 교육의 왜곡과 파행을 만들어내는 이 시대에 어떤 교육운동이 효력을 발휘할지 참 걱정스러운 일이다. 아이들은 잘못된 입시교육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하고 서열로부터도 자유로워야한다.

수험생 부모들도 할말이 많겠지만 대학입시에 대해서는 급한 대로 다음과 같은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우선 수능 시험을 2회 이상 봐야한다. 내신에 필요한 교육과정은 국가가 정한 교육목표를 바탕으로 각 교사가 재량껏 만들어 사용하는 대신 수능시험은 문제은행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대학 입시에 제출하는 수능 점수는 평균 점수로 하거나 수험생이 최고인 점수를 제출하게 하자.

둘째, '뷔페식 대학 입시'를 고쳐나가야 한다. 수능과 내신과 대학별 고사, 더 나아가 수험생들의 스트레스를 주는 입학사정관, 부모의 정보력까지 뒤범벅이 된 대학 입시는 더 이상 안된다. 요새는 뷔페식 식사(모든 음식을 다 먹을 수 있는데 다 먹으면 체중조절이 필수인 최악의 식사 중 하나)를 마다하고 단일 메뉴를 선호하는 미식가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대학입시도 그렇게 한 접시에 범벅하지 말고 한 아이의 한 가지 능력(시험 점수이든, 잠재력이든, 내신 성적이든)을 보는 간결한 제도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국·공립대 네트워크와 교육 경쟁을 하는 대학 만들기, 대학 서열 깨기는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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