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막장' 10대들보다 더 무서운 것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막장' 10대들보다 더 무서운 것은… [홍성태의 '세상 읽기'] 학생 인권 조례를 위하여
2010년 2월 10일 경기도 교육청이 의뢰한 '경기도 학생 인권 조례 결과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경기도 학생 인권 조례 자문위원회는 많은 회의와 여러 논란 끝에 모두 5개 절의 49개 조로 이루어진 '경기도 학생 인권 조례 최종안'을 마련해서 경기도 교육청에 제출했다.

조례는 법이다. 오래 전부터 대표적인 인권의 사각지대로 여겨졌던 학생의 인권이 법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는 길이 크게 열렸다는 점에서 경기도 학생 인권 조례안은 무엇보다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아무쪼록 이 안이 경기도 의회에서 통과되어 이 나라의 학생들이 인간으로서 기본권을 보장받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마침 경기도 학생 인권 조례안이 발표될 즈음에 이 나라의 학생들이 얼마나 무서운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경기도에서 또 발생했다. 이른바 '막장 졸업식 뒤풀이'가 그것이다. 10여 명의 남녀 학생들이 옷을 홀랑 벗은 채로 피라미드를 쌓고 담장 앞에 모여 서서 사진을 찍는 등의 모습이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었던 것이다.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는 황당한 범죄적 상황을 찍은 사진들이 졸업식 뒤풀이 모습이라며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었으니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은 당연했다. 경찰은 수사를 통해 몇몇 선배 학생들이 이 같은 짓을 강제했다는 사실과 그들이 예전부터 금품을 갈취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사실 경기도의 '막장 졸업식 뒤풀이'에 며칠 앞서 서울에서 '막장 졸업식 뒤풀이'의 문제가 밝혀졌다. 한 주택가 골목에서 10여 명의 남녀 학생들이 한 명의 여학생을 둘러싸고는 강제로 옷을 홀랑 벗기고 머리에 토마토케첩을 뿌리는 노골적인 폭력의 현장이 어떤 시민에 의해 생생히 촬영되었다. 이 동영상이 인터넷과 방송을 통해 공개되면서 시민들의 우려와 분노는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학교 폭력에 대해 나름대로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시민들도 이 동영상을 보고는 새삼 혀를 차고 속을 끓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 우리 학생들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인지 그야말로 모든 시민들이 아연하고 말았다. 서울과 경기도를 넘어서 전국에서 우리 학생들의 인권은 과연 어떤 상황에 있는가?

▲ 경기도 고양 지역의 한 중학교 졸업식에서 남·녀 학생들이 전라의 모습으로 뒤풀이를 하는 사진 20여 장이 13일 오전 인터넷 사이트에 유포되면서 파문이 일고 있다. ⓒ뉴시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예전에는 '막장 졸업식 뒤풀이'는 없었지만 그 원천으로 지목되고 있는 학교 폭력은 예전에도 역시 심각했다. 나는 국민학교 때 이미 슬리퍼로 따귀 때리기와 몽둥이로 발바닥 때리기를 경험했고, 중학교에서는 펜치로 꼬집기, 원산 폭격, 원산 철교 등의 폭력을 겪었으며, 고등학교에서도 따귀 때리기, 손바닥과 허벅지 때리기 등의 다양한 폭력을 겪었다.

해월 최시형 선생이 어린이를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이 벌써 100년도 훨씬 전의 일이건만 여전히 애들은 맞으면서 크는 법이라며 마구 폭력을 휘두르는 어른들이 있다. 심지어 자신의 화를 가눌 줄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학생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자기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교사들도 있다.

워낙에 폭력이 횡행하다 보니 이 나라에서는 학교는 감옥이요 학생은 죄수로 여겨지기도 한다. 물론 <400번의 구타>와 같은 영화를 보면 '똘레랑스'를 자랑하는 프랑스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여기의 상황이 아무래도 훨씬 심각할 것이다.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학생들의 인권은 강력히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최소한의 내용을 담고 있는 학생 인권 조례안조차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폭력의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잘 모르는 것 같다. 폭력 자체가 문화로 정착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태어나서 교육받고 살아가다 보니 폭력의 문화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폭력의 문화를 육성하고 유포하는 데 학교가 큰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다. 한국의 학교에서 학생들은 '이중의 폭력' 속에서 살아간다. 하나는 교사의 폭력이고, 다른 하나는 학생의 폭력이다. 교사들은 보통 손바닥 때리기로부터 시작해서 실로 다종다양한 구타의 방식을 가르쳐주고, 무릎 꿇고 손들기부터 시작해서 더욱 더 다종다양한 기합의 방식을 가르쳐준다.

국민학교 6년과 중·고등학교 6년의 12년 동안 내가 보고 겪은 구타와 기합에 관한 이야기로도 아마 책 한 권은 쓰고도 남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폭력의 전문가가 되는 학생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10대는 쉽게 폭력적으로 될 수 있는 때이다.

그런데 사실 직접적인 구타와 기합만이 폭력은 아니다. 다양한 차별적이고 희롱적인 언사들도 명백한 폭력이다. 우리의 학교는 언어 폭력의 면에서도 극히 뛰어나다. 그리고 따돌리기와 결합된 언어 폭력은 직접적인 구타와 기합보다 더 끔찍한 결과를 빚기도 한다. 그렇기는 해도 따돌리기나 언어 폭력은 일반적인 구타와 기합만큼 공식적으로는 용인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폭력으로 인지하는 것들은 공식적으로는 대체로 거부되는 것이며 우연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와 달리 공식적으로 거부되지 않으며 필연적인 것으로 제시되는 폭력도 있다. 두발과 복장에 대한 규제, 소지품 검사,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규제가 그것이다.

학생들은 특히 두발에 민감하다. 나도 30년 전인 중3 때 겨울방학을 앞두고 당시 선도교사로 활약이 대단하던 영어 교사에 의해 앞머리에 '고속도로'가 뚫리는 모진 경험을 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니 이발을 잠시 미뤘던 것인데 그 교사는 내 머리에 바리캉을 들이대고 처참한 몰골을 만들어 버렸다. 나는 지금이라도 그 교사에게서 이에 대해 사과를 받고 싶다.

고등학교 때도 밑창을 흰색 고무로 두른 검은색 운동화를 신었다고 벌을 받은 적이 있다.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두발과 복장, 소지품 검사,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규제는 그 자체로 반교육적일 뿐이다. 내가 알기에 그 뿌리는 사소한 규율들을 끝없이 강제해서 병사들을 '순응하는 주체'로 만들고자 했던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규율 방식에 있다.

우리의 학교에서 학생들은 '이중의 폭력'이 아니라 '삼중의 폭력' 또는 '사중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그야말로 '새벽별 보기 운동'의 수준에 이르러 있는 학벌 경쟁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제도적 폭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태에 대해 학생들이 자유롭게 저항하는 것은 고사하고 발언하는 것조차 강력히 규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규삼의 <정글고>에 학생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자유를 원하는 학생들에게 억압을 강요하는 학교의 문제를 <정글고>는 유쾌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나아가 <정글고>는 학교가 학생들에게 억압을 강요하는 것이 결코 학생을 위해서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마저 절절하게 보여준다. 그 제목 자체가 얼마나 사실적인가?

몇 해 전에 강의석이 생생히 증명했듯이, 헌법으로 보장된 종교의 자유라는 근원적인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도 목숨을 걸고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우리의 학교에서 볼 수 있는 처절한 현실이니 이런저런 폭력들은 그저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10대는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가장 발랄한 때이다. 10대들이 이 시기를 '보호'의 명목으로 각종 규제 속에서 보내게 하는 것은 10대의 발전을 억압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폭력에 순응하며 폭력을 활용하는 주체로 만드는 것이다. 10대들이 정말 이 나라의 미래로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 무엇보다 지독한 학벌경쟁 폭력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다양한 폭력에서 벗어나서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서 자유롭게 살도록 해야 한다.

경기도 학생 인권 조례안은 이 나라의 발전을 위한 중요한 새로운 출발이다. 아무쪼록 폭넓은 토론이 이루어져서 훌륭한 조례로 제정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성과가 경기도에 머물지 않고 전국으로 퍼져나가 '정글고'의 상태에 있는 이 나라의 학교와 교육이 크게 개선되기를 바란다. 학생을 당연한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아니라 단순한 '보호'의 대상으로 보는 '보호 이데올로기'의 문제도 이참에 전면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란다. '보호 이데올로기'는 학생을 위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학교와 국가를 위하는 논리의 문제를 안고 있다. 학생들은 꿰뚫어 보고 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원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