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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손'이 사라진 '난개발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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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손'이 사라진 '난개발의 거리' [여기가 용산이다④] 종려나무 아래
칼국수 끓이는 종려

홍대 입구 근처, 종려 언니 가게에 들른 날은 눈이 내렸다. 나랑 비슷한 정도로 체구가 작고 여윈 언니는 철거 한 달이 되어가는 데도 여전히 맑고 무심한 눈빛이었다. 가게는 이전에 식당이었다는 흔적 느낄 수 없을 만치 집기가 들려나간 채 스티로폼 깐 전기 장판과 자가 발전 덕에 그나마 온기를 유지해주는 붉은 온열기가 두어 대 놓여있었다.

몇 번 명령을 받았으나 엄동설한 차마 박살나지 못한 유리창, 밖으로 측은지심으로 눈이 내렸다. 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들과 억울한 자들이 남몰래 흘린 눈물일지 모르지. 저리 눈발을 눕게도 하고 세우게도 하는 바람은 맘 편히 세 끼 숟가락을 들기엔 너무 지나한 갈기갈기 찢긴 영혼들의 머리카락인지도.

10년도 더 된 어느 해 인천에서 종려 언니가 끓여준 안주 라면으로 소주를 마신 밤이 있었다. 술들을 거나하게 걸치고 한밤중 떼거지로 들이닥쳤는데도 대책 없는 행려자들을 언니는 웃는 얼굴로 맞이하고 곧이어 조용조용 안주를 만들고 차를 끓여주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것 같다.

그때 언니가 끓여준 라면 맛만은 뇌리에 아직 박혀있다. 맞춤하게 익은 김치 송송 썰고 한 소큼 끓이다 사리 집어넣은 냄비 라면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 거기가 지하실 셋방이었나. 종려 언니는 어디 찜질방에 일 나간다고 했던가. 청소도 하고 작은 구내식당에서 일한다 했던가.

기이하게도 그 여자 이름은 안종려. 제 몸보다 실하고 묵직한 열매를 낳는 종려나무는 이파리마다 손이다. 손이 심장이고 칼국수고 라면이고 일용할 양식이다. 종려는 천 잎의 부채 살 같은 손을 펴 라면을 낳고 칼칼한 칼국수를 뽑는다.

ⓒ프레시안(최형락)

그 거룩한 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느새 눈발은 더 거세지고 소주병은 계속 넘어진다. 농성장이라기엔 너무 외롭고 초라한 두리반. 어느새 술상도 없는 신문쪼가리 위, 보글보글 라면이 놓이고 둥그렇게 둘러앉아 있다. 평당 8000만 원짜리 비싼 땅위에서 김치 라면을 먹는다. 우리가 앉아 있는 왼쪽 오른쪽 꽃가게와 신발가게와 사람들이 들고 났을 학원 자리는 옛 흔적 찾아볼 길 없고, 공항으로 가는 경전철 공사가 진행 중인 몇 비터 밖에는 차가 지나갈 때마다 쇠판이 덜컹거린다.

작은 것들이 다 매장당하는 이 황량한 메트로폴리스 한가운데선 굉음도 안주다. 아침부터 밤까지 밀고 닦고 끓이고 대접한 손, 으로 마련한 1억 원 넘는 권리금은 눈발처럼 공중에 흩어지고 수많은 발길에 채여 더렵혀지고 있다. 지구 단위 개발 지역으로 선정되었다고, 경전철이 지나간다고, 800만 원 하던 땅이 8000만 원으로 치솟은 우리의 계산법으론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땅.

거룩한 크리스마스 날 거대자본 거룩한 힘에 고용당한 한 손들이 닥치고 겁주고 부수고 들어내고 마침내 쫒아내며 던져 준 이사 비용 300만 원 100만 원 70만 원. 그 돈 들고 세입자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할까. 벼룩의 간들을 빼어 거미의 입에 털어 넣는 쪽에 손을 들어 준, 임대차보호법은 과연 법이기나 한 걸까. 그런데 그 많은 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침마다 화분을 밖에 내어 햇빛을 쪼여주고 물을 주던 손들은 어디 갔을까. 날마다 수천 수백의 신발을 벗겨 새 신발 신겨보던 그 바지런한 손들은 지금 무얼 할까. 붉고 푸른 꽃들을 누군가의 손에 들려줄 권리를 얻기 위해 열나게 은행 문턱을 넘나들었을 대출금은 무엇으로 갚을까. 살던 집 빼서 월세로 이사하고 지하방 얻고 남은 몇 푼으로 마실 소주를 다 마신 다음, 그러고도 남은 한숨 있어 마저 내쉰 다음, 두드릴 만큼 방바닥 두드리고 칠 만큼 벽을 다 친 다음, 그러고도 기력이 남아 있다면, 목숨이 붙어 있다면, 누가 마신 건지 기억할 수조차 없는 방안 빼곡히 가득 찬 소주병 비닐 봉지에 차곡차곡 담고 난 후에도 목숨 붙어 있어 배가 고파온다면, 비틀비틀 일어나 재개발이 영영 안 될 듯 보이는 성 허름한, 하지만 빚 갚을 가능성이 있을 만큼은 발길이 오가는 길목 두리번거리며 변두리로 변두리로 허정허정 발길을 돌리고 있을까.

쥐라기 공원 같은 굉음 속 마천루 사이를 걷는다. 거대한 건물에 연루된, 누군가에게 손수 끓이고 만지고 닦아 대접해 본 적 거의 없는 거대 공룡과 그 하수인들과 서류 뭉치 속으로 독식되어가는 난개발의 거리. 오십년 가까이 살고도 도대체 익숙해지지 않는 이 세상에 아직도 불빛 반짝이는 쇼윈도가 있고, 몸으로 쌓아올린 거룩한 손들이 불안하게 움직이고 있다. 미래를 저축하지 못한 바지런한 손들이 해소 기침하며 축농증으로 냄새나는 콧물 흘리며 저기 저 골목 어딘가 지하에 숨 쉬고 있으리.

개발과 진보와 더 잘살자는 구호 아래, 거리마다 골목마다 강이고 산이고 파헤치고 메우고 새것으로 갈아치우리. 속병 난 땅과 물이 용트림하고 불을 내뿜으리. 거덜 난 보금자리에서 쫓겨난 버들치와 가재와 피라미들이여. 구호는 고사하고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는 그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여. 오늘 그대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심장이 자꾸 팔딱거린다. 세상이 너무 많이 아픈가. 자꾸 헛것이 보인다.

종려나무 아래 새겨진 문양들

스티로폼과 전기 장판 위에서
내일을 저축하지 못한 채 이미 철거된 허기들이
침낭을 덮고 소주를 마신다
아직도 흘려야 할 눈물이 남아 눈은 내리고
어느새 웃음을 가득 매단 종려나무 손바닥 하나가 사뿐히 내려 앉는다
부채살 같은 까끌한 손
간이 가스레인지 위로 종려 이파리 같은 칼국수가 끓는다

엘리베이터 고치다 나온 만이도 한 점 먹다 가고
먹어도 먹어도 늘 배고픈 진이도 두어 그릇 퍼먹다 가고
고시원에서 옹송거리고 자는 노가다 용이도 퍼질러 앉아
막걸리 사발 들이붓다 대자로 누워 코 골다 가고
병 깊어서도 아픈 자리 찾아다니며 늘 미안해하는 옥이언니도
텅 빈 공간 어루만지다 울컥 돌아가고
저 너머엔 있을까
언덕 너머 은빛물결도 사뿐히 한 젓가락 헤젓다 가고
단단한 금빛 위에 우주를 세공하는 숙이 언니도 희야도 숨 고르다 가고

아무리 사랑해도 돌아서면 사랑할 건더기가 남아 있지 않느냐
내동댕이쳐진 짚신짝도 구멍난 망건도 후루룩 적시다 가고

바람은 사방에서 불고
바람이 뒤집은 천 잎의 거룩한 손들이 지글지글 따스한 해를 굽는다
그 그늘 아래
잠시 울다 간 자리마다 멍석 같은 문양이 새겨지고
둥그런 밥상 위 손 놓친 젓가락들만
덜그덕 덜그덕 장단을 맞추고

-'종려나무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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