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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꾼과의 한판 싸움…여기서부터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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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꾼과의 한판 싸움…여기서부터 시작하자! [여기가 용산이다] 한 소설가의 생존권 싸움에 부쳐
그렇다. 인간의 눈은 많은 것을 본다. 때로는 보지 못할 것을 보기도 하고 때로는 정말 봐야 할 것만 보기도 한다.

1년 전 어느 날, 한 장의 사진을 보았다. 한 사내가 남일당 옥상 난간에 매달려 있었다. 그의 앞에는 거대한 불길이 일고 있었다. 그 뜨거움, 강렬한 불꽃과 타는 냄새, 사내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난간에 매달려 있었다. 그에게서 작은 흔들림이 느껴졌다. 극히 짧은 순간, 초집적화된 개념, 저 깊은, 인간의 혈관을 헤집고 들어가 심장에서 시작된 비통한 떨림.

사람, 그것은 사람의 소리였다. "여기 사람이 있다!" 모든 인간이 사람이 있다고 아우성치는, 눈이 달린 그 모든 이들이 아슬아슬 매달려 있는 사람을 지켜보고 있건만 돈에 눈 뒤집힌 자들은 다른 것으로 보았단 말인가!

그래, 저들은 분명히 눈으로 사람을 보고 뇌로는 다른 멋진 것을 보았음에 틀림없다. 눈에 보이는 대로 뇌에 박혔다면 다르게 행동했을 테지. 그럼 뭘 봤을까? 도대체 뭘 봤을까? 다르게 듣고 다르게 냄새 맡고 다르게 판단하는, 그 같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면 그들은 내게서 또 무엇을 보았을까? 굳이 "여기 사람이 있다!"고 말해야 하는 처연한, 처절한, 처참한 절규의 상황이 또다시 초래되는 것은 아닐까.

"아, 여기 사람이, 사람이 있단 말이다, 사람이!"

세상을 이끄는 흡입력이 너무 강하여 미친 듯이 끌려가는 나 자신을 볼 때가 있다. 그 휘황한 빛이 너무 강해 눈이 멀어버리곤 한다. 홀린 듯 쓸리는 나 자신을 보며 그 힘이 막강하여 그 중심에는 누가, 어떤 힘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죽음을 불사하지 않으면 그 늪은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다. 다수는 그 힘에 휩쓸려 들어가고 더러는 버텨보느라 어깨를 기울인 채 무모해 보이는 싸움을 한다.

▲ "아, 여기 사람이, 사람이 있단 말이다, 사람이!" ⓒ뉴시스

지금 이 순간, 홍익대학교 앞 '작은 용산' 두리반에는 강제 철거에 맞선 소설가 유채림이 있다. 그에게는 아들 둘이 있다. 둘째는 이제 고3이 됐다. 고3 엄마는 천하없어도 건들지 않는 법인데, 유채림은 지금 그의 아내와 둘이서 강제 철거에 맞서 생활하고 있다. 고3 엄마가 고3 아들과 떨어져 살며 전화로 밥을 챙기고, 전화로 등교시키고 있다.

그 고3 엄마는 2009년 12월 24일까지 장사했던 두리반 안에서 스티로폼 위에 누운 채 한국토지신탁의 용역들에 맞서 밤새 뜬눈으로 누워 있다. 소설가 유채림은 불 꺼진 어둠 속 탁자 앞에서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망연히 밤의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등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 잠을 청할 때면 농성장의 유채림 얼굴이 그려지는 것이고, 어느 틈엔가 그가 내 곁에 앉아 있는 기분이 되곤 한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눈을 슴벅거리며 많은 것을 느끼고 많은 것을 바라본다. 소설 속 주인공으로서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불침번을 선다면서 두리반을 찾은 나는 귤을 까먹으며 유리문 밖 복공판 위를 달리는 차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유채림은 잔뜩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쓰고 있다. 내가 머릿속 잡념을 털어내느라 이 글을 쓰고 있는 반면, 그는 가족이 길바닥에 나앉느냐마느냐 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무언가를 쓰고 있다.

같은 시간, 시행사인 한국토지신탁의 용역들 또한 강제 철거에 맞선 두리반의 농성자들을 들어낼 궁리로 골머리를 썩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 때가 되면 인력을 투입하고 장비를 동원하기만 하면 소설가의 생계 터전쯤 흔적도 없이 깔아뭉갤 수 있을 거라고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참으로 야비하고 처참한 생존을 짓뭉개는 폭력에 맞설 방법은 있는가. 이 밤 유채림은 오직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쓰고 있을 뿐이다. 글로 싸운다는 것이 달걀로 바위치기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전혀 불가능해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강제 철거에 맞선 이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본다. 비록 폭력에 맞서기엔 무력하기 짝이 없어보일지라도 펜의 힘은 질긴 데에 있지 않는가. 합법을 가장한 한국토지신탁의 파렴치한 폭력 앞에 생존이라는 절체절명의 문제를 두고 쉽게 무릎 꿇을 수야 없는 일 아닌가.

노동 없는 투기놀음으로 이 땅을 황폐화시키는 투기꾼들에게 힘은 정직한 노동에서 나오고, 힘은 더불어 사는 도덕성에서 나옴을 끝내 보여줘야 할 게 아닌가. 결국 펜이 그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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