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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삼성 불매 운동을 지지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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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삼성 불매 운동을 지지하는 이유" [삼성을 생각한다] "지금은 실천이 필요한 때"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가 다양한 논란을 낳고 있다. 주요 언론은 삼성 관련 칼럼 게재를 거부하는가 하면, 심지어 김 변호사의 책 광고까지 거부했다.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삼성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1등 기업 삼성은 왜 공포의 대상이 됐을까. <프레시안>은 독자들로부터 삼성에 관한 다양한 생각을 듣는 기획을 마련했다. <삼성을 생각한다> 독후감을 포함해, 삼성과 이건희 전 회장이 우리 사회에 남긴 숙제에 관한 내용이라면 누구의 글이건 소개할 계획이다. 독자들이 삼성을 생각하는 글은, 이 메일 주소[email protected]로 보내면 된다. <편집자>

'보이지 않는 손'은 중상주의를 은폐하기 위한 도구다

고전주의 경제학이 시장 자유를 '보이지 않는 손'으로 감추고자 한 것은 공적인 국가와 사적인 자본의 결탁이었다. 중상주의가 시장경제의 옷으로 변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소수의 대 자본가와 근친 교배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시장 경제가 자유로운 것은 국가의 간섭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시장의 자유로운 교배에 의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본이 이익을 따라 탐욕의 이전투구가 벌어지는 영역을 시민사회로 국가는 그 이권의 충돌을 조절하는 영역으로 파악한 것은 헤겔이다. 헤겔은 자본과 국가의 결탁을 방지하기 위해 국가와 자본의 구분을 명확히 했다.

그런데 당시 독일의 자본은 후진상태였다. 따라서 독일이 선진 영국을 추월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중심으로 일체화되어야 했다. 영국은 선진 산업기술과 자본의 확충을 우위로 해서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경쟁 우위를 확보한 영국의 입장에서는 상대국이 보호무역이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따라서 국가의 간섭을 배제하는 자유 시장 경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절대군주제로는 급변하는 자본주의 에 대응할 수 없다는 신흥 자본가들의 분출하는 욕망의 산물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즉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라는 경제주의(자본)와 민주주의라는 정치의 근친교배는 이렇게 해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는 정치 영역의 보이지 않는 개입에 의해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국가 개입이고 국가의 보호 없이는 자본의 보호는 없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프랑스 대혁명 때 자코뱅파의 로베스피에르는 절대주의 옹호자들을 처형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반대파들의 주장에 그들을 살려 두는 것은 혁명 없는 혁명을 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을 상기시키는 대목이기도 하다.

경제주의와 민주주의의 모순적 결합, 신자유주의와 정치의 실종

경제주의와 민주주의의 모순적 결합이 전화된 것이 신자유주의라는 전지구적 자본주의다. 자본이 목적론적 발전으로 이행한다는 이른바 선조적(線條的)인 일직선적 시간관의 영미식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라는 공적인 영역을 사적인 경제와 일체화한다는 점에서 헤겔의 '구체적 보편성' 을 예화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라는 보편성이 자유라는 경제주의와 교차배어적으로 동거해야 하는 자기 지시적 부정의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결합은 민주주의에 대한 퇴행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경제의 사적 영역이 정치의 공적 영역에 의해 통제했던 민주주의의 원리를 배반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결과는 민주주의가 경제주의와 결합됨으로써 민주주의가 정치 영역의 상실로 이어졌다. 이것은 자유시장경제가 그 기원에서부터 이미 사적인 영역에서만 작동한다는 것이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에 가중된 힘을 빼내서 온전한 정치를 살려내는 것이 관건이다. 문제는 민주주의 자체에 있다. 이는 곧 자유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가 시장자유라는 경제주의로 축소된 데서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를 구출하느냐 하는 문제다. 이를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대기업의 전횡을 반(反)자본주의라고 하는 비판만 하면 민주주의가 작동한다는 생각을 갖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천하지 않고 독점적 횡포를 일삼는 대기업의 활동이 반자본주의라는 축소된 정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자본과 국가가 결탁하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자본과 국가의 결탁이 반자본주의라는 담론 투쟁으로만 제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말싸움에서 이긴다고 해서 반자본주의를 악용하는 대기업과 축소된 정치를 제거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경제주의와 민주주의의 모순이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불매운동이다.

민주주의는 실천에서 비롯된다

국민은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시장의 경제 영역에서는 소비자이고 민주주의라는 정치 영역에서는 주권자로서 유권자다. 경제와 정치가 분리불가능하게 일체화됨으로써 대기업이 민주적 가치라는 공적 영역에 심각한 훼손을 가할 때 그러한 무소불위의 경제 권력으로 벗어나기 위한 적극적 실천운동은 보편적 가치를 되살린다는 의미에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겠다. 경제 권력이 공적인 영역 전반에 심각한 위해를 가할 경우 반(反)자본적인 음모의 경제 권력은 그 권력을 창조한 주체인 소비자가 그 권력을 제한할 수 있다.

그 권력 제한의 실천적 운동이 소비자 불매 운동(보이코트)이다. 팔리지 않는 상품은 상품으로서 가치가 없다. 상품에 투입된 자본이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것이 소비자의 구매 활동이다. 돈의 힘으로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하는 경제권력이 탄생했고 그 권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것 또한 돈의 힘이다. 불매운동은 선진국에서는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자본의 힘으로부터 소비자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적극적 권익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일찍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불매운동이 사유 재산을 침해한다는 주장으로 불매운동을 무력화 하는데 이것은 기업의 이윤추구 활동이 사회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망각한 데서 오는 생각이다. 기업은 사회적 책무를 다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렇지 않을 때 기업의 이윤 추구는 제한할 수 있다. 기업이 반(反)사회적이고 반(反)민주적 행태를 자행한다면 그 기업이 사회적이고 민주적 가치를 담보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이것이 필자가 삼성에 대한 불매운동을 찬성하는 이유다.

경제권력에 침묵하는 대학 사회에 고군분투하는 김상봉 교수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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