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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10년', 담론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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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10년', 담론이 사라졌다 [민교협의 정치시평] 지금 필요한 담론 투쟁
우리 사회의 지적 담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무엇일까. 각자의 분야에 따라 다양한 주제가 있을 것이며, 또한 다양한 학문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의 관심사에 따라 그만큼 많은 주제가 제시될 수 있을 게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난 10여 년 간 인문사회 분야에서 학문적 보편성과 연관하여 우리 사회를 분석하고 우리가 나아가야할 전망을 제시하는 담론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실이다. 그 자리에 다만 경제 성장 논의나 사회의 민주주의가 퇴행했다는 등의 현상적 분석이 지적 담론을 대신하고 있다. 또는 서구의 이론을 수입하여 순수학문 타령이나 하고 있다.

지금처럼 사회가 급격히 퇴행하고 있는 시급하고 긴박한 상황에서 무슨 한가한 소리인가 하고 의아해 하겠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 현실을 올바르게 바라보고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는 성찰적 지성의 노력은 매우 절실하다. 그럼에도 학자와 대학은 경제 논리에 파묻혀 각자 생존하기에 급급하다. 치밀한 비판과 심층적 분석을 통해 사회를 이해하고, 나아가야할 지향점을 성찰해야할 지식인들은 전문 기능인의 역할에 만족하고 있다. 자신의 전문지식을 이용하여 개별 이익을 산출하는 데만 집중하는 지성이 어떻게 지성일 수 있는가.

지난 정부 이래 이른바 주류 관변 언론은 우리 사회의 담론을 장악하면서 심층적 분석이나 반드시 필요한 지적 담론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언론이 반드시 해야 할 사회의 비판기능과 전망 제시 기능을 포기하고 다만 사적 집단 이익에 함몰된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종편 방송 같은 '쓰레기 저널'만이 우리 사회의 언로를 주도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심각하게 대두되는 노동문제를 보면 이들이 얼마나 현실의 본질적 문제를 무시하고 왜곡하는지를 너무도 잘 알 수 있다. 한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노동, 우리 삶이 이렇게 보존되는 것이 모두 노동 때문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노동을 소외시키고 노예화하며 노동을 억압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유지하려는 태도가 어떻게 공적 기능을 담당하는 언론의 정당한 태도일 수 있는가.

온갖 생활수치와 일상적 담론은 끊임없이 삶의 위기를 경고하고 있다. 최악의 반생명적 수치들, 10연 연속 오이시디(OECD) 국가 최고의 자살률, 각종 실업률 역시 최고를 유지하고 있지만, 출산률은 세계 최저를 기록하고 있다. 노동자의 죽음과 경제적 불평등은 굳이 수치를 들지 않더라도 조금만 관심을 두고 돌아보면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곳곳에서 죽어가며 죽어간다고 신음하고 있지만 그 최악의 불평등은 사라지지 않고 더욱 깊어지고만 있다.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듯이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는 <21세기 자본>에서 소득수익률보다 자본수익률이 월등이 높은 현대 자본주의의 근원적 모순을 경고했다. 이 경고는 이 땅에서는 더 심각하게 작동하고 있다. 이런 모순은 경제 불평등을 심화시켜 심각한 균열 현상을 초래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오직 경제 논리에만 집중하고 그 논리에 빠져 허덕이게 만든다. 여기에 예외가 없는 듯이 보이는 것이 현재의 한국이 아니란 말인가.

이는 지난 70년대 이래, 아니 어쩌면 해방과 6,25전쟁 이후 새롭게 형성한 한국 사회와 문화가 한결같이 걸어온 경제성장과 자본주의화의 결과일 것이다. 우리는 식민지의 기억과 냉전의 희생물로 잊어버린 우리의 삶과 존재를, 그에 대한 자각과 자긍심을 산업화와 근대화로, 또는 경제성장으로 대신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 가운데 잊어버리고 상실한 공동체성과 인간의 공존재성을 다시금 돌아보고 이를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어디에서도 인간다운 인간을 말하기 힘들 것이다. 역사적 경험과 기억을 공유하는 한국은 한국의 역사적 경험과 그에 대한 추체험을 통한 지성적 성찰 작업을 남김없이 철저히, 그리고 현실의 가장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전개해 가야할 것이다. 그런 작업을 하지 않을 때 과연 우리의 실존성과 차이에서 드러나는 학문과 사회와 공동체를 수용하는 지성이 가능할 것일까.

그 까닭은 우리의 전통 안에 이미 일상화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근원에서도 보편적으로 자리 잡았던 사유 가운데 하나가 공동체성임에도 지난 역사의 과정에서 잊어버리고 던져버렸던 개념이 공공성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과잉에 따른 수많은 문제와 함께 그에 따라 생겨나는 민주주의의 퇴조는 전(全)지구적인 뚜렷한 현상이 되고 있다. IS의 테러는 결코 이슬람과 기독교적 유럽 국가의 문제가 아니다. 1억에 가까운 난민은 우리가 외면해도 좋은 다른 나라의 일이 아니다. "분노하라"는 외침은 절박한 우리의 현실이다. '헬조선', 'n포 세대'는 물론 '수저 계급론'은 다만 인터넷(SNS) 상의 일시적 유행으로 간주할 수 없는 현상이지 않은가.

대학의 구조개혁과 기초학문의 종말에 대해서는 또 뭐라고 말할 수 있는가. 대학조차 이제는 정부지원금에 따라 취업과 사회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학문을 퇴출시키고 있다. 최근 발표된 프라임 사업(PRIME)은 2012억 원의 지원금으로 대학 구조 자체를 취업과 사회적 수요에 대처하는 형태로 바꾸라고 명령하고 있다. 인문학은 코어(CORE) 사업에 걸린 600억 원을 향해 돌진하라고 내몰리고 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이 사업에 동원되어 이 겨울을 보낼 것이다. 그렇지 않은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대학 밖에서, 또는 대학 안이라도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으로 생활하고 있다. 이 사회의 본질적 담론은 누가 말할 것인가.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에 우리는 지금도 가만히 순수한 학문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생활세계는 파괴되고 민주주의는 사라지고 있으며, 그 자리에 다만 한 줌 달콤한 경제적 풍요만이 대신하고 있다. 그 풍요 역시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이런 체제 뒤에서 웃고 있는 그들에게 집중될 것이며 대부분의 사람은 다시금 그들이 외면했던 소외된 삶으로 전락할 것이다. 우리가 외치고 말하고, 맞서지 않으면 우리의 삶을 지킬 수 없다.

담론을 형성하고 담론을 펼치고 담론을 실천하면서 맞서는 작업은 결코 현실도피가 아니다. 가장 깊이 현실에 뛰어들어 가장 열심히 담론투쟁을 펼쳐가야 한다. 이 가난한 시대에 지식인으로 사는 것이 저주가 되지 않으려면 고뇌하고 사유하고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무기로 투쟁해야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소외되고 왜곡되고, 그렇게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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