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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알고 싶어? 내게 거짓말을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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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알고 싶어? 내게 거짓말을 해봐!" [서동욱의 문학 칼럼] 문학과 삶의 진실
한 때 문학이 역사, 철학을 대신할 때가 있었습니다. 시를 읽고서 사람, 자연, 세상과 관계를 맺는 법을 배우고, 소설을 읽으며 기성세대가 감추려 했던 역사의 진실을 파악하고, 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논리를 벼렸지요. 에세이는 철학적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문학의 모습은 초라해 보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문학의 힘을 신뢰하며 그 가능성을 모색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최근 시집 <곡면의 힘>을 펴낸 서동욱 시인(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도 그 가운데 한 명입니다. <프레시안>은 서동욱 시인과 함께 문학 칼럼을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문학과 관련된 이론적 논의는 매우 다채롭습니다. 서동욱 시인은 이 다채로운 논의의 핵심에 위치한다고 생각되는 세 가지 근본 주제를 꼽아보았습니다. 진실, 구원, 현실에 대한 참여가 그것입니다. 이 연재가 문학의 본성에 대해 숙고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삶은 진실(진리)을 향해 간다. 문학도 그럴까? '허구'라는 이름으로 보통 불리기도 하는데?

카프카는 이런 말을 남겼다.

"진리 속에 살기."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재룡 옮김, 민음사 펴냄)은 카프카의 이 말과 더불어 이야기의 한 장면을 흥미롭게 엮어간다.

진리 속에 살기.
이것은 카프카가 어느 일기 혹은 편지에서 사용했던 표현이다. (…) 진리 속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 사비나는 자신의 사랑을 감춰야만 한다는 것을 괴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진리 속에서' 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여주인공 사비나는 연인과의 사랑을 없는 일처럼 거짓말 속에 감춰야 하며, 그것이 진리 속에 머무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라고 그녀는 생각하며, 그렇기에 군중의 평균적인 견해에 대항해 자신의 사랑을 감추고 은폐하려고 한다. 한 마디로 세상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오히려 진실 되게 사는 것이라는 역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마치 헤겔이 <정신현상학>(임석진 옮김, 한길사 펴냄)에서 디드로의 소설 <라모의 조카>를 분석하면서 써놓은 다음과 같은 문장의 소설 버전 같다.

"거짓말을 다반사로 하는 파렴치함이 그야말로 최고의 진실을 뜻하는 것이 된다."

내게는 이 이야기가 문학의 '거짓'과 '진실'에 대한 하나의 우화로 들린다. 문학은 비진리의 원천으로서 비난을 받아왔고 동시에 비진리의 자격을 가지고, 현실의 지배적 힘으로부터 해방의 출구 구실을 해왔다.

문학이 비진리라서 비난받아야 한다는 주장의 대표자는 플라톤일 것이다. 예술가들은 모방을 한다. 그런데 본질이 아닌 부차적인 이미지만을 모방해 보여주면서도 그것이 본질적인 것처럼 말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용기 같은 덕목을 보자. 시인은 용기 있는 인간은 어떻게 처신하는지 원리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용기를 발휘하는 인간이 얼마나 멋진 모습인지 외관을 묘사한다. 즉 용기의 원리를 알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용기의 효과가 우리 감성에 호소하는 국면만을 포착해 낸다.

이런 플라톤의 입장과 반대로,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진리가 아니라 비진리를 담고 있는데서 문학의 긍정적인 모습을 발견한다. 플라톤은 예술이 원본 대신 원본의 이미지에, 진리 대신 비진리에 몰두한다고 해서 싫어했다. 비진리에의 몰두가 꼭 나쁜 것인가? 들뢰즈는 오히려 플라톤을 거꾸로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차이와 반복>의 한 구절이다.

"플라톤주의를 전복한다는 것, 그것은 모사에 대한 원본의 우위를 부인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이미지에 대한 원형의 우위를 부인한다는 것이며 허상(시뮬라크르)과 반영들의 지배를 찬양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플라톤과 더불어 순수한 원형을 찾아 헤맸다. 그 탐구는 플라톤이 제시한 대로 '더 나은 것은 내버려 두지만, 더 못한 것은 버리는 기술'을 통해 이루어졌다. 즉 '금을 골라내듯' 가짜, 비진리 사이에서 모범적인 것, 참된 것을 골라내는 분리의 기술을 통해서 말이다.

이 기술을 통해 이데아라는 원형을 모범적으로 닮은 것(eikōn)과 가짜, 시뮬라크르(phantasma)가 위계적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순수한 원형을 정점에 놓고 짜이는 이런 위계적 편차는 이후 플라톤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인간사의 다양한 영역에 자리 잡는다. 예컨대 원형적인 순수한 인종을 설정하고서, '부적합한 특질들'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느냐는 열등함의 정도에 따라 다른 인종의 위계를 짜나가는 일. 그리고 원형적 동일성을 원형적 성(性)에서 발견하고서 성적 차이를 위계적 차이로 만드는 폭력. 참된 것, 원형적인 것 아래로 유색인종, 혼혈아, 동성애자, 이민자의 그늘이 펼쳐진다.

그렇다면, 문학은 오히려 참된 원형을 전복하고 오염된 허상들 속에, 비진리 속에 머물러야 하는 것은 아닌가? 문학 안의 비진리를 경유해야만 오히려 우리는 삶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바디우가 <비미학>(장태순 옮김, 이학사 펴냄)에서 베케트를 두고 했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하는 게 적절할지 모르겠다. "말하기의 본질은 잘못 말하기이다. (…) 그리고 말하기의 정점인 시적인 말하기 또는 예술적인 말하기는 바로 잘못 말하기의 통제된 조절"이다. 고전적인 진리 이론은 사태와 진술의 일치를 진리의 자리로 여겼다.

그러나 사태 안에 숨겨진 위계적 불평등, 다양한 역동적 사태 등등에 까지 파고드는 것이 관건이라면, 사태와 말이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불일치하는 것, 잘못 말하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잘 말하는 것이 된다. 그렇게 문학은 표면의 사실을 보고 하지 않고, 잘못 말하고 틀리게 말하고 비진리를 말하는 방식으로 오히려 삶의 배후에 숨은 진실에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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