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됐다. 다음날 전국 곳곳에서 열린 제7차 촛불 집회는 승리를 자축하는 즐거운 축제였다. 분명 대중의 승리이고 광장의 승리다. 그게 아니고는 새누리당 의원 중 절반이나 저희들이 만든 대통령의 탄핵에 찬성표를 던지는 광경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직 승리라고 하기에 흔쾌하지 않은 국면임도 분명하다. 피의자 박 씨가 청와대에서 쫓겨나려면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판결이 아무리 빨리 나와도 내년 봄은 돼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그때까지 촛불 시민은 실은 승리한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다.
물론 그래서 촛불이 꺼지지 않는 것이, 광장이 닫히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한데 촛불을 계속 들더라도 박근혜 체제에 맞서 더 확실히 승리의 기세를 다지려면 이제 무엇을 외치고 무엇을 관철할지 고민이 된다. 황교안 내각을 손 봐야 한다거나 재벌 개혁, 검찰 개혁 이야기가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박근혜의 자진 사퇴냐, 탄핵이냐를 놓고 벌이던 열띤 논란에 비하면 이 고민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다.
짧아도 내년 봄까지 석 달은 족히 될 시간 동안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이 고민에 참고가 될 만한 몇몇 역사적 장면들이 있다. 그 장면들을 잠시 훑어보자.
1905년 러시아, 1987년 한국, 2011년 스페인…
장면1. 1905년 러시아
1905년 러시아에서는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이때 러시아는 한반도 지배권을 놓고 일본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느라 민중의 생활고가 가중되자 그간 묵혀두던 모순이 폭발하고 말았다.
1월 22일, 20만 명의 노동자와 가족들이 민주주의와 사회개혁을 요구하며 황궁으로 행진했다. 차르(황제)의 초상을 들고 평화 행진을 벌이던 시위대에게 정부는 무차별 총격으로 답했다. 분노한 대중은 당장 차르의 초상을 찢어버리고 총파업으로 맞섰다. 그 후 거의 1년 가까이 혁명 상황이 계속됐다.
사실 1년 동안 매주, 매일 시위와 파업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시민 대다수가 참여한 총파업에 당황한 차르 정부는 2월에 개혁을 약속했다. 의회도 설치하고 헌법도 제정하겠다고 선포했다. 러시아판 '6. 29 선언'이었다. 민중의 승리였지만, 실제 개혁이 추진된 게 아니라 '약속'만 했으니 아직 절반의 승리였다. 어쩌면 지금 우리 상황하고도 닮았다.
이때 러시아 민중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정치적 요구를 내건 시위가 잦아들기는 했다. 민주개혁을 약속했으니 일단 진행 과정을 지켜보자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다시 조용해졌냐면 그것은 아니었다. 승리의 자신감을 얻은 대중은 일터에서도 크고 작은 승리를 일구려고 집단행동을 쉬지 않았다. 노동조합을 새로 결성했고,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다. '정치' 투쟁에서 '경제' 투쟁으로 옷을 갈아입기는 했지만 투쟁 자체는 멈추지 않은 것이다.
곳곳에서 승리의 소식이 들려왔다. 봄 햇살이 느껴질 무렵, 대다수 러시아 공장들의 작업 시간은 9시간, 8시간으로 줄었다. 이 무렵 유럽 전체에서 가장 짧은 노동시간이었다. 의회조차 없는 나라의 노동 현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일터의 승리로 더욱더 자신감을 얻은 노동 대중은 민주개혁이 지지부진하자 다시 정치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1905년 1월, 한 겨울에 시작된 혁명은 그렇게 또 다른 겨울이 올 때까지 뜨겁게 이어졌다. (당대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 놀라운 사건들의 전말을 <대중파업>이라는 저서에 담아 우리에게 전했다.)
장면2. 1987년 한국
29년 전 6월 말도 지금과 비슷했다. 6월의 거리에서 시민들은 "군부 독재 타도, 직선제 개헌 쟁취"를 외쳤다. 6월 29일 제5공화국의 권력 후계자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을 약속했다. 역시 아직은 '약속'이었다. 게다가 정권 교체는 개헌 뒤에 다시 선거를 거쳐야 할 일이었다. 이때 다들 6. 29 '항복' 선언이라 하고 시민의 '승리'를 이야기했지만, 돌이켜보면 때 이른 자축이었다.
한데 이것으로 1987년의 드라마가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7월 첫째 주에 울산 현대그룹 사업장에서 '민주'노동조합이 결성됐다. 민주노조 결성 바람은 삽시간에 현대 재벌 산하 대공장 전체로 확산됐다.
현대만이 아니었다. 바람은 거제의 대우조선으로, 창원의 금속 사업장들로, 전국의 수많은 기업들로 퍼졌고, 중소공장들까지 덮쳤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새로 만들거나 어용노조에 맞서 민주노조를 건설했다. 사측은 탄압 일변도였고, 자연히 파업이 뒤따랐다. 그렇게 해서 9월까지 무려 3천 건이 넘는 쟁의가 폭발했다. 휴가철이라는 8월에 하루 평균 83건의 쟁의가 발생했다.
민주혁명 와중에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이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 현상이 20세기 말의 한국에서도 반복된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정치 투쟁이 경제 투쟁으로 확산되기는 했지만 이것이 다시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더 큰 정치 투쟁으로 모이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군부 독재는 정리했으되 그들이 만들어놓은 사회경제체제는 고스란히 물려받은 이른바 '87년 체제'가 시작됐다.
왜 그렇게 됐을까? 노동자대투쟁이 막바지로 접어들 무렵, 여의도 국회의 닫힌 방 안에서는 원내 보수정당들만의 협의로 새 헌법안이 작성되고 있었다. 창 밖에 여전히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기에 그나마 경제 민주화 조항 등이 담긴 헌법안이 나오기는 했다.
그러나 대중의 목소리가 그렇게 '창 밖'의 함성에 그쳐서는 안 될 일이었다. 대중운동과 개헌 과정은 보다 직접적으로 연결됐어야 했다. 그렇지 못했기에 6월의 여진은 노동조합운동의 성장 정도로 마감되고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12월 대통령 선거로 빨려 들어갔다.
장면3. 2011년 스페인
2011년 초에 지중해 연안은 '아랍의 봄'으로 떠들썩했다. 튀니지를 시작으로 이집트 등에서 민주혁명이 승리했다. 혁명의 주역은 하나같이 청년들이었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 미디어로 무장한 젊은이들한테는 독재 정권의 언론 통제도 속수무책이었다. 조직도 없이 온라인 네트워크만으로 수만 명이 시위에 나섰고, 수도 한 가운데의 광장을 점거한 채 결국 독재 정권의 항복을 받아냈다.
'아랍의 봄'은 곧바로 지중해 건너편 남유럽에 해일을 몰고 왔다. 마침 남유럽 여러 나라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아 흔들리고 있었다. 이들 나라의 정부는 좌든 우든 모두 긴축 정책을 실시해 경제위기의 고통을 서민에게 전가했다.
특히 젊은 세대가 희생양이 됐다. 가뜩이나 학자금 대출과 비정규직 증가로 움츠러들어 있던 청년층은 50%에 가까운 실업률까지 마주해야 했다. 스페인도 이런 나라들 중 하나였다.
스페인 젊은이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우리도 아랍 친구들처럼 해보자"고 모의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진짜 민주주의를!"이라는 온라인 플랫폼이 등장했고, 이곳의 논의는 어느새 행동계획으로 발전했다. 5월 15일이 거사일로 정해졌다.
이날 전국 50개 도시에서 총 13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거리에 나선 이들 중 일부는 밤에도 집에 돌아가지 않고 수도 마드리드의 푸에르타 델 솔 광장을 점거해 천막을 쳤다. 경찰이 몇 차례 천막을 철거하고 농성자들을 연행했지만, 그때마다 다른 젊은이들이 다시 광장을 채우고 점거 시위를 이어갔다. 이름도, 조직도 없었지만, 새롭고 결의에 찬 사회운동이었다. 언론은 이들에게 '분노한 자들(indignados)' 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푸에르타 델 솔 광장의 천막들에서는 스페인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토론이 시작됐다. 거듭된 토론 끝에 표결이 아닌 전원 합의로 다음의 요구들을 결의했다.
- 정치 엘리트의 특권을 폐지하라. 부패를 일소하라.
- 선거 제도를 개혁하라.
- 긴축 정책을 철회하라.
- 실업 문제를 해결하라.
- 주거권을 보장하라.
- 교육, 의료, 대중교통 등의 공공 서비스를 개선하라.
- 은행을 규제하라. 필요하면, 국유화하라.
- 참여 민주주의를 활성화하라.
점거 시위는 몇 주 뒤에 끝났다. 그러나 '분노한 자들' 운동은 오히려 이제 시작이었다. 스페인 젊은이들은 광장에서 합의한 개혁 요구를 들고 이후 몇 년 동안 빈번히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어느덧 기성 좌파정당이나 노동조합이 아니라 분노한 자들 운동이 부패 정치와 신자유주의 긴축 정책에 맞서는 사회운동의 중심이 됐다.
'분노한 자들' 운동도 점차 여진이 약해지는가 싶던 2014년에는 이 운동의 정치세력화를 내건 새 정당 '포데모스'가 출범했다. 포데모스는 작년 12월과 올해 6월, 두 차례 총선을 거치면서 스페인 3대 정당 중 하나로 급성장했다. '분노한 자들' 운동은 포데모스를 통해 계속 스페인 사회의 근본 개혁을 채근하고 있다.
…그리고 2017년 한국의 '최저임금 인상' 운동?
이런 역사 속 장면들에 지난 7주간의 광장 혁명을 비춰보자. 과연 지금 우리는 어디쯤에 서 있으며, 어디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어야 하는가? 나는 문득 이런 광경을 떠올려봤다.
장면4. 2017년 한국
제7차 촛불 집회 이후 집회 참석자 숫자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특이한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중에 서울 도심 곳곳에서 '최저임금 1만원으로 인상!'을 외치는 젊은이들의 게릴라 시위가 벌어졌다. 시내에서, 홍대 인근에서, 강남역에서 한 무리의 청년들이 모였다가 흩어졌다가를 반복하며 '최저임금 인상'을 외쳤다. 이런 시위가 처음 등장한 주의 토요일 촛불 집회에서는 최저임금, 비정규직, 청년 주거권 등을 이야기하는 젊은 세대만의 연단이 주목 받았다.
다음 주부터는 지방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났다. 언론은 이 시위의 배후가 누구인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어느 보수신문은 대학가에 남아 있는 운동권 계보를 다시 들이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언론이 소셜 미디어를 진원지로 지목했다. 탄핵 소추안 가결 이후 온라인 공간에서 촛불 시위의 미래를 토론하던 가운데 아주 자연스럽게 '최저임금 인상' 운동에 나서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논의는 아주 복잡하고 치열했다. 기본소득 이야기도 나오고 반론도 나오면서 격렬한 논쟁이 오갔다고 한다. 하지만 다들 최저임금 인상이 청년들이 바라는 사회개혁의 출발점이라는 데 동의하면서 '최저임금 시급 1만원!'을 외치는 다양한 행동계획이 제출됐다는 것이다.
최저임금 문제가 청년층의 첫 번째 개혁 요구가 된 것은 최저임금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치적인 의미도 있었다. 탄핵 소추안 가결로 승리감을 경험한 젊은이들은 자신의 일상과 직결된 문제에서 또 다른 승리의 경험을 맛보길 원했다.
그런데 최저임금은 모든 원내 야당들이 총선에서 개선을 공약한 사안이었다. 탄핵 소추안 가결에는 2/3가 찬성해야 했지만, 최저임금법 개정에는 과반수의 찬성만 있으면 됐다. 야당들이 탄핵 표결할 때만큼의 의지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실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청년들은 야당들에게 바로 이 의지를 촉구하기로 결의했다.
젊은이들이 이런 구체적인 요구를 들고 나온 덕분에 촛불 집회가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1월부터 10대, 20대를 중심으로 토요일 집회 참석자 수가 다시 늘어났다. 장년층 사이에서도 최저임금 문제가 뜨거운 관심사가 됐다. 날이 풀린 2월부터는 청년들이 국회의 결단을 촉구하며 광화문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마침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 발표가 임박했다는 소식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봄바람이 완연한 3월의 첫 주 토요일에 서울의 촛불 집회 인원은 작년 12월 3일의 숫자에 육박했다. 200만 명 가량이 광화문 인근으로 모여들었다.
이미 열흘 가까이 점거 시위를 벌이던 청년들이 이 인파를 맞이했다. 작년 초겨울과 달리 촛불을 든 시민들의 관심사는 더 이상 피의자 박 씨의 운명만은 아니었다. 최저임금 인상을 시작으로 사회개혁을 관철하고야 말겠다는 게 어느새 2017년 봄 광장의 시대정신이 돼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상 속 또 다른 승리의 경험
이것은 단지 하나의 상상일 뿐이다. 혁명적 상황 속에서 한 개인의 전망이나 상상은 대개 현실에 의해 무참히 추월당하곤 한다. 위의 상상 역시 그렇게 몇 달 뒤에 닥칠 현실에 견줘 한낱 웃음거리가 될 수 있고, 나는 진실로 그렇게 되길 바란다.
다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탄핵 소추안 가결이라는 잠정 승리를 거둔 뒤에 광장 혁명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우리 일상 속 또 다른 승리의 경험이라는 점이다. 234표라는 너무나 구체적인 실물로 육박했던 승리가 우리 삶과 직결된 문제들에서도 반복될 수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누구는 이후의 대안으로 '시민의회'를 이야기하고 누구는 '촛불혁명당'을 말하지만, 이런 경험이 없다면 모두 공허한 종이 위 작전에 그치고 말 것이다.
박근혜 퇴진에서부터 내 호주머니 사정의 변화로까지 이어지는 크고 작은 승리의 연쇄 속에서야 비로소 박근혜 체제 전체, 즉 재벌-비선출직 관료-보수언론의 지배 체제에 맞선 도전은 12월 3일에 살아 꿈틀대던 정도의 대중의 의지로 타오를 것이다. 그날 서로의 눈빛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나는, 아니 우리는 그 불길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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