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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세 없는 보편적 복지는 허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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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증세 없는 보편적 복지는 허구다" [복지국가 정치동맹의 길]<3>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
복지가 대세다. 무상급식 논란이 촉발시킨 '복지' 담론은 국민들이 낸 세금의 쓰임새와 국가재정, 나아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둘러싼 백가쟁명의 각축장이 됐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코앞에 둔 정치세력들에게는 비껴갈 수 없는 소용돌이인 셈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신년연설에서 "한정된 국가재정으로 무차별적 시혜를 베풀고 환심을 사려는 복지 포퓰리즘은 문제의 해결책이 결코 아니다"고 선을 그으면서 논란은 한층 확산됐다. 감세, 작은 정부, 시장 만능주의의 경제정책을 신념으로 내면화시킨 보수 정부로서는 복지라는 말 자체가 달갑지 않음이다. 하지만 복지 소용돌이는 여권의 미래권력들 사이에 균열을 냈다. '복지 포퓰리즘'을 비판하는 오세훈 서울시장,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달리 박근혜 의원은 '한국형 복지'를 내걸고 이슈 선점에 속도를 붙였다.

반면 복지 담론은 야권 전반을 아우르는 우산이다. '뭉쳐야 산다'는 지상명제를 받아든 야권에선 연대·연합의 질서로 '복지동맹'을 발전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원론적 교감만 오갈 뿐 연대·연합의 방법론에서는 동상이몽이다. '복지국가 정치동맹'은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프레시안>은 '복지국가 정치포럼'과 함께 야권의 유력 정치인들 및 학계·시민사회 인사들을 두루 만나 '복지국가 정치동맹의 길'을 모색한다. 김윤태 고려대 교수가 진행하는 연쇄 인터뷰의 세번 째 손님은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이다. <편집자>


☞ [복지국가 정치동맹의 길]<1> "복지국가 단일정당 못 만들면 한나라당에 필패한다"
☞ [복지국가 정치동맹의 길]<2> "작은 차이 때문에 'MB후예'의 재집권을 용인할텐가?"
▲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프레시안(최형락)
복지 문제로 최근 가장 시끄러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민주당이다. 시대의 요구는 누가 뭐래도 복지고, 심지어는 한나라당의 유력 대권 주자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마저 '복지'를 얘기하지만 이를 놓고 더 골머리를 썩이는 것은 민주당이다.

최근 민주당이 내놓은 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보육의 이른바 '3무(無)정책'을 놓고 민주당 내부가 시끄러운 것이다. "포퓰리즘"이라는 여당의 비난에 일사분란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내부에서부터 이견이 나온다. 그 논란의 핵심은 재원이다. 과연 실현 가능한가라는 질문인 것이다. 이는 또 증세에 대한 고질적인 부담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정동영 최고위원은 단호했다. "증세없이 보편적 복지를 말하는 것은 허구"라고 내부를 향한 선제 공격을 날렸다. 부유세를 주장하기도 했던 정 최고위원은 "부유세와 함께 진보신당 조승수 대표가 제안한 사회복지세도 통합 검토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사실 정 최고위원의 전공은 '남북관계'다. 그런데 정 최고위원은 최근 변심했다. '담대한 진보', '역동적 복지국가'를 얘기하더니 이젠 아예 상임위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로 옮기겠단다. 복지의 영역에서도 가장 첨예한 문제인 노동과 일자리를 공부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4년 제안한 보건복지부 장관직을 사양한 것이 "개인적으로 안타깝다"고도 했다. 그는 "이미 국민이 강제하고 있는, 시대정신" 복지를 소홀히 한 것이 2007년 대선 패배의 진짜 이유라고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민주당이 더 왼쪽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마지노선으로 그는 '중도진보'를 거론했다.

이런 생각의 변화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불러온 것이었다. 정 최고위원은 "미국발 금융위기는 우리가 걸어 온 길이 신기루였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대표적인 '신기루'로 참여정부가 추진했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를 꼽았다. 그는 '역동적 복지국가'는 "참여정부의 실패의 원인에 대한 반성과 성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역동적 복지'는 "보편적 복지와 경제 민주화"가 씨줄과 날줄로 촘촘이 엮여 있는 것이었다. 그는 경제 민주화의 근거가 되는 헌법 119조를 거론하며 "만일 개헌이 본격적으로 논의되면 한나라당과 전경련이 집중적으로 요구하게 될 내용이 119조의 삭제일 것"이라는 말로 그 중요성을 역설했다.

남북관계에 대한 그의 언사도 막힘이 없었다. 그는 "이명박 정부 들어 냉탕에 들어간 남북관계지만 정권교체가 이뤄진다면 오히려 급물살을 만들 수 있다"고 장담했다. 온탕에서 냉탕으로 옮겨갔던 김영삼 정부 5년의 경험이 남과 북 모두에게 분명한 가르침을 줬다는 것이다. 그는 정권교체가 이뤄진다는 가정 아래 "다음 정부에서 국가연합 단계로까지 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비록 한 번의 뼈아픈 실패의 경험을 갖고 있긴 하나, 여전히 손학규 민주당 대표와 함께 야권의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정 최고위원은 본인의 대권 도전 플랜에 대해서는 "전국 각지가 농성장인데 대선 운운하는 것은 도리는 아니"라며 말을 아꼈다.

다음은 지난 11일 국회에서 진행된 정동영 최고위원과 김윤태 교수의 대담 전문이다.

"복지의 확대, 국민이 이미 강제하고 있다"

김윤태 : 최근 정치권에서는 '복지 담론'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기존 진보정당은 물론이고 민주당, 나아가 한나라당의 박근혜 전 대표까지 복지를 얘기한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평가하나? 일시적 유행인 것일까, 아니면 복지가 새로운 시대정신이 된 것일까?

▲ ⓒ프레시안(최형락)
정동영
: 시대정신이란 국민의 요구다. 국민의 고단한 삶이 '복지'라는 국가의 역할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지난해 6.2 지방선거에서 확인됐고, 그 전에 2007년 대선에서 민주당이 실패한 결정적 이유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복지'가 시대정신임은 맞다. 당시 성장률 4.5%, GDP 2만 달러, 무역수지 5000억 달러와 같은 거시 지표가 물론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었다. 그것이 본질이었는데 우리가 핵심을 놓쳤다. 정권을 뺏긴 이유다.

김윤태 : 경제는 성장하는데 삶의 질이 나빠지는 이유는? 국가운영의 원리가 문제란 말인가?

정동영 : 지금 국민은 지난 수십년 동안의 국가 운영 원리를 바꾸라고 요구하고 있다. 성장, 개발, 효율, 시장, 규제완화, 노동유연화, 자유무역(FTA) 등은 이제 아니라는 얘기다. 이런 것을 놓고 더 가속기를 밟는다고 국민 개개인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국민소득 2만 달러가 4만 달러가 된다고 내 삶이 획기적으로 달라질까. 이제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환점에 서 있는 것이다. 복지의 확대는 이미 국민의 요구로 강제될 수밖에 없는 시점에 접어들었다.

김윤태 : 그래서인지 민주당도 지난해 10월 전당대회에서 처음으로 강령에 '보편적 복지'라는 문구를 넣었다. 강령 수정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정동영 최고위원이었다. 선거 기간 정 최고위원은 역동적 복지국가를 주장하면서 사회복지 부유세를 들고 나오기도 했다.

정동영 : 내가 당에 기여한 것이 있다면 바로 당의 노선과 정체성을 진보적 민주당으로 견인해 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복지국가 논쟁에서 초기에 당이 낙오하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의미 있었다. 지난해 지방선거 전후로 나는 '담대한 진보'를 얘기하면서 당이 그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어중간한 중도는 좀 접어놓자고 얘기했다. 그러다가 전당대회를 거치면서 다들 불가피한 큰 흐름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물론 아직은 내면화, 심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김윤태 : 정당의 강령 개정은 정치노선의 변화를 의미한다. 앞으로 민주당이 더 진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보는가?

정동영 : 사실 당도 움직이는 생물이다. 국민의 삶 속에 모세혈관을 뿌리 내리고 있는 조직이란 얘기다. 국민들은 지금 너나할 것 없이 너무 삶이 팍팍하다. 자영업 하는 사람 가운데 요즘 장사 잘 된다고 하는 사람이 열에 하나도 드물다. 한 집 건너 한 집 마다 대학을 나온 아들딸들이 취직이 안 돼서 집에서 놀고 있다. 이런 현실에 발을 디딘 정치세력이 지금 가야할 길은 어디일까.

김윤태 : 역동적 복지국가 대신 보편적 복지라는 문구로 수정된 이유는?

정동영 : 강령이 개정은 됐지만 아쉬움도 있다. 처음에 내 제안은 당헌 2조의 목적 부분을 다 삭제하고 민주당은 '역동적 복지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한다'고 단순 명쾌하게 바꾸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당이 누구를 대변할 것인지, 왜 민주당이 정권을 잡아야하는지를 설명할 때 당헌 2조만 보여주면 되지 않나. 또 그것이 '복지 동맹'의 발판이 될 거라고 설득했다. 전당대회 준비위원 25명 전체에게 편지도 보냈지만 특정 후보가 주장한 것을 어떻게 그대로 당헌에 집어넣느냐는 것이었다.

지금의 강령은 그런 과정을 거쳐 일종의 타협한 결과물이다. 역동적 복지의 핵심이 '보편적 복지'니까 민주주의, 인권, 평화 등 당의 여러 목적 중 하나로 병기했다. 원래 주장했던 것보다는 좀 떨어지긴 하지만 그럼에도 큰 전환인 것은 분명하다.

"盧가 복지부 장관 제안했지만 그땐 남북 문제에 더 관심 있어 사양"

김윤태 : 두 민주정부에서도 복지라는 정책 방향은 있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생산적 복지', 노무현 정부에서는 '참여 복지'로 불렸다. 두 정부의 복지 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정동영 : 외환위기 이후 국제통화기금(IMF)이 우리에게 강제한 것은 4가지였다. 자유화, 민영화, 규제완화, 노동유연화. 신자유주의의 핵심들이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면서 빚어진 고통과 불행을 치유하기 위한 작업으로 기초생활보장제 등 사회 안전망을 설계했다. 참여정부에서는 복지 재정이 상당히 큰 폭으로 증가했다. 4대 사회보험의 틀도 완성했다. 그런 점에서 두 정부는 보편적 복지로 가는 기초를 닦았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4년 나에게 복지부 장관을 제안했는데 거절했던 일이다. 부끄럽지만 그 때는 복지보다는 남북관계 문제에 시선이 더 가 있었다. 또 복지 문제에 대한 준비도 덜 돼 있었다. 내가 오랫동안 고민해오고 관심 가져 온, 더 잘할 수 있는 분야를 하려고 통일부 장관을 고집했다.

그러나 이제와 고백하건데 7년 전에는 내가 상황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남북 관계와 평화 역시 막중하긴 하지만 어찌 보면 당장의 먹고 사는 문제와는 조금 떨어져 있는 문제라는 것을 그땐 지금처럼은 몰랐다.

김윤태 :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복지국가의 틀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는데, 한계가 있었다면 어떤 점일까?

정동영 : 선별적 복지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결식아동 지원 예산을 편성하고 홍보했다. 이 정부에서는 밥 굶는 아이가 없다고 국민들 앞에 자랑했다. 국민은 무상급식 수준까지 더 앞으로 나가라고 요구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선별적 복지를 홍보만 했던 것이다. 그게 한계다.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집필한 <진보의 미래>를 보면 정리해고와 노동유연화를 받아들인 것이 실패의 시작이었다고 성찰하고 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비정규직이 2배나 늘어나면서 폭증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보고만 있었다. 정권 재창출을 할 수 없었던 배경이 됐다. 우리는 참여정부의 그 반성을 계승해야 한다. 참여정부의 반성과 성찰을 계승하는 것이 바로 보편적 복지의 시작이다.

"역동적 복지국가의 핵심은 보편적 복지와 경제 민주화"

김윤태 : 정 최고위원이 새로운 방향으로 제시한 '역동적 복지국가'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 ⓒ프레시안(최형락)
정동영
: 선별적 복지, 시혜적 복지에서 이제는 보편적 복지, 역동적 복지로 가야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2008년 9월 두 번째 금융위기가 왔을 때였다. 미국발(發) 금융위기는 우리가 걸어 온 길이 신기루였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대표적인 것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수출 시장을 넓히고 경쟁력을 강화하면서 시장을 더 개방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연봉을 100만 달러씩 준다는 미국의 월가를 보면서 돈 장사로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해서 참여정부도 '금융 허브'를 얘기했었다. 그런 맥락에서 참여정부나 이명박 정부나 비전은 비슷했다. 그런데 돈 장사로 돈을 버는 것이 결국 '사기'였다는 것을 금융위기가 깨닫게 했다. 내가 잘못 봤구나, 알게 된 셈이다. 그 지점부터 반성과 대안 모색에 집중했다.

김윤태 :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금융허브, 개방형 선진통상국가의 목표가 모두 신기루라는 말인가? 그러면 역동적 복지국가에는 새로운 경제 대안이 있는가?

정동영 : 역동적 복지국가의 두 가지 핵심 내용은 보편적 복지와 경제 민주화다. 경제 민주화는 헌법에도 규정하고 있다. 현재의 한국 사회 재벌 집중특혜경제와 헌법 119조는 안 어울린다. 119조 2항은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이명박 정부는 경제민주화 조항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다. 이 대통령이 떡볶이 먹으면서 시장 상인들 만났을 때 상인들이 '대형마트 좀 규제해 달라'고 했더니 이 대통령이 '그런 규제는 위헌 소지가 있어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대통령이 헌법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민주화 조항과 현실이 전혀 동 떨어져 있다는 것이 대통령의 인식 속에 드러난다.

김윤태 : 우리나라 헌법 119조는 공공복지와 사회화를 규정한 서독 기본법의 14조와 15조와 유사하다. 자유시장경제가 아니라 사회적 시장경제를 명문화한 것이다. 그래서 대기업 일부에서 개헌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정동영 : 아마도 개헌 얘기가 나오면 한나라당과 전경련이 집중적으로 요구하게 될 내용이 119조의 삭제일 것이다. 재밌는 점은 이 조항이 87년 6월 항쟁의 산물인 동시에 독재정권 말기의 우연적 요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청와대 경제수석,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던 김종인 전 의원이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헌법개정 특위 경제조항 소위원장을 맡아 만든 조항이다.

당시에도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회장으로 있었던 전경련은 이 조항을 걷어내려고 엄청나게 로비를 했다. 위기도 있었지만 김종인 전 의원이 '앞으로 점점 더 재벌의 힘이 강해지게 돼 있는데 그러면 경제 관련 법률과 정부 정책이 매번 재벌에게 제동 걸린다'고 설득해 전 전 대통령이 동의했다는 것이다. 물론 헌법을 비롯해 어떤 법이든 그 시대 요구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우연적 요소도 분명히 있다. 헌법 119조는 김종인 전 의원의 공이 크다.

김윤태 : 헌법 119조가 정 최고위원이 구상하고 있는 복지국가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주장인가? 헌법 34조도 모든 국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와 사회복지를 증진할 국가의 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정동영 : 헌법대로만 해도 된다는 얘기다. 과거에는 '잘 살아보자'가 목표였다면 이제는 '따뜻한 가정처럼 보살펴 주는 나라'가 이상이 돼야 한다. 헌법대로만 하면 경제가 투명해지면서 복지 재원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역동적 복지국가의 씨줄이 경제 민주화고 날줄은 보편적 복지다.

"워싱턴 컨센서스 이후 20년 간 미국 따라 왔는데 기수가 꽈당 넘어졌다"

김윤태 : 그런 그림이라면 미국 모델보다는 유럽, 보다 구체적으로는 북유럽 모델로 가야한다는 얘기로 들린다.

정동영 : 1989년 워싱턴 컨센서스(미국식 시장 경제체제의 대외 확산 전략을 뜻하는 말)를 따르는 가장 충실한 모범생이 한국이었다. 그런데 그 깃발 따라 20년 왔더니 기수가 꽈당 하고 넘어졌다. 우리로선 깃발이 사라진 것이다.

내가 스웨덴친선협회장인데 스웨덴의 국가관은 놀라웠다. '국가는 인민의 따뜻한 가정'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와 스웨덴의 역사적 경험은 다르다. 현실의 차이점도 많다. 우리나라는 1000조 경제인데 정부 예산은 300조다. 전체 경제의 30%가 재정인 것이다. 반면 스웨덴은 경제 규모가 400조인데 예산은 200조 규모였다. 50%가 재정이다. 우리 재정규모가 300조이고 스웨덴이 200조인데 스웨덴은 인구 950만 명의 작은 나라다. 반면 우리는 5000만 명이다.

헌법 119조대로 하면 작은 정부는 될 수가 없다. 작은 정부는 공무원 숫자가 아니라 재정 규모 아닌가. 지금보다 정부의 역할과 재정의 크기를 키우는 방향으로 가야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다. 지난 경제위기 때도 그런 토대를 바탕으로 가장 위기의 영향을 덜 받은 것이 복지국가들 아니었나. 완벽한 사회안전망과 고용 안정이 보장되기 때문에 충격이 다 흡수되는 것이다.

김윤태 : 작년 11월에 스웨덴에 다녀왔는데, 스웨덴은 어떤가?

정동영 : 이론이 아니라 체감으로 느낀 것이지만 사람들이 참 밝아 보였다. 스웨덴은 살고 싶어지는 나라였다. 스웨덴은 우리보다 과학 기술도 더 발전했다. 120년 전 고종 황제가 처음 쓴 전화기가 스웨덴 에릭슨 것이었다. 우리는 못 만드는 전투기도 만든다. 복지와 성장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있는 셈이다.

스웨덴에도 우리의 '삼성' 같은 기업이 있다. 스웨덴 최대 재벌인 발렌베리다. 안 하는 산업이 없고 안 만드는 것이 없다. 그런데 스웨덴 국민들은 발렌베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과학 기술 발전이나 복지에 엄청난 기여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재벌들도 발렌베리 모델로 가면 어떨까 생각한다. 삼성의 경제적 성취도 물론 있지만 사회 기여의 측면에서 재벌 역할도 있다.

▲ ⓒ프레시안(최형락)

김윤태 : 재벌의 해체 혹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보다는 스웨덴처럼 대기업이 복지국가를 지지하고 복지국가의 기반이 된다면 괜찮다는 주장인가?

정동영 : 토양의 차이는 있으나 한국 재벌의 가장 큰 문제는 불투명성이다. 지배구조의 투명성 확보가 중요하다고 본다. 또 한국의 재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이중적이다. 재벌을 비판하면서도 젊은이들은 그 회사에 들어가기를 바란다.

"부유세 진짜 원조는 김대중…부유세는 지하경제 드러내는 '사회투명세'다"

김윤태 : 미국보다는 스웨덴, 즉 유럽 모델을 거론했다. 하지만 미국보다 유럽이 상대적으로 조세 부담율이 높다. 정 최고위원도 부유세를 제안한 바 있는데, 복지 재원 마련에 대한 의견은 어떤가?

정동영 : 미국의 한 주 같은 나라가 아니라 큰 스웨덴 같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국민이 동의하면 갈 수 있다. 부유세를 먼저 주장한 것은 2002년의 권영길 후보였다. 권영길 의원에게 농담처럼 내가 '지적재산권을 사겠다'고 했더니 권 의원이 '부유세를 실현할 수만 있다면 정 의원에게 주겠다'고 하더라.

사실 부유세의 진짜 원조는 1971년 김대중 후보였다. 장충단 공원 연설에 그 대목이 나온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세금을 많이 내고 적게 버는 사람은 적게 내는 조세혁명을 단행하고 부유세를 실시하겠다고 말했다. 나중에 특별소비세가 된 '사치세' 얘기도 그때 처음 나왔다. 1971년이면 우리 GDP가 100억 불도 안 됐을 때다. 40년이 지난 지금은 경제 규모가 100배나 커졌지만 그와 동시에 지하 경제도 커졌다. 통칭 1000조 경제에서 20% 정도가 지하 경제다.

부유세의 핵심은 이 지하 경제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지다. 부유세를 걷으려면 그 전에 기본 인프라가 필요하다.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실명제다. 그리고 그 위에 세우는 1층은 은행, 금융권 거래와 부동산, 주식이 투명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2층이 골동품, 귀중품, 서화, 귀금속 등의 거래를 양지로 끌어내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이뤄져야 그 다음에 부유세가 가능해지고 이 과정에서 경제의 투명성이 높아지고 세원이 확장될 것이다.

김윤태 : 지하경제를 없애고 선진국처럼 조세 투명성을 높이면 얼마나 세수가 늘어날 것인가?

정동영 : 우리나라 생산 경제 규모가 1000조인데 부동산, 금융, 주식 등 자산 경제 규모가 7500조나 된다. 정작 생산 경제는 얼마 안 된다. 그런데 세금은 거꾸로다. 생산 경제에서 걷는 세금이 전체 조세 수익의 82%다. 자산 경제에서 나오는 세금은 18% 밖에 안 된다. 이걸 고쳐야 한다.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지하 경제가 절반만 양지로 드러나도 20조 이상을 추가로 걷을 수 있다.

김윤태 : 증세는 안 하더라도 조세 정의나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만으로 세수를 늘릴 수 있다는 주장인가?

정동영 : 그렇지는 않다. 부유세와 함께 진보신당 조승수대표가 제안한 사회복지세도 통합 검토할 수 있다. 물론, 아직은 내 개인의 생각이지만 앞으로 민주당 내에서 공감대를 넓혀가려고 한다. 재원대책없이 복지를 말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특히, 증세없이 보편적 복지를 말하는 것은 허구다. 부자감세 철회, 비과세감면축소, 낭비성 토목예산 전환, 세입세출구조개혁등은 필수적이지만, 그것만 갖고는 보편적 복지에 드는 재정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 부유세를 시행하려면 최소 3-5년의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부유세를 중기적 목표로 하고 당장 법만 만들면 시행할 수 있는 사회복지목적세를 병행할 수 있겠다.

"복지선진국은 부유세 폐지한다고? 배경과 맥락이 전혀 다르다"

김윤태 : 그러나 모델로 제시한 스웨덴 등 유럽 국가들은 최근 부유세를 잇달아 폐지하고 있다. 부유세 주장을 하면 주로 보수 진영에서 나오는 반박이 바로 이 점이다.

▲ ⓒ프레시안(최형락)
정동영
: 맞다. 그러나 배경과 맥락이 다르다. 스웨덴, 프랑스, 영국 등 유럽 국가들의 소득세 역사는 100년 밖에 되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처음에 소득세를 놓고 '국가가 국민을 망치는 날강도 같은 세금'이라는 강도 높은 비판까지 나왔었다. 미국에서도 위헌 판결까지 받았다가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도입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전산 시스템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소득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대충이었다.

소득세 보완을 위해 나온 것이 부유세였다. 소득이 나중에 다 귀결되는 것이 재산이니까. 재산을 보고 얼마 더 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100년이 흐르면서 소득이 투명해졌다. 그러니 부유세가 그 소명을 다한 것이다. 유럽은 부유세는 폐지했지만 또 다른 세원 확보를 위한 고민을 하고 있다.

지난해 스웨덴 국세청에 갔더니 은행예산, 주식, 주동산 등 모든 자산의 입출금을 한 통장에서 관리하도록 하는 법안을 낼 예정이라고 했다. 선택제로 원하는 사람만 하도록 했지만 기본적으로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조세 형평에 대한 인식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근본적인 문제를 손대지 못하고 있다.

김윤태 : 박근혜 전 대표의 한국형 복지는 어떻게 보는가?

정동영 : 마찬가지다. 재원 얘기가 없다. 더욱이 '줄푸세'와 충돌하지 않나. 대통령이 복지를 '망국적 포퓰리즘'이라고 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예산안 날치기 하면서 복지 예산은 다 쳐냈다. 그런 세력 속에서 과연 '한국형 복지'를 얘기할 수 있을까? 설명이 부족한 느낌이다.

김윤태 : 그럼에도 박근혜 전 대표는 싱크탱크도 만들고 공부를 많이 하는 것 같다. 정 최고위원은 어떤가?

정동영 : 상임위를 환경노동위원회로 옮길까 생각하고 있다. 복지 얘기를 하면서 노동 문제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보편적 복지의 핵심은 비정규직 문제요, 일자리다. 노동 문제에 대해 공부를 좀 해보고 싶어서다.

며칠 전 홍익대에 다녀왔다. 학교에서는 청소 노동자 1인당 110만 원을 지급한다는데 당사자는 월 75만 원밖에 못 받는다. 35만 원을 용역 업체가 가져가는 것이다. 농성하고 일주일이 됐는데 학교와 대화 한 번 안 했다. 75만 원 일자리일망정 계속 일하게 해달라는 요구가 핵심이다.

"야권연대 우선 과제는 민주당이 '중도진보'의 정체성 수립하는 것"

김윤태 : 다른 얘기로 주제를 옮겨보자.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보편적 복지도 화제였지만 야권연대와 통합도 이슈였다. 대부분의 후보들이 야권 연대에 적극 나서겠다고 했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이 제일 큰 판이지만, 당장 눈앞에 4월 재보선도 있다.

정동영 : 야권통합의 백화제방(百花齊放) 시대가 이미 열렸다. 올 한해 정치권의 화두는 연대, 연합과 통합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지난해를 봐도 1:1 구도를 만들면 이긴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야권연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지도력이다. 확고한 신념과 그것을 끌어내는 지도력이 중요하다. 민주당은 중요한 시기를 두 번 놓쳤다. 6.2 지방선거 직후 이 선거의 의미를 정확하게 규정하고 거기에서부터 본격적인 장을 열었어야 했다. 두 번째는 10.3 전당대회 직후다. 그랬다면 날치기 투쟁 국면에서도 더 힘을 받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지금 야권의 힘은 파편화 돼있다.

김윤태 : 야권연대와 관련된 여러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의 단일 정당을 만들자는 주장도 있지만 최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중심으로 '진보대통합' 움직임도 존재한다. 시민회의라는 단체도 민주당은 제외하고 만들어졌다. 때문에 민주당과 다른 야권 사이에 소통과 협력이 안 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정동영 : 문성근 감독이 하고 있는 '100만 민란' 운동을 주의 깊게 보고 있다. 목표가 내년 대선과 총선을 1:1 구도로 치르자는 것인데, 내 생각도 그렇다. 백화제방 시대지만, 야권연대를 위해 무엇보다 가장 우선적인 과제는 사실 민주당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유세를 민주당 당론으로 만들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이 같이 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통합도 가능할 것이다. 그 전에는 건너지 못할 강 같은 차이가 있었다면 실개천 같은 차이도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프레시안(최형락)

김윤태 : 연합정부든 통합이든 2012년을 겨냥한다면 시간이 그리 넉넉한 것은 아니다. 무한정 논의만 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구체적인 단계별 계획을 생각해둔 게 있다면?

정동영 : 오는 4월 재보선이 크기는 작지만 굉장히 중요할 것 같다. 여기서 또 민주당이 독식하고 연대 연합을 하자고 하면 말이 안 된다.

김윤태 : 후보를 적극적으로 양보해야 한다는 것인가?

정동영 : 그렇다. 현재까지 확정된 것은 2개지만 좀 더 늘어날 수도 있으니까. 연대와 연합을 통해 승리한다면 (2012년 야권연대 혹은 통합에) 더 탄력이 붙을 것이다.

김윤태 : 4월 재보선 후로는 어떻게 전개될까?

정동영 : 내년 총선이 4월 15일이니 최소한 연말까지는 연대 연합이나 통합을 위한 틀이 만들어져야 한다.

"정권교체 이룬다면 다음 정부에서 남북 연합 정부 구성도 가능하다"

김윤태 : 복지 담론 만만치 않게 최근 부각되고 있는 것이 평화다. 정 최고위원의 통일부 장관 경험이 지금이야말로 필요한 때라는 생각도 든다. 전쟁에 대한 공포와 위기의 시대에 새로운 비전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다.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바가 남다를 것 같은데?

정동영 : 우리 국민이 현 정부를 3년 간 보면서 '경제는 잘 한다더니 아니구나'라는 답을 내렸지 않나. 남북관계도 똑같은 것을 확인했다.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에서 분단 문제를 다루는 접근법은 크게 3가지다. 대결, 무시, 대화. '무시'는 오바마 정부가 쓰도 있다. 이른바 '전략적 인내'라는 것이 결국 무시 전략 아니냐. '대결'은 지난 3년 동안 이명박 정부가 했다. 제제와 압박을 통해서 대결 국면을 조성한 것이다. 그런데 둘 다 바닥을 드러냈다.

남북관계가 역사상 최악인 지금 상황에서 정권이 바뀌면 오히려 남북관계에 급물살을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이 정권에서는 남북 대화가 재개 되 봐야 별다른 돌파구를 만들기는 어렵다. 이미 상호 불신과 증오가 깊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경험이 앞으로 기회가 될 것이다. 10년의 민주정부가 계속 남북 대화를 주된 노선으로 끌고 왔다가 급격하게 3년 간 남북관계가 냉탕에 들어갔다. 이 3년 동안 남쪽도 북쪽도 앞으로 가야할 방향을 명료하게 깨달았다.

김윤태 : 남북관계의 위기가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들린다. 정권교체가 되면 무엇을 할 것인가?

정동영 : 민주진보세력이 정권교체를 이룬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주도권의 회복이다. 한반도 문제를 누가 주도해야 하는가. 연평도 사태 이후를 보면 대체 이것이 중국의 문제인지, 미국의 문제인지, 심지어 러시아 문제인지 헷갈릴 정도다. 주인이 실종된 것이다. 다행히도 북은 여전히 '우리 민족끼리'를 내세우고 있다. 정권교체가 이뤄지면 첫 번째로 남과 북이 주인이라는 것을 확실히 각인시켜야 한다.

두 번째로는 우리가 원하는 것과 그들이 원하는 것을 서로 교환해야 한다. 이미 성공한 교환의 경험들이 있다. 2000년 10월 북미 공동 코뮤니케와 2005년 9.19 공동성명이 그것이다. 해답은 이미 다 나와 있다. 실천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좌절한 것일 뿐이다. 더욱이 2000년 북미 코뮤니케는 민주당 정부가 한 것 아닌가. 오바마 대통령이 재집권에 성공한다면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

셋째, 2007년 10.4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사업들을 착실하게 추진하는 것이다. 2000년 6.15는 분단 역사에서 하나의 대전환점이었고, 이것을 계승한 2007년 10.4합의들은 남북경제공동체와 한반도 평화체제로 가기 위한 확실한 대안들이었다.

김윤태 : 북한의 태도는 어떻게 평가하나?

정동영 : 북한은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는 순환관계라고 보고 있다. 조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가 얼마전 이렇게 지적했다. "2000년 10월은 2000년 6.15 공동선언이 만들어냈고 2005년 9.19 공동성명은 같은해 6월 남한의 통일부 장관이 특사로 와서 장군님을 접견하면서 추동됐다"고 했다.북은 지금 북미관계를 돌리기 위해 남북대화를 필요로 하고 있다. 하지만 남측 정부는 아직 대결노선을 전환하지 않고 있다.

▲ ⓒ프레시안(최형락)

김윤태 : 미국의 한반도 정책도 변해야 한다고 보는가?

정동영 : 미국도 북한을 동아시아에서의 미사일 방어 체제(MD) 전략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악의 요소로 간주하는 '네오콘 전략'의 폐기 여부를 검토해야 한다. 사실 이 네오콘 전략에서 보면, 북한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어나더 노스 코리아(another North Korea, 또 다른 북한)'가 필요하다. 미국이 '비핵화'가 아니라 '비확산'을 얘기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비확산만 확실하면 핵확산 위험은 없고 MD는 추진할 수 있다. 그것이 본질이다. 그러나 그런 미망에 잡혀 있는 한 북핵 문제는 안 풀린다. 왜냐면 '어나더 노스 코리아'는 한반도 주변에는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이런 전략적 방향을 바꾸도록 설득할 수 있는 것은 남한 정권 밖에 없다. 미국이 설득되면 북한도 전략적 결단을 설득할 수 있다. 이미 북한은 9.19 공동성명에서 한 번 결단을 내렸었다. 모든 핵무기와 프로그램을 폐기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바로 다음날 미국 재무성이 '불량국가, 범죄국가' 운운하면서 상이 엎어진 것이다. 9.19가 왜 깨졌는지 그 책임소재부터 분명히 짚어야 한다. 민주진보 정권이 해야 할 일은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하는 일이다.

이 문제를 넘어서서 9.19 공동성명을 실천의 레일에 올려놓으면 평화 체제는 굴러가게 된다. 그러면 북한도 자신감을 갖고 중국, 베트남 모델로 갈 수 있다. 이미 북한은 사회주의 시장경제 문턱을 넘어서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은 북한을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김윤태 : 앞으로 한반도 통일은 가능할까?

정동영 : 개인적으로는 다음 정부에서 국가연합 단계로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연합이 별다른 것인가. 사람이 왕래하고 물자가 왔다 갔다 하고 정상회담이 정례화되고 각료회담과 국회회담이 정례화되는 수준이면 그것이 바로 국가연합이다. 국가연합 단계가 이뤄지면 한반도에서 지각 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대선 행보? 전국이 농성 현장인데 도리가 아니다"

김윤태 : 여러 사안에 대한 정치적 견해를 밝혔는데 아무래도 대선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당의 경우 2012년 대선 후보로 출마하려면 올해 11월에는 최고위원직을 사퇴해야 한다. 11월 이후 정 최고위원의 정치적 구상은 어떤지 들려줄 수 있나.

정동영 : 지금은 연평도 사태에 구제역에, 서민들은 또 전세대란까지…. 국민들이 정신이 없다. 특히 지역에 가 보면 공황 상태다.

전국 각지가 농성 현장이다. 내 지역구도 버스 파업이 벌어지고 있고 GM대우 비정규직 노동자가 고공농성을 하고, 한진중공업노조도 파업 중이다. 현대차 비정규직 문제도 아직 풀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선 운운하는 것은 정치인으로 도리는 아닌 것 같다.

김윤태 : 오랜 시간 열정적인 답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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