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디스플레이 공장에서는 누가 일할까. 우선 떠오르는 것은 오퍼레이터다. 설비 앞에 머물며 제품을 생산한다. 다음은 엔지니어다. 설비를 유지・보수하는 장비 엔지니어와 특정 공정 전반을 관리하는 공정 엔지니어가 있다.
그들 곁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또 있다. 어디에나 있지만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투명인간, 청소노동자다. 이들은 오퍼레이터, 엔지니어와 같은 공간에서 일하며 바닥과 벽면의 먼지와 약품을 닦고 방진복, 방진화 등을 정리한다.
첨단산업의 유해화학물질이 사람을 가려가며 영향을 줄 리는 없다. 그런데도 청소노동자의 위험은 주목받지 못했다. 2019년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반도체 노동자 20여만 명의 암 발병률을 일반인과 비교한 역학조사를 발표할 때도 청소노동자 이야기는 없었다.
2019년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삼성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 청소노동자들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과 함께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하기 시작했다. 그 중 산재 인정을 받은 이는 한 명뿐이다.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 청소노동자들은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위험에 맞닥뜨리고 있을까. 이들의 병이 산재로 인정받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반올림의 소개로 지난달 삼성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장에서 일하다 암에 걸린 세 명의 청소노동자, 그리고 그들을 대리한 두 명의 노무사를 만났다.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 : [암에 걸린 반도체‧디스플레이 청소노동자 ①] : 반도체 청소노동자는 '알 수 없는' 성분의 가루와 약품을 치운다, [암에 걸린 반도체‧디스플레이 청소노동자 ②] : 청소노동자의 '반도체 직업병'은 죽어도 병이 아니었다)
삼성디스플레이 아산공장 OLED 생산 공정에 클린룸에서 8년여 간 청소노동자로 일하다 유방암에 걸린 김은주(가명, 50)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접할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위험한 곳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그저 알아달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 오퍼레이터와 엔지니어의 직업성 질병 인정 투쟁은 2007년 시작됐다. 그 때도 청소노동자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만드는 클린룸과 작업 준비 공간인 스막룸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삼성 청소노동자들은 2019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과 함께 직업성 질병 산재를 신청했다. 12년의 간극은 왜 생겼을까. 오퍼레이터와 엔지니어들 곁에서 일하는 청소노동자들은 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을까. 청소노동자의 이야기와 고용형태를 바탕으로 이를 살피고, 해결방안을 들여다봤다.간접고용, 열악한 지위...산재 신청은 그만둘 각오해야 가능한 일
각각 수십조와 수백조 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삼성 디스플레이와 삼성전자에서 일하는 청소노동자는 최저임금 수준의 기본급과 유동적인 상여금을 받는 간접고용 노동자다. 삼성전자 기흥공장 반도체 생산 공장에서 청소노동자로 일하다 유방암에 걸린 이미경(가명, 59) 씨는 자신이 근무한 4년 동안에도 "일하는 사람은 그대로인데 사장과 업체만 바뀐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반올림에 피해를 제보한 14명 모두 하청업체 소속이었다는 점은 같다. 간접고용 노동자의 고용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삼성디스플레이 아산공장에 OLED 생산 공정이 들어서던 2011년 일을 시작한 김 씨는 "공정이 안정화되어 가고, 청소노동자들이 하던 일 중 일부를 다른 노동자들이 하게 되면서 업체가 청소노동자 수를 점차 줄였다"며 "회사가 재계약으로 압박을 주는 일도 있었고 그래서 그만 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청소노동자를 위축시키는 분위기도 있었다. 김 씨는 "건의사항을 말해도 관리자들이 무시하고 이런 게 있었다. 먹고 살아야하니까 참았다"며 "나중에는 그냥 말을 안 하게 됐다"고 했다. 실제로 김 씨는 입사 당시 400%였던 상여금이 250%까지 깎이는데도 회사에 불만을 말할 수 없었다. 이 씨 역시 정규직 직원들과 함께 휴게실에 있으면 아무래도 눈치가 보였다고 말했다. 고용이 불안하고 회사에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말하기도 어려운 삼성 청소노동자들이 직업성 질병 피해를 두고 회사와 다투려 마음먹기는 쉽지 않았다. 이를 위해서는 다니던 일자리를 포기한다는 각오가 필요했다. 기흥공장에서 일했던 청소노동자 손채연(52) 씨는 유방암 진단을 받은 뒤에도 겁이 나는 가운데에도 상여금이 나오는 일자리가 없다는 생각에 복직을 계획했지만 좌절된 뒤에야 '삼성 반도체‧LCD 산업보건 보상위원회'에 보상을 신청했다고 했다. 김 씨는 산재 신청 사실이 하청업체에 알려진 뒤 한 직원으로부터 '이제 여사님 삼성 계열사 못 간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자신과 같은 공장의 다른 건물에서 일하다 암에 걸린 청소노동자에게 산재를 권유했을 때도 '이 일을 그만 두면 그때 할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 청소노동자의 직업성 질병 피해가 드러나기는 어려웠다.간접고용 신분 때문에 국가의 시야에서도 사라진 청소노동자들
다른 한편, 반도체 노동자의 직업성 질병 위험에 대한 대대적 역학조사를 수행한 국가기관도 삼성 청소노동자를 시야에서 놓쳤다. 2019년 5월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하 연구원)은 <반도체 제조공정 근로자에 대한 건강실태 역학조사(이하 반도체 역학조사)>를 발표했다. 반도체 노동자 20여만 명의 암 발생 위험을 추적해 정리한 보고서다. 이를 보면, 반도체 공정의 위험성이 분명히 드러난다. 반도체 여성 노동자의 백혈병 발생 위험은 전체 노동자의 1.55배, 같은 병의 남성 장비 엔지니어 발생 위험은 전체 노동자의 1.51배로 나타났다. 여성 오퍼레이터의 비호지킨림프종 발병률도 전체 노동자의 1.92배에 달했다. '추적관찰이 필요하다'는 단서가 달렸지만 반도체 노동자의 위암, 유방암, 신장암 등 발생 위험도 상대적으로 높았다. 하지만 <반도체 역학조사>에서도 청소노동자는 배제됐다. 연구원은 반도체 노동자를 오퍼레이터, 장비엔지니어, 공정엔지니어, 관리자, 유틸리티, 기타(의사, 간호사 등)로 분류했다. 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청소노동자는 이 분류에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연구원이 청소노동자를 시야에서 놓친 이유는 이들이 간접고용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연구원은 <역학조사 보고서>에서 "반도체 제조 사업장의 사내, 사외 협력업체 종사자는 조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며 "이들 또한 유사한 직업적 노출 환경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이에 대한 안전보건 지원 체계가 필요하다"고 적었다. 삼성이 청소노동자를 간접고용한 점이 이들의 직업성 질병 위험을 살피는 문제에 대한 구조적 장벽으로 작동한 셈이다."청소노동자 직업성 질병에 대한 기업‧국가 차원의 조사 필요"
회사도 외면하고 국가도 외면한 삼성 청소노동자들은 이제 반올림과 함께 자신들의 노동과 직업성 질병 피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프레시안>이 만난 이들은 앞으로도 자신들이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 청소노동자의 직업성 질병 피해를 드러내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하겠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의 활동이 힘을 받기 위해서는 더 많은 청소노동자들이 용기를 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일이 필요하다. 국가나 삼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반올림에서 활동하는 조승규 노무사는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 청소노동자의 직업성 질병 피해에 대한 전수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지금은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 청소노동자의 수도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일을 반올림과 청소노동자들이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조 노무사는 "일반인과 비교해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 청소노동자가 암 등 직업성 질병에 걸리는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낸다면, 산재 대응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며 "반올림도 이 비율을 조사하려고 해봤지만, 하청업체 노동자의 고용이나 건강 정보를 추적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고 말했다. 조 노무사는 "삼성은 자신들이 계약한 하청업체 명단을 갖고 있을 것"이라며 "국가나 기업 차원에서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반도체‧디스플레이 청소노동자들의 직업성 질병 피해에 대한 조사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올림과 프레시안은 디스플레이반도체 공정에서 일한 청소노동자들의 직업성 질병 피해 제보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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