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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과 교도통신 서울특파원들의 교류와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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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리영희 선생과 교도통신 서울특파원들의 교류와 우정

[다시! 리영희] 일본 기자들의 한국 정세 '가정교사'였던 리영희

<프레시안>이 <리영희재단>과 공동으로 리영희 선생의 삶을 다양한 각도로 조명하는 시리즈 '다시! 리영희'를 시작합니다. 우리 현대사에서 리영희만큼 시대의 거짓 의혹 부조리를 밝혀내기 위해 온몸을 던져 싸운 지성인은 드뭅니다. 그는 권위주의 정권의 철권통치가 수십 년이나 지속되던 암울한 시절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글로 싸웠습니다.

소장 기자 때부터 그는 기자 정신의 표상이었습니다. 쿠데타 주모자인 박정희의 방미를 수행취재하면서 군사정권의 가공된 발표를 뒤집는 기사를 썼다가 중도에 본국으로 소환됐고, 한일 수교가 이뤄지기도 전인 1960년대 전반 일본 자위대가 유사시 한반도에 병력을 파견하는 극비 도상훈련을 했다는 것을 폭로한 것은 수많은 전설적 일화의 조각들입니다. 극우세력은 그의 필봉을 꺾어버리기 위해 해직 연행 압수수색 구속으로 점철되는 탄압을 자행했지만, 그는 베트남전쟁이나 신중국의 실상 등 민감한 주제도 성역 없이 다루는 자세로 일관해 방대한 저작을 남겼습니다.

한반도 주변 정세가 날로 험악해지고 시대착오적인 수구회귀 움직임이 가속화되는 요즈음 리영희가 살아 있었으면 뭐라고 했을까,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는 물음이 제기되는 것을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래 전에 타계한 그에게 다시 무거운 짐을 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고민하고 판단해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다시! 리영희'는 '리영희 정신'을 오늘의 시점에서 환기해 해법을 찾기 위한 과정의 작은 디딤돌이 되고자 합니다. 이 기획에는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그와 마주쳤거나 인연이 있었던 내·외국인들이 등장해 각기 소중한 기억이나 사연을 전합니다. 많은 이의 기억의 편린들이 합쳐지면 그가 시대의 어둠에 맞서 무엇을 고민하고 어떻게 싸웠는지도 자연스레 드러날 것입니다. 독서 메모나 서한을 분석한 글은 그의 인간적 면모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해줄 것입니다. 나아가 리영희의 저술을 접해 보기는커녕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젊은 세대에게 "도대체 이 사람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처절하게 살았을까"라고 한 번쯤 생각하게 만드는 자극제가 됐으면 하는 아주 조심스런 기대도 있습니다. 독자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바랍니다. 편집자.

리영희 선생이 81세로 돌아가신 지 1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김효순 리영희재단 이사장으로부터 리영희 선생과 <교도통신> 서울특파원의 교류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런 말을 들으니, 한국의 지식인과 외국 미디어의 역대 특파원 사이에 친교가 있었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 리영희님(이하 존칭 생략)과 우리들의 교류를 기록에 남기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친교가 있던 역대 특파원들 가운데 가장 말기의 특파원이고, 선배 특파원들이 나보다 훨씬 농후한 시간을 함께 지냈다. 내가 적절한 집필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2022년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에서 초빙연구위원으로 서울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원고 얘기를 꺼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다지 정리된 형태는 아니지만 리영희와 우리들의 교류에 대해 기록을 써 남기자고 생각했던 연유다.

한국에서는 '리영희 선생'이지만, 우리들 중에는 그다지 '선생'이라는 형태로 리영희와 사귀었던 사람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리영희가 <합동통신> 기자로 오래 근무해서, 같은 통신사 기자라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리영희는 기자에서 해직돼 한양대 교수가 되었지만, 한국이 민주화된 사회였다면 계속 저널리즘의 세계에 있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에게 리영희는 대학교수라기보다는 저널리스트, 그것도 통신사 기자 선배였다. 기자 출신이었던 만큼, 아카데미즘 출신보다는 사회적 시점이 보다 강한 분이었다.

예전에 한국은 2개의 양대 통신사 시대였다. 두산그룹이 <합동통신>을 소유하고 쌍용그룹이 <동양통신>을 소유했다. <교도통신>은 <합동통신>과 <동양통신> 양쪽과 제휴관계에 있었다. <합동통신>은 사옥 2층에 <교도통신> 지국의 사무실용 방을 제공했고, <교도통신>도 <합동통신>의 도쿄에이전트 역할을 담당하던 <신아통신>에 방 하나를 제공했다. <합동통신>이 도쿄에 특파원을 파견하게 되자 <교도통신>은 사옥에 <합동통신> 도쿄지국의 방을 제공했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으로 <합동통신>과 <동양통신>이 없어지고 <연합통신>으로 바뀌었어도 교도와의 제휴관계는 지속됐다. <지지통신>은 한국 통신사와의 제휴는 없었고 <중앙일보>와 제휴했다.

<교도통신> 서울특파원 가운데 최초에 리영희와 인간관계를 만든 이는 1960년대 후반 특파원을 한 가메야마 아사히였다고 생각한다. 일·한 양국은 1965년 국교정상화를 이루었는데 일본 미디어는 그 전후로 해서 서울특파원을 두기 시작했다. 가메야마는 <교도통신>의 4, 5대째 특파원이 아니었을까. 가메야마는 <교도통신>에서 서울특파원, 사이공특파원, 런던지국장 등을 거쳐 편집국장 상무까지 지낸 분이다. 그가 1972년에 낸 <베트남전쟁>(이와나미신서)에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한국군의 실태가 많이 기술돼 있다. 그것은 서울특파원을 경험했기 때문에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가메야마와 리영희가 어느 정도로 알고 지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교류는 가메야마가 편집국장이나 임원을 하던 무렵까지 쭉 이어졌다. 당시 서울지국은 단신 부임하는 지국으로, 임기는 1년 정도였던 것 같다. 사이공지국이나 외신부에 배속됐던 젊은 기자들이 처음 부임하는 지역이었다.

한국정세를 분석해주는 '가정교사'

리영희는 1929년생으로 일본어에 능숙했다. 영어는 뛰어났지만 한국어를 하지 못했던 가메야마에게 <합동통신>에 있던 리영희는 가르침을 청해야 했을 절호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가메야마는 정이 많고 싹싹한 성격으로 호주가였기 때문에 리영희와 이따금 술잔을 기울였던 것 같다. <교도통신>의 젊은 기자들에게 리영희는 한국정세를 분석해주는 귀중한 '가정교사'가 아니었을까.

리영희는 1964년 <조선일보>에 스카우트됐는데 그해에 한국과 북한이 동시에 유엔총회에 초청된다는 기사를 써서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돼 2심에서 선고유예를 받았다. 베트남전쟁에 관해 정부의 의향을 담은 기사를 쓰도록 요구받았지만 거부를 하고 1969년에 <조선일보>에서 해직됐다. 리영희는 후에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국민을 속이고 월급을 받는 인텔리가 아니라 노동자로 살아가려고 했는데 먹고 살기 위해 다시 <합동통신>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가메야마가 개척한 리영희와의 관계를 이어받은 사람이 1970년께 부임한 에구치 히로시 특파원이었다. 에구치는 그후 런던지국장 등을 역임하고 <교도통신>에서 정년퇴직한 후 이바라키대학의 교수를 지냈다. 필자는 1983년부터 1984년에 걸쳐 한국어 학습을 위해 연세대 한국어학당에 1년간 유학했는데 그때 지인의 소개로 원주에 있던 시인 김지하를 만나러 간 일이 있다. 시인을 만난 후 원주에 계시던 사상가 장일순 선생이 저녁 식사를 대접해 주었다. 장일순은 자신이 입고 있던 버버리 코트를 필자에게 보여주며 "에구치와 만났을 때 서로 코트를 교환했다. 이 코트는 원래 에구치의 코트였어"라고 에구치와의 인연을 말했다.

필자는 2009년 리영희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 리영희는 "에구치가 특파원이었을 때 나는 <합동통신> 외신부장으로 술도 마시고 잘 지냈다. 그에게는 은혜를 입은 게 있다"고 말했다. 리영희는 1929년 12월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림서에 근무했고 어머니는 지주의 딸로 유복한 가정이었다. 리영희는 5남매 중 4번째였다. 한국전쟁을 거친 남북 분단으로 큰형과 둘째 누나는 북에, 부모와 나머지 형제는 남으로 생이별을 했다. 리영희는 에구치가 서울 근무를 마쳤을 때 북에 남은 형들의 소식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에구치는 일본에서 조사를 해서 1974년 서울에 출장 왔을 때 "형은 이미 장티푸스로 사망했지만, 조카는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와 잘 살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리영희는 1998년 11월 53년 만에 북한을 방문했다. 평양의 고려호텔에서 누나의 아들을 만났다. 리영희는 필자에게 "누나는 5년 전에 사망했다. 너무 늦었다. 조카는 농업지도원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50살 정도였지만 겉보기에 나보다도 늙어 보였다." "조카로부터 내가 남에서 대학교수를 하고 있다는 것을 누나가 북의 신문보도 등으로 알고 있었다고 들었다." "평양에서 제법 떨어진 시골에 있던 조카를 찾아내서 면회를 시켜준 것은 북한의 그 나름의 호의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리영희 부부, 폐암 말기 에구치 히로시 병문안을 위해 방일

리영희는 2000년 11월 뇌졸중으로 오른쪽 반신이 마비됐다. 재활에 노력했지만 후유증이 남았다. 리영희는 에구치 히로시가 폐암을 앓고 있다는 것을 듣고 병든 몸을 무릅쓰고 2009년 10월말부터 11월초에 일본에 왔다. 에구치를 병문안하기 위해서였다. 혼수상태였던 에구치는 리영희의 얼굴을 보고 일시적으로 의식을 회복했다.

필자는 이때 실수한 경험이 있다. 필자는 도쿄에서 리영희 부부와 점심을 같이 했고, 리영희부부는 에구치의 집이 있는 미타카로 갈 예정이었다. 필자는 미타카가 종점인 소부선 전철에 리영희 부부를 태워 전송했는데 떠나는 전철을 보니 미타카가 아니라 중도의 나카노까지 가는 거였다. 리영희는 휴대전화를 갖고 있지 않아 연락을 취할 수 없었다. 필자는 다음 차로 나카노까지 쫓아갔지만 부부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나중에 물으니 나카노역에서 헤맸지만 어쨌든 미타카까지 갔다고 용서해 주었다. 에구치는 리영희와 만난 직후 2009년 11월 15일 폐암으로 숨졌다. 72세였다.

▲2010년 12월 리영희 별세 소식을 듣고 부인 윤영자에게 보낸 에구치 이쿠코의 조문 편지. ⓒ리영희재단

리영희와 <교도통신> 서울지국의 인연을 이어받은 사람이 히시키 가즈요시 특파원이었다. 히시키는 뉴욕지국, 워싱턴지국 등에서 특파원을 했고 외신부장도 지냈다. 정년퇴임 후에는 히로시마슈도대학에서 교수를 했다. 이 무렵은 서울지국이 여전히 단신지국이었고 임기는 1년 정도였다. 히시키는 1971년 4월부터 72년 여름까지 서울특파원을 했다. 부임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것이 대통령선거였다. 박정희 후보가 야당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에 약 90만 표차로 신승을 거두었는데 부정이 없었다면 김대중 후보가 이겼을지도 모른다고 말해지던 선거였다.

당시 <교도통신> 서울지국은 을지로1가 사거리의 <합동통신> 2층에 있었다. 히시키 특파원의 숙소는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7층에 있었다. 7층은 많은 일본미디어 특파원들의 숙소로 되어 있었다. 당국이 감시하기 편하도록 한곳에 모아놓았다는 느낌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호텔 직원이 있어 각 지국에 출입하는 사람을 체크하는 구조였다.

1971년 4월에 대통령선거, 5월에 국회의원선거가 있고 7월에는 대통령 취임식이 행해졌다. 학생운동이나 재야운동의 움직임이 점차 활발해져 박정희 정권은 10월 15일에 위수령을 발동했고 다시 북한의 위협을 강조해서 12월 6일에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재야세력은 각계의 대표가 참가해 1971년 4월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수협)를 결성했고 리영희도 여기에 참여했다. 그해 10월 이 민수협에 참여했던 리영희 등이 중심이 되어 '64인 지식인 선언'을 발표하고 독재반대, 학원탄압 중지, 구속학생 석방, 대학생 강제입영중단 등을 요구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계엄령을 선포해서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개정해 유신체제에 들어갔다.

시국이 험악해지면 특파원의 호텔숙소에 일시 피신

이런 엄혹한 상황에서 리영희는 시국이 긴박해 귀가할 경우 신변에 위험이 닥칠 가능성을 느끼면 반도호텔에 있던 히시키 특파원 방으로 찾아가 1박, 2박 몸을 숨기는 일이 가끔 있었다. 히시키에 따르면 리영희만이 아니라 시인 김지하도 히시키 방에 몸을 감췄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리영희와 김지하가 동시에 히시키 방에 피신한 적은 없었는데, 박정희 정권도 외신기자들에게까지 손을 대는 것을 주저하고 있던 시대였다.

숙소인 방에 몸을 숨겼기 때문에 당연히 함께 식사를 하고 술을 먹게 되어 히시키와 리영희의 친교는 더욱 깊어졌다. 리영희는 술을 마시면 식민지시대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히시키의 기억으로는 당시 리영희는 대만의 장제스 정권의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 원고를 잘 썼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을 직접적으로 비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장제스 정권 비판을 통해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다.

당시 <합동통신> 사장은 나중에 외무부 장관도 했던 이원경이었다. 이원경 사장은 그래도 리영희를 감쌌지만 '64인 지식인 선언'으로 더 감쌀 수가 없었다. 리영희는 통신사에서 해직돼 1972년 한양대 교수 겸 중국문제연구소 교수로 가서 저널리즘의 세계에서 대학교수로 변신했다.

히시키의 후에도 <교도통신>과의 관계는 이어졌는데 1976년부터 79년까지 서울특파원을 했던 오노다 아키히로와 부인 오노다 미사코는 리영희 부부와 가족끼리 교제했다. 이 무렵 서울지국은 기본적으로 가족을 동반해서 3년 근무하는 지국이 됐다. 리영희가 1976년 한양대학에서 해직돼 반공법 위반으로 옥중생활을 하던 시기였다.

오노다에 따르면 리영희는 중국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교도통신> 서울지국을 방문해 일본 신문의 중국 보도를 체크하곤 했다. 당시 한국 미디어가 중국에 대해 그다지 상세하게 보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일본에서 나온 중국 관계 서적이 없느냐고 묻기도 해 오노다가 도쿄에 주문해 가져오게 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에도 중앙정보부나 경찰의 외신담당이 서울지국에 빈번히 출입했다. 리영희는 서울지국에 출입하는 정보부원을 보면서 오노다에게 "나는 현대중국의 일을 써서 문제가 되었지만, 중국에서 큰 움직임이 있으면 정보부가 자주 얘기를 들으러 온다"고 말했다.

리영희는 1976년 1차 교수재임용법으로 교수직에서 해임됐다. 1977년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내용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문제가 돼 구속됐다.

리영희가 구속되자 부인 윤영자는 활발한 석방운동을 벌였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등과 함께 항의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윤영자는 남편의 석방을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하거나 종로5가 기독교회관 주변에서 항의활동을 벌이곤 했다.

리영희가 구속돼 모친 최희저가 "(아들이) 어디에 갔어"라고 물으니 윤영자는 "학생을 데리고 제주도에 갔는데 폭풍을 만나 돌아올 수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서대문교도소에서 기소된 날 모친이 86세로 돌아가셨다. 같은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김지하가 영치금으로 캔디를 사서 보내줘 옥중에서 홀로 모친을 애도했다고 한다. 오노다에 따르면 리영희는 모친 장례를 위해 일시 가석방을 요구했지만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리영희는 "모친의 죽음에도 보지 못하게 하고, 장례에도 가지 못하게 하니 이런 비인도적인 정권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자주 분노를 표했다고 한다.

1979년 10월 27일 아침 수감 중인 학생이 "박정희가 죽었다"고 리영희에게 알려주었다. 리영희는 필자에게 "인간이 된 사람이라면 그것을 들어도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지만, 억제할 수가 없었다. 눈물과 웃음이 반복해서 솟아 올라왔다. 소인이었다"고 말했다. 리영희는 1980년 출소해서 한양대 교수로 복직했지만 5월에 광주사태(광주민주화운동)가 일어나 '배후조종자'의 한 사람으로 다시 체포됐다. 7월에 석방됐지만 또 한양대에서 해직됐다.

오노다 부부가 어느 때 외신기자클럽에서 리영희에게 프랑스요리를 대접했는데 리영희는 "솔직히 말하면 프랑스요리보다 한국의 온면이 더 좋지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리영희가 2000년 11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오노다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장애인용으로 개조된 리영희의 차량에 탄 적이 있다. 차의 클락션 소리는 아주 컸는데 리영희는 클락션을 빵빵 울리며 상당한 스피드로 운전했다고 한다. "장애인이 운전을 하고 있으니까 주위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지요"라고 웃으며 운전을 했다.

학술상 수상에 타사의 예전 서울특파원들까지 나와 축하 모임

리영희가 학술적인 상을 수상했을 때는 도쿄의 사학회관에서 일본의 옛 서울특파원들이 모여 리영희를 모시고 축하하는 모임을 한 적이 있다. 교도통신뿐만이 아니라 리영희와 교제가 있던 일본 미디어의 옛 서울특파원들이 모여 옛정을 새로이 했다. 가메야마가 편집국장을 하던 무렵에는 히시키가 전문 씨름꾼 경기인 스모를 모래판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는 자리를 주선해줘서 아주 즐거워했다고 한다.

필자는 한국어 연수를 마치고 1980년대 후반에 한국을 취재했다. 당시는 일본 미디어 전체 특파원 수를 15인으로 하는 쿼터제가 있어 각 매체마다 1사 1인의 특파원밖에 상주할 수 없었다. 필자는 3개월 비자를 받아 86년부터 88년까지 양국을 오가면서 87년 6월에 정점에 달했던 민주화운동으로 요동치던 한국을 취재했다.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이 쿼터제가 없어지자 89년부터 92년까지 상근서울특파원으로 일했다. 그 후에도 95년부터 99년,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세 차례 서울특파원을 지냈다.

한국은 19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를 이뤘지만 리영희는 1989년 <한겨레신문>의 북한취재 계획에 관련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160일간 구속됐다. 리영희가 석방됐을 때 필자는 쇠고기를 들고 자택으로 찾아갔지만, 리영희는 자택으로 돌아오지 않고 한겨레신문사로 가서 만날 수 없었다. 석방 축하로 무엇을 들고 갈지 고민했다. 교도소에서 나와 두부를 씹는다는 얘기는 알고 있었지만, 이것은 "두부처럼 순백의 마음으로 확 바뀌어 인생살이를 다시 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라는 설도 있어서 두부로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리영희는 잘못된 것을 저질러서 체포된 것이 아니어서 '그 발걸음 그대로'여야 했다. 결국 영양 보충에 도움이 되도록 쇠고기를 들고 간 기억이 있다.

필자에게 3개월 비자로 취재를 계속했던 1986년에서 87년은 기자생활 중 가장 열중했던 시기였다. 재야세력이나 시민운동가들과의 인간관계가 취재에 상당히 도움이 됐다. 87년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됐을 때는 공해반대운동을 하던 최열이 그날 아침 전화를 걸어왔다. 전투경찰의 검문을 헤쳐 나가서 명동 향린교회로 가보니 취재를 하는 외신은 <AFP통신>과 <교도통신>뿐이었다. 울산에서 노동쟁의가 일어나면 가톨릭에서 활동하던 이명준이 "울산에 가라"는 '지시'를 주었다.

그런 사정도 있어 민주화된 이후에도 재야세력이나 시민운동가들과의 인간관계는 이어졌다. 시민운동 모임에 가보면 이따금 리영희를 만났다. "자네는 이런 집회까지 취재를 하고 있나"라고 칭찬해준 일도 있었다.

▲서울특파원을 세 차례 역임한 히라이 히사시 <교도통신> 객원논설위원(오른쪽)이 황석영(가운데), 미야타 마리에(일본 문예지 <우미> 전 편집장)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미야타는 2022년 6월 서울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열린 김지하 추도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리영희재단

필자는 도쿄 본사로 돌아와 편집위원 겸 논설위원을 하던 때 정년까지 남은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다고 생각해 <지구 인간모양@코리아>라는 연재물을 시작했고 2009년 리영희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인터뷰 도중에 NLL(북방한계선)이 화제가 됐다. 리영희는 "왜 북방인지 알고 있나? 북쪽이 '침공해 오지 말라'는 라인이라면 남방한계선이었겠지. 북방한계선이라는 것은 미국이 휴전협정에 반대하던 이승만에게 더는 북으로 가지 말라고 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말하고 수납장에서 자료들을 가져와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필자는 인터뷰의 원래 취지였던 리영희의 인생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설명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자네도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돼요"라고 질타를 했다.

교도소에서 입영중인 장남의 편지 받고 울어

이 인터뷰에서 리영희는 지식인으로서 가혹한 반평생을 보냈지만 가족에는 "미안했다"고 말했다. 1979년 광주교도소에 있던 때 군에 가 있던 장남으로부터 "대학생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생각을 알게 됐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무서웠고 미움의 대상이었다"고 솔직한 심정을 쓴 편지를 받았다. "교도소에서 꽤 울었다. 밖에서 아무리 큰일을 하고 있어도 집안에서는 부드러운 아버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나는 착각하고 있었다. 사회의 가치도 가족의 토대 위에 있어야만 한다"고 술회했다.

그리고 인생을 되돌아보며 "개인적으로는 나의 책을 읽은 젊은이들에게 문제의식을 갖게 했고 교도소에까지 간 사람들도 있어 미안하다는 마음이 있다. 한편으로 지식인으로서 어느 시기의 역사적인 사상전환에 그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문장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고통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리영희는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사회 전체와 자신을 일체화하는 보편적인 가치에 봉사하고 변혁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며 사회의 변화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슬슬 인생의 마감을 해야 할 시기. 20년 이상의 투쟁이 민주화를 가져왔고 자신이 일조했다는 것에 일종의 만족감이 있다"고 인생을 돌아보았다.

▲히라이 히사시는 한국 취재 경험이 길어서 국내에 한국인 지인들이 많다. 왼쪽부터 이명준, 김효순, 김정남, 미야타 마리에, 히라이 히사시. ⓒ리영희재단

*히라이 히사시 <교도통신> 객원논설위원은 1975년 와세다대를 나와 <교도통신>에 입사해 서울특파원, 베이징특파원 편집위원 겸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서울특파원을 세 차례 역임한 한반도 전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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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이 2010년 12월 별세했을 때 교류가 있었던 일본인 4인의 명의로 조전이 왔다. 3인은 <교도통신> 서울특파원을 지냈고 에구치 이쿠코는 리영희가 1년 전 병문안을 갔던 에구치 히로시의 부인이다. 문장은 히라이 히사시가 대표로 작성했는데 전문을 소개한다.

리영희 선생 영전에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고 듣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가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해서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교도통신>의 서울특파원으로서 선생과 접해서 많은 것을 배웠고 격려를 받았습니다. 한국이 민주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선생이 저널리스트로서, 지식인으로서 투옥 등 숱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지식인의 책임을 다하고 살아가는 모습은 저희들에게도 큰 감동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서울을 떠난 뒤에도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작년에는 저희들의 선배인 고 에구치 히로시님을 병문안하기 위해 불편한 몸인데도 일본을 방문하셔서 선생과 재회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선생의 날카로운 말씀이나 쾌활한 웃음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대단히 아쉽습니다. 선생의 서거는 한국뿐만이 아니라 이웃나라 일본의 후배 저널리스트에게도 큰 손실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민주화됐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선생이 만들어내신 큰 성과입니다. 부디 편안히 쉬시기 바랍니다.

에구치 이쿠코, 히시키 가즈요시, 오노다 아키히로, 히라이 히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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