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명, 2명, 3명… 세 번째 '비극적 죽음'이 발생하고 나서야 정부는 전세사기 피해자의 '절망적 호소'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아니, 비판 여론의 확산을 의식한 대응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피해자들과 시민사회는 이미 수개월 전부터 대책 마련을 촉구해 왔다. 하지만 그 사이 정부는 별 실효성 없는 방안들만 내놓는데 그쳤다. 최소한, 경매 일정 중단과 같은 조치가 조금이라도 일찍 이뤄졌다면 안타까운 희생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전세사기와 깡통전세로 인한 집단적 피해사례가 전국에서 속출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곳 말고도 앞으로 더 많은 지역에서 전세사기 '폭탄'이 터질 위험이 큰 상황이다. 한 언론 탐사보도에 따르면, 전국에 전세사기 조직과 연결된 악성 임대인이 170명이 넘고 이들이 사들인 빌라가 2만 6000여 채나 되는데, 곧 전세 만기가 돌아오는 집이 적지 않아 피해 규모가 올 한 해만 2조 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대규모 전세사기의 징후를 포착하고도 적시에 적절한 대응을 하는 데 실패한 정부의 책임이 크다.
정부 책임은 정책대응의 실기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악성 임대인과 금융사 등에 대한 관리‧감독 소홀뿐만 아니라 '빚내서 집 사라', '빚내서 세 살라'는 대출 중심 주거정책과 투기 부양책 등이 문제를 키운 원인이라는 '전세사기‧깡통전세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의 진단에 동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책위의 주장대로 "세입자들의 잇따른 죽음은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벼랑 끝으로 등떠민 정부 정책에 기인한 사회적 타살"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바로 가기 : 참여연대 4월 18일 자 논평 '') 한 전세사기 피해자의 말처럼, "2023년 현재, 전세사기 당한 피해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바로 가기 : )
피해자들에게 전세보증금은 은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자신의 '삶 전부'다. 그래서 지금의 전세사기‧깡통전세 문제는 문자 그대로 사회적 재난이다. 이 재난이 주거 약자의 생존을 위협하는 파국으로 치닫지 않게끔 그에 상응하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이유다. 더 이상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나오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는 말이다. 정부도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최종 정책결정자의 발언과 정부 대책의 수준을 보면 인식의 온도차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세 번째 희생자가 나온 다음 날 열린 국무회의에서 경매 일정 중단(유예)을 지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전세사기 예방 및 피해자 지원과 관련된 기존 정책들을 언급하면서, "전세 사기는 전형적인 약자 상대 범죄"이고, 사회적 약자가 대부분인 피해자들이 "피해 구제 방법이나 지원 정책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많다"며 "찾아가는 지원 서비스 시스템을 잘 구축해달라"고 당부했다.
언뜻 피해자를 배려하는 듯 보이는 이 발언의 이면에는 피해의 심각성에 대한 무지와 함께 이들에 대한 편견이 담겨 있다.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대로 파악조차 못하는 존재라고 인식하는 이면에는 애초 전세사기 위험성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어리숙하고 부주의한 사람이라는 편견이 짙게 깔려 있다. 절망적 현실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이들에게 이 말은 모욕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개인 부주의(피해자 탓하기)' 프레임과 '범죄' 프레임이 부각될수록 정부의 실정과 더 큰 구조적 문제는 덜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경매 유예는 최소한의 상식적 조치일 뿐이다. 살던 집에서 쫓겨나지 않도록 하거나 임시거처를 제공하는 것 역시 최소한의 재난대응책이다. 사기 유형이 제각각이고 피해자들마다 처지가 다르긴 하지만, 이들이 공통되게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전세보증금을 돌려받는 것이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공적 시스템을 믿었다가 하루아침에 생명과 같은 전세보증금을 강탈당하게 생긴 것이다. 현재 주거안정성 회복을 위한 여러 대안들이 거론되고 있지만, 다시 빚을 지도록 만드는 것은 주거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다. 빼앗긴 보증금을 되돌려 주는 것이 우선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피해주택 공공매입'과 '피해구제 특별법' 제정이 조속히 이뤄질 필요가 있다.
피해자 중심 관점과 접근이 중요한 이 순간에도 정부는 책임 회피와 곳간 지키기에 여념이 없는 것 같다. 며칠 전 공공매입에 부정적이었던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하루 만에 입장을 선회하여 LH 매입임대제도를 활용해 피해주택을 매입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 방안 역시 보증금 반환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지만, 이 과정에서 정부의 오락가락하는 메시지가 심적으로 극도로 취약해진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모든 언어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그것이 정책결정자의 언어라면, 그리고 재난 커뮤니케이션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발언과 정책 행보를 놓고 볼 때 정부가 피해자들의 입장에 공감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는 국가 예산으로 피해 보증금을 돌려주자는 방안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사항이라며 얼버무리는 입장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부유층의 보유세 경감 혜택이 큰 공시가격 인하 결정은 '사회적 합의'로 도출된 것인가? 정부의 공감능력은 부유한 이들에게 선택적으로 활성화되는 듯하다.
정부는 은퇴한 고령 1세대 1주택자의 세부담이 과도하다는 논리 등을 들며 공시가격 인하 등 각종 수단을 동원해 보유세를 깎았다. 올해 종부세 인하로만 2조5000억 원의 세수(국세) 감소가 예상된다고 한다. 공시가 인하의 여파는 세수 부족에 따른 복지재정 여력 감소에 그치지 않는다. 공시가 하락이 반영되는 5월부터 전세대출 한도가 줄어들면서 깡통전세가 속출하게 될 위험이 커진 상황이다. 이 비용은 부동산계급의 아래에 있는 이들에게 전가될 것이다. 누군가 이득을 얻을 때 다른 누군가는 피해를 입는다. 부유층을 위한 보유세 완화는 부동산 가격 폭등과 다를 바 없는 "합법적 약탈"(<부동산 약탈국가>(강준만 지음)) 수단이다.
따라서 이번 전세사기 피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한 큰 그림에는 부유층의 불로소득을 늘려주는 '부동산 약탈체제'를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전체 그림 속에서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의 체제적 질서의 정당성에 대한 심각한 위기이자 도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니 피해자들에게 보증금을 돌려주는 것은 정부의 '선처'를 구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땅에 짓밟힌 주거정의를 회복하고 우리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선행조건이다.
우리는 정부와 대통령이 이제라도 피해자들에게 정식으로 사과하고 이들의 절박한 외침에 귀 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효율성과 재정건전성 논리를 뛰어넘는, 사람을 살리는 대책을 제시하기 바란다. 나아가 주거 약자의 생명을 갉아먹는 약탈적 부동산 체제를 언제까지 이대로 방치해 둘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재난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대책위의 요구처럼 '전세가격(보증금) 규제'와 '전세대출·보증보험 관리 감독 강화' 등의 조치를 통해 임대인과 임차인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를 변화시켜 나가면서 주거 정책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시민들의 강력한 지지와 연대가 필요하다. 특별법 제정 촉구 서명운동에 동참하는 것을 비롯해 다양한 경로와 방식의 실천을 통해 정부를 압박하고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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