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소비하자는 전력수급기본계획
에너지 산업에서도 '성장이 아니면 죽음뿐!'이라는 외침은 반복된다. 전기사업법에 따라 2년마다 수립하는 15년짜리 법정 계획인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은 정부의 에너지사업, 특히 전력산업 계획이다. 법정기한에 따르면 제10차 전기본과 제11차 전기본은 각각 2022년 말, 2024년 말 수립되어야 했지만, 정부는 제10차는 뒤늦게 2023년 1월에 수립했고, 제11차 전기본은 일정을 반년 당겨서 2024년 7월 중 수립한다고 한다. 전기본은 향후 발전소를 어떻게 허가하고 지을 것인지가 포함되는 계획이다. 계획의 근거는 수요예측이다. 얼마나 전력이 필요할지 예측하고 그것에 따라 공급하기 때문에 과도한 수요예측 자체가 반복되는 문제로 지적된다. 에너지원별 비중에 앞서, 전력 수요는 계속 증가한다. 경제 성장이 가파른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전기가 필요할까?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의 전환과 같은 일부 반가운 증거들도 있지만, 과연 필수적인 전력 수요인지 의심스러운 것들도 있다. 특히 최근 제10차 및 제11차 전기본에서는 데이터센터가 필요하니 발전소도 더 많이 지어야한다는 논리가 눈에 띈다. 데이터센터는 IT서비스에 필요한 통신기기들을 모아놓은 건물이다. 서울시 에너지 다소비 건물 부동의 1위는 서울대학교이지만, 나머지 상위권 자리를 대학병원들 대신 데이터센터들이 차지하게 된 것이 겨우 최근 몇 년이다. 제10차 전기본에 따르면, 데이터센터 1개당 평균 전력소비량은 57.2기가와트시(GWh)이며 2021년 7.9테라와트시(TWh)의 전력소비량을 기록했고, 2030년에는 19.4TWh의 전력을 소비할 것으로 전망된다. IT 강국 한국에 데이터센터는 필수불가결한 것일까? 세련된 그 이름과 달리 데이터센터는 '디지털 오염'으로 악명이 높은 인프라다. 올해 한국어로 번역된 기욤 피트롱의 책 <'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는 '녹색 디지털'이 얼마나 위험한 환상인지 밝힌다. 바로 옆의 친구에게 좋아요를 누르면, 그 신호는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인터넷 인프라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익히 알려져있듯 에너지 인프라 시설은 국내외로 사람의 터전과 환경을 파괴해왔다. 저자는 디지털 산업이 녹색이 경제성장도 가져오면서 친환경적이라는 매혹적인 이미지는 국제적으로 편향되게 기획된 것임을 폭로한다. 게다가 데이터센터는 전기 먹는 하마다. 내로라하는 세계 초국적 기업들은 자신들의 데이터센터를 한국에 짓고싶어한다. 낮은 전기요금과 고품질의 통신 인프라가 받쳐주기 때문이다. 즉, 늘어나는 데이터센터는 전력을 더 많이 생산해야 하는 원인이 아니라, 반성적 고찰없이 반복되는 전력수급기본계획의 결과이다. 공공성이라는 이름으로 유지해온 낮은 전력요금과 고품질의 전기에너지 서비스는 글로벌 대기업의 자원이 된다. 한국은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할 것 없이 기후악당의 악명에 맞게 디지털 산업의 보조를 맞추어 주는 역할을 자임한다.에너지기본권의 하나로 덜 쓸 권리를 요구하자
국내에서 에너지 전환의 가능성을 사회적인 '에너지 과소비' 극복으로 보고 접근하는 연구는 찾기 어렵다. 공급에서의 전환도 중요하지만, 수요에서부터 그 전환을 이끌어내는 아이디어도 중요하다. 이에 에너지기본권이나 에너지시민권과 같은 개념들은 유용한 자원이 될 수 있다. 국내에서 에너지기본권이라는 말은 에너지 빈곤층이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쓸 수 있게 하는 에너지복지의 의미로 많이 쓰인다. 이러한 에너지기본권이 사회권적 권리라면, 자유권적 권리도 존재한다. 예컨대 에너지 산업을 운영하거나 프로슈머(prosumer)로서 에너지 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이다. 개인의 권리란 시민적 사회적 책임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점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법치국가들이 폭넓게 공유하고 있는 상식이다. 따라서 에너지기본권 역시 마찬가지로 개인주의적 자유와 사회적 제약 사이에 존재해야하고, 더불어 환경적 제약 사이에 존재해야 한다. 즉, 에너지는 지구환경과 생존과 긴밀히 결부된 권리로 해석되어야 하고, 돈이 있다고 마음껏 살 수 있는 시장적 성질은 제한되어야 한다. 과학자들은 이제 지구의 행성적 한계 내에서 인간들이 택할 수 있는 경로가 많지 않음을 경고하고 있다. 이제는 정말 과소비에 민감해질 용기, 자원과 에너지를 덜 쓸 권리를 요구할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의 지속불가능한 시스템을 당장 멈추기가 정 어렵다면, 최소한 아이들 교과서 수준에서 나오는 덜 쓸 권리 정도는 더 크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프랑스의 '반 블프' 공익광고가 주는 울림은 단순히 에피소드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도 언젠가 정부가 성장에 대한 신화를 벗어나는 전환의 주체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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