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포르토프랭스의 아버님 묘소는 무사합니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포르토프랭스의 아버님 묘소는 무사합니다" [신음하는 아이티]<4> 원희룡 의원 인터뷰

아이티 대지진 현장을 직접 보기 위해 수도 포르토프랭스를 찾은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미션'이 있었다.

한 지인의 아버지 묘소가 이번 지진으로 혹여 잘못되지 않았을까 확인하는 일이었다. 포르토프랭스에 아버지 묘소가 있다는 지인은 원희룡 의원이 아이티로 간다는 보도를 보고 전화를 걸어 간곡히 부탁했다.

현지인을 대동하지 않으면 쉽게 움직일 수도 없는 포르토프랭스에서, 원 의원은 그가 보내준 지도를 들고 공원묘역을 찾았다. 다행히 묘역은 숙소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리고 더 다행인 것은 그 묘역이 대지진의 피해로부터 벗어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기막힌 사연을 가진 지인의 애타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줄 수 있다는 생각에 원 의원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러나 그 후 지진 현장의 처참한 모습을 보게 된 그의 심정은 편할 수만은 없었다. 5년 전 인도네시아 쓰나미 피해 현장에 있었을 때와는 또 다른 참상이 펼쳐진 도시를 보며 원 의원은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원희룡 의원이 아이티에서 보고 느낀 것은 무엇인지 문답으로 정리했다. 이 인터뷰는 그가 아이티를 떠나기 전날인 18일(현지시간) 밤 숙소에서 진행됐다.

▲ 원희룡 의원이 대통령궁 부근에서 만난 한 아이에게 음식을 주고 있다. ⓒ프레시안


"폭동조차 일으킬 수 없는 무기력한 사람들"

프레시안 : 정치인으로 하루하루 일정이 빡빡할 텐데, 왜 아이티에 오겠다고 생각했나?

원희룡 : 아이티 지진이 사상 최악의 재앙일 가능성이 많다는 외신을 보면서 밤에 잠이 안 왔다. 머나먼 외국의 일이지만 크게 보면 인류의 재앙이기도 하고…. 과거 우리가 겪었던 고통에 대한 기억들이 겹치면서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 사망자 처리를 담당하는 검사로 일했고, 정치인이 되고 나서는 2004년 쓰나미 현장에 가기도 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우리가 겪은 전쟁과 학살의 역사가 떠오르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뭔가 반응을 해야 그 처참한 느낌을 넘어설 수 있겠구나, 이 기분에서 벗어나는 길은 어떤 방법으로건 참여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15일 아침 보좌관들과 긴급회의를 했다. 꼭 해야 할 일정을 따져 보니까 한 5일 정도는 자리를 비워도 지장이 없다고 판단했다. 아이티에 가서 그 느낌을 한 조각이라도 가져오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정치를 시작한 것도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해결하는데 힘이 되고 싶어서였는데, 그래서 더욱 가야 한다고 느꼈다.

나 한 사람이 간다고 해서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겠지만, 거기서 보고 느낀 것을 한국 사회에 가져오고 내 삶 속에 녹여 내는 게 의미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나를 밀어내는 힘이 있었던 것 같다.

프레시안 : 아이티까지 온 경로를 개략적으로 소개한다면?

원희룡 : 워낙 먼 나라고, 지진 때문에 국가 기능이 정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현장에 가는 이동 수단을 찾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겨우 찾아낸 게 뉴욕을 거쳐 아이티의 옆 나라 도미니카로 와서 육로로 이동하는 방법이었다. 오기로 결정한 날 저녁 7시 반 비행기표를 끊었다.

인도네시아 쓰나미 현장에 갔을 때도 그랬지만 재난 지역에 가는 것은 여행사가 마련해주는 패키지여행이 아니다. 한 지점에서 문제를 해결해서 다음 지점까지 가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부딪치면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돈과 시간이 무한정 들어가기 때문에 가능한 자금과 시간을 확보해 출발했다. 현지시간으로 16일 밤에 도미니카에 도착했고, 몇 시간 후 들어온 우리 정부 구조단의 버스를 얻어 타고 다음 날 국경을 넘어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도착했다.

중앙 119 구조대는 도착 직후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수색작업에 나갔다. 나도 현장이 어떤지 파악하고 싶어서 따라 나갔다. 나가자마자 정전 때문에 온통 깜깜해진 도시를 만났다. 그런 어둠 속에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길거리로 나와 어디론가 오가고 있었고, 폐허가 된 건물 밖으로는 천막도 아닌 거적때기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21세기에 이런 풍경이 있을 수 있나 싶어 황당했다.

다음 날은 직접 구조작업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상황을 다양하게 보는 게 더 필요할 것 같아 가장 피해가 심한 곳을 중심으로 여러 군데를 돌아 봤다.

▲ 대통령궁 뒤편 궁궐수비대 앞에서 현지인에게 설명을 듣고 있는 원희룡 의원 ⓒ프레시안

프레시안 : 아이티는 어떤 나라인가?

원희룡 : 우선 최빈국이란 말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지를 알 수 있는 나라다. 지진이 전에도 참 처참한 나라였다. 제대로 된 일자리라고는 극소수 밖에 없는, 전국민이 실업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라…. 새벽이 되면 모든 사람들이 거리로 나가지만, 사실 마땅한 일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는 느낌이었다.

한 나라의 수도라는 곳에 있는 도로는 포장된 곳이 절반도 안 되고, 비포장도로도 등산로 수준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도로를 맨발로 걷거나 각양각색의 조각을 댄 것 같은 신발을 신고 걷고 있다. 티셔츠와 청바지 하나만은 우리가 입는 것과 비슷햇지만, 1년 내내 거의 같은 옷을 입고 다니니까 그 역시도 비참하긴 마찬가지였다.

장터에 나온 물건들도 열악하다. 한 좌판 전체의 물건을 몇 천원 만 주면 살 수 있어 보였다. 6.25 피난민 장터가 아마 그랬을 것 같다. 어렸을 때 개인적으로 겪었던 가난, 시골에서 봤던 가난, 지금도 있는 서민들의 가난 등이 얼핏얼핏 겹쳤다. 아이티의 거의 모든 국민은 유엔이 정한 빈곤선 이하에 있기 때문에, 북한하고도 비교가 됐다. 그 위에 지진이란 재난까지 겹쳐진 걸 보니까 '아, 이 가난한 백성들을 어찌 할꼬'라는 생각만 들었다. 막막하고 처참하고 뭘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답답했다.

그리고 아이티에는 지금 정부가 없다. 가난한 백성들은 대재앙을 당했는데 대통령은 이틀 동안 사라져 있었고, 공무원·경찰·군대도 없다. 나서서 질서를 잡는 사람도 없다.

그러다 보니 공항에 구호물자는 쌓여 가는데 주는 사람 입장에서도 어디에 뭘 어떻게 줘야할지 막막하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미군 수송기가 떨어뜨린 물건이 있는 곳으로 앞 다퉈 달려가 주워가면 끝인 상황이다. 사람들이 어딘가로 계속 뛰고 모이면서 혼란이 더 커지고 있다.

정부에 준하는 자율 통치기능이라도 있으면 좋은데, 시민단체나 기업·민간 영역에서도 조직되어 있고 권능을 가진 시스템이 전혀 없다. 이 때문에 아이티가 폭동 직전이고 치안이 불안하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은데, 이 사람들은 폭동조차 쉽게 못 일으킬 정도로 무기력한 상황이라고 보는 게 적절할 것 같다.

일반인들은 맹목적일 정도로 순진하고 무력하다. 길가에 주검이 쌓여 있는데도 코를 막고 지나갈 뿐이다. 폭동을 일으킬까봐 무서운 사람들이 아니라 그저 한 없이 무기력한 사람들이다.

황당한 현장과 다행스런 장면들

프레시안 : 피해가 심한 곳 중심으로 돌아봤는데, 인상적인 장면은 있었나?

원희룡 : 주민들은 해가 뜨자마자 '탑탑'이라고 부르는 승용 소형 트럭을 타고 끊임없이 어디론가 간다. 그런데 사실 뚜렷하게 갈 곳은 없다. 어딘가에 먹을거리가 있을까, 일거리가 있을까, 하다못해 주워 먹을 거라도 있을까 싶어서 가는 것이다. 지진으로 폐허가 된 건물 잔해 속에서 줄톱으로 철사나 철근을 끊어서 고철로 팔아 보려고 벌떼 같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면서 처참함을 느꼈다.

부두 앞 시장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아침 일찍 시장에 와서 기껏 시금치 같은 채소 몇 포기를 사간다. 사람들은 그렇게 아주 기초적인 물자를 구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하나라도 건지면 운이 좋은 날일 것이다. 정부 청사가 무너진 건물에서는 넝마 내지는 천조각을 줍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대통령궁 옆에 있는 이 나라 최대의 공원은 전국민의 노숙자화를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주부들은 숯을 얻어서 풀을 쑤듯 음식을 하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먼지가 펄펄 나는 곳에서 밥 비슷한 음식을 먹고 있었고, 야채를 넣어 전골 같은 걸 끓이고 있는 집도 있었다. 그마저도 못 하는 천막의 가족들은 며칠 째 배를 곯고 있는 게 아닌지 염려가 됐다.

전국민이 노숙자가 되다 보니 남녀를 불문하고 아무데서나 대소변을 보고 빗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에서 몸을 씻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아주 오래 전에 일부의 시골에서나 그랬는데, 이곳 대통령궁 앞에서 그런 장면을 볼 수 있다는 게 황당하기만 했다.

그래도 아이들의 모습은 천진난만했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포즈를 취하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아이들은 '왓츠 유어 네임?' 하며 말을 붙여 보려고도 한다.

일회용 접시에 줄을 매달아 연을 날리고, 공이 있으면 축구를 하고, 카드놀이도 한다. 전쟁터에서도 인간의 생활이 있는 것처럼, 지진의 폐허 속에서도 순진하게 장난을 치고 노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 모습은 여러 가지 느낌을 주었다.

▲ 아이들은 낯선 동양사람한테도 붙임성있게 말을 붙였다. ⓒ프레시안


프레시안 : 한국에서 중요한 부탁을 받아 공원묘역을 찾았다고 하던데. 그 얘기도 소개해 달라.

원희룡 : 아이티에 간다는 소식이 언론을 타자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이티에서 살다가 1990년대 말에 귀국한 분인데 사연이 많았다. 아버지가 아이티에서 한국산 타이어와 차량용 배터리 같은 걸 수입해서 파는 일을 하셨는데 불행히도 1996년 돌아가셨다. 아이티 소년 괴한들이 쏜 총격으로 돌아가신 것이었다. 그래서 포르토프랭스에 있는 공원묘역에 안치하고 가족들은 모두 귀국했다.

그분은 이번 지진 소식을 듣고 아버지의 묘소도 피해를 입지 않았을까 애를 태우고 있다가, 내가 간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을 한 것이다. 도착하고 둘째 날 날이 밝자마자 그 분이 보내준 지도를 가지고 묘역에 갔다. 철문이 잠겨 있고 수위는 문을 열 수 없다고 해서 밖에서만 볼 수 있었지만, 다행이 공원묘역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지도에 표시를 해 둔 아버님 묘소 쪽도 모든 게 그대로였다. 들어가는 길 옆의 축대가 약간 파손되어 있었지만 묘소랑은 먼 곳이었다. 내 일같이 기뻤고 다행스런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돼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한국, 졸부의 이기심에서 탈피해야"

프레시안 : 정부 구조대의 활동은 어떻게 보았나?

원희룡 : 중앙 119 구조대 25명, 의료지원단 8명, 행정을 지원하는 코이카(KOICA·한국국제협력단) 직원 2명으로 구성돼 있다. 워낙 훈련이 잘 된 분들이기 때문에 도착하자마자 아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활동했다. 구조와 의료봉사 대상지를 스스로 찾아야 하는 문제까지 겹쳐서 꽤나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장까지 오는데 3일이 걸려 지진 발생 5일 만에 도착했기 때문에 생존자를 구조할 가능성은 급격히 떨어져 있었다. 119 구조대가 실력발휘를 못한 것이다. 반면 중국과 스페인 같은 나라에서 온 구조대는 사건 발생 3일 만에 도착해서 몇 명을 구조해 냈다.

앞으로는 군과 얘기를 해서 사고가 나면 전용기를 타고 즉시 투입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국력으로 봤을 때 충분히 가능하고 필요한 일이다. 119 구조대는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따라서 전용기를 지원하고 좋은 훈련센터를 마련하면 더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쓰나미와 지진 피해를 직접 보면서 내린 결론은 이렇다. 우선 구조대가 즉시 투입되도록 이동 수단, 즉 전용기가 확보돼야 한다. 그리고 구조대의 안전이 확보되어야 하고, 그 다음이 수색과 생명 구출이다. 다음으로는 의료 지원과 구호 식량 지급, 주민 주거 환경 마련 순서로 가야 한다. 그걸 국가가 체계적으로 책임져 줘야 한다.

이번에는 가장 중요한 이동수단과 안전 확보에서, 도미니카 주재 한국대사관도 많은 노력을 했지만, 현지에 나와 있는 한국의 몇몇 기업 관계자 등이 정부를 많이 도와줬다. 아이티에 진출한 섬유업체 현지법인 관계자들, 현지 자본과 합작을 해 발전소를 짓고 있는 한국 기업 직원들, 유엔 평화유지군에서 활동하는 이선희 소령, 그리고 대사관의 네트워크가 잘 돼있었기 때문에 교민들에 대한 초기 대응, 정보 공유, 구조대의 이동수단 확보가 가능했다. 기업 관계자들이 확보하고 있는 현지인들이 앞장서서 일을 해줬다.

앞으로는 그런 모든 것들이 정부의 시스템을 통해 마련되어야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는 어쩌면 다행일 수 있었다. 한국의 민간단체들이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지만 모금을 아무리 많이 해도 이동 수단과 치안 확보가 따라주지 않으면 어렵다.

▲ 폐허가 된 건물 잔해 옆의 원희룡 의원 ⓒ프레시안


프레시안 : 정부가 처음에 100만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했다가, 1000만 달러로 올려서 발표했다.

원희룡 : 100만 달러를 발표했을 때 너무 적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교민이 별로 없고 전략적인 중요성도 없어서 그런 게 아닌가 짐작만 하고 있었는데,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초기에는 의무적인 갹출 정도로 여긴 것 같았다. 그러다가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들이 몇 백만 달러씩 지원을 하겠다고 하고, 1억 달러를 내는 통신회사가 나오면서 각국의 지원액도 조금씩 올라간 게 아닌가 한다.

어쨌든 1000만 달러를 하겠다고 하니 늦게나마 다행이다. 외교부에서 아이티 지원 민관합동회의를 했다고 하는데 그 역시도 잘 한 일이라고 본다. 인류를 위한 활동이나 대북 지원 같은 걸 보면 우리 종교단체나 엔지오들의 활동력이 굉장히 우수하다. 우리 국민들은 한 번 감동을 받으면 적극적으로 의사표시를 하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국가 차원에서 뒷받침해 줄 필요가 있다.

우리가 손해 보는 것 아니냐? 천만의 말씀이다. 졸부의 이기심에서 탈피하기 위해서, 돈만 밝히는 선진국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 유럽 같은 나라들을 봐도 인류의 아픔을 함께 하려고 하는 건 훨씬 더 성숙하고 위대한 삶을 사는 것이다. 정부가 민간 활동의 여건을 마련해 주고…. 언론에 대해서도 귀찮다고 생각하지 말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을 해야 한다.

좀 더 길게 보면 아이티에 필요한 것은 도로·전기 같은 사회기반시설과 일자리이다. 한국의 건설 기술이 세계 최고니까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적극적으로 살펴봐야한다. 또한 현재 아이티의 발전 사업에도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는데, 한국의 경쟁력과 국제적인 재원을 묶을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야 한다.

또 현재 아이티에는 우리 의류업체가 진출해 있다. 아이티에서 생산되는 의류는 미국에 무관세로 수출되기 때문에 매우 유리하다. 전국민이 실업자인 나라에서 우리 기업이 3000명의 일자리를 창출한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개성공단 수준의 의미는 아니겠지만 우리 중소기업들이 할 수 있는 부분을 국가가 밀어 줘야 한다.

여기서 단순 노무직은 월 60달러 정도의 인건비가 들고, 일반 노무직은 100달러, 기능직이라고 해도 300~400달러 수준이기 때문에 임금이 매우 싸다. 한국의 경제 규모에 비해서는 작지만 아이티로 볼 때는 국가 기능에 해당하는 일을 우리가 할 수 있다. 효과가 큰 것이다. 세계 최빈국에서 이런 일을 한다는 상징성도 크다.

퍼붓자는 말이 아니라, 어차피 우리 기업들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기업들을 어떻게 지원할지 길을 열어주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절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아니다.

프레시안 : 긴 시간 말씀 감사하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원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2-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