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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있어라' 강조한 '박통', 은밀히 뒤통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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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있어라' 강조한 '박통', 은밀히 뒤통수쳤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54> 제3공화국의 탄생, 첫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일곱 번째 이야기 주제는 제3공화국의 탄생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5.16쿠데타, 첫 번째 마당] 박정희 쿠데타 연재는 왜 그 신문에서 사라졌나

[5.16쿠데타, 두 번째 마당] 오랜 꿈 이룬 '박통'…대한민국은 짓밟혔다

[5.16쿠데타, 세 번째 마당] 박정희는 왜 한국인의 '노예근성'을 주목했나

[5.16쿠데타, 네 번째 마당] 청와대·참모총장의 위험한 선택…헌법은 죽었다

[5.16쿠데타, 다섯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 미국이 개의치 않은 이유

[5.16쿠데타, 여섯 번째 마당] 정치 깡패 이정재는 진정 죽어 마땅했나

[5.16쿠데타, 일곱 번째 마당] 나라 구한 박정희? 장준하는 왜 그리 판단했나

[5.16쿠데타, 여덟 번째 마당] 청와대 '부정 선거' 앞잡이, 정보부…어쩌다?

[5.16쿠데타, 아홉 번째 마당] '전 재산 헌납' 삼성 약속은 왜 물거품이 됐나

[5.16쿠데타, 열 번째 마당] 박정희 거듭 구한 은인, 제대로 뒤통수 맞다

[5.16쿠데타, 열한 번째 마당] '박통'의 특별한 선배, 왜 간첩으로 죽어야 했나

[5.16쿠데타, 열두 번째 마당] '장면 맹비난' 박정희, 사실은 대부분 따라 했다


프레시안 : 제3공화국의 탄생 과정은 반칙의 연속이었다. 쿠데타 자체가 반칙이기도 하지만, 5.16쿠데타 세력은 그 후에도 권력을 내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거듭 반칙을 했다. 이를 되짚어보면, 박정희와 김종필 등은 민정 이양과 군 복귀를 이야기한 '혁명 공약'을 처음부터 지킬 생각이 없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박정희 군사 정권은 민정 이양기를 맞으면서 아주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건 권력을 계속해서 유지하려는, 민정 이양 후에도 권력을 잡으려는, 대통령이 되려는 박정희나 김종필의 야심이 큰 벽에 부닥쳤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다.

군사 정권이 5.16쿠데타가 성공했다고 1961년 5월 16일 새벽에 방송을 했을 때 '혁명 공약' 제6항이란 걸 내놨다. '5.16 혁명 공약 여섯째' 해가지고 이렇게 발표했다.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이 여섯 번째 항목을 정말로 지키려는 의사가 처음부터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너무나 많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런 공약을 했는지, 공약을 안 하면 쿠데타가 성공하는 데 큰 장애에 부닥칠 거라고 봤기 때문에 이 공약을 집어넣었는지는 알기가 어렵다.

프레시안 : '혁명 공약' 제6항은 박정희를 비롯한 쿠데타 핵심들이 '우리는 대통령이나 총리 같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천명한 조항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이라는 조건을 달아 빠져나갈 길을 열어두긴 했지만, 쿠데타 세력으로선 민정 이양 문제가 계속 골칫거리였다.

서중석 : 5.16쿠데타 후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이 되고 조금 있으면 최고회의 의장이 되는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은 민정 이양을 해야 한다는 것을 처음부터 명확하게 표명했다.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일 때인 1961년 5월 17일, 장도영은 케네디 미국 대통령에게 바로 이 여섯 번째 항목을 포함한 '혁명 공약'을 명시해 서한을 보냈다고 돼 있다. 군사혁명위원회가 최고회의로 바뀐 5월 19일, 그리고 같은 달 29일 기자 회견을 했을 때 장도영은 '조속한 시일 내에 민정 이양을 하겠다'고 얘기했다.

언론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미국도 이 부분을 아주 중시하고 환영했다. (1961년 5월 26일, 케네디 대통령은 장도영의 서한과 관련해 "정권을 민간인에게 이양할 의도를 표명한 데 대해 (…) 만족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편집자>) 사실 언론은 쿠데타란 건 일시적인 것이고 정상적인 민간 정부가 바로 다시 들어서야 한다는 것을 쿠데타가 일어난 바로 그때부터 주장했다. 한 신문은 5월 16일 자 사설에서 '비상사태 종결은 전 국민이 하나같이 원한다'고 표현했다. (<조선일보>는 5.16쿠데타 당일 사설을 통해 "단 하루라 하더라도 불필요한 비상사태의 계속을 원하지 않는 것이 전 국민의 기망(冀望)일 것"이라고 밝혔다. <편집자>) 1960년대 후반 이후 언론이 꼼짝 못하는 것에 비하면 5.16쿠데타가 났을 때는 언론이 그래도 할 소리를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조속한 민정 이양' 보도에 철퇴를 가한 5.16쿠데타 세력

프레시안 : 박정희를 비롯한 쿠데타 세력의 핵심들은 어떤 태도를 취했나.

서중석 : 5월 23일 박정희도 기자 회견에서 '적시‘에 총선거를 실시하겠다며 "군대가 필요 이상으로 정권을 지속할 생각은 없다", 이렇게 밝혔다. '적시'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좀 희망적인 발언을 한 것이다. 그런데 장도영 회고록을 읽어보면 자신이 기자 회견 같은 걸 통해 조속한 시기에 민정 이양을 하겠다고 한 것을 쿠데타 주동자 쪽에서 싫어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최고회의 내부에서 나오고 있었다.

6월 2일 원충연 최고회의 보도국장, 나중에 공보실장을 맡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정권 이양에 앞서 (…) 정치, 경제, 사회의 제 분야에서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해야 할 것이고 (…) 북한 괴뢰의 경제력을 우월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그 시기가 "최단시일 내에 도달하기를 희망"한다고 했지만, 그게 언제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또 "오는 8월 15일경 민간인으로 구성된 과도 정부에 정권을 이양할 것을 고려 중이라는 외신 보도는 (…) 하등 근거가 없다"며 "무책임한" 보도라고 얘기했다. 내각 공보부 장관이던 심흥선 소장도 '8.15 전후 정권을 과도 정부에 이양할 것이라는 AP통신 보도는 터무니없는 추측 기사다', 이렇게 얘기했다. 정권을 그렇게 빨리 이양할 생각이 없다는 얘기다.

(AP통신은 6월 1일, '8.15 전후 조기 민정 이양설'을 보도했다. 5.16쿠데타 세력은 이를 즉각 부인했다. 그 와중에 <동아일보> 필화 사건이 터졌다. 1961년 6월 3일, 윤보선 대통령은 5.16쿠데타 후 청와대에서 처음으로 열린 기자 회견에서 조속한 민정 이양을 촉구했다. <동아일보>는 이를 크게 보도했다가 5.16쿠데타 세력에게 된서리를 맞았다. 발끈한 5.16쿠데타 세력은 해당 기사를 작성한 이만섭·이진희 기자는 물론 편집국장을 비롯한 데스크까지 연행했다. 그에 더해 청와대 비서관도 끌고 가 조사했다. 1989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윤보선 회고에 따르면, 이때 박정희는 청와대 비서관에게 "우리가 목숨을 내걸고 한 혁명인데 누구에게 함부로 정권을 내주라고 한단 말인가"라고 "분에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고 한다. 6월 5일, 공보부 장관 심흥선은 모 일간지가 대통령 발언을 조작했다고 강변하며 이는 "혁명 정신에 위배되는 행위"라고 엄포를 놓는 담화를 발표했다.

한편 필화 사건의 당사자인 이만섭·이진희 기자는 훗날 군사 정권과 밀착한다. 이만섭은 1963년 민주공화당 의원을 시작으로 8선 국회의원을 하며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이진희는 1970년대에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국회에 들어갔고, 전두환 정권 때는 MBC 사장, 문화공보부 장관 등을 맡았다. 1980년 MBC 사장 시절, 대담 프로그램을 통해 "그동안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드시고 노고가 크신 전 장군께서는 새 시대를 영도해야 할 역사적 책무를 좋든 싫든 맡으셔야 할 위치에 있지 않나 봅니다"라고 하는 등 노골적으로 전두환을 예찬한 것은 30년 넘게 지난 지금도 회자된다. <편집자>)

프레시안 : 1961년 8월 12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드디어 민정 이양 시기를 성명으로 얘기했다.

서중석 : 국내외 이목이 '언제 정권을 이양할 것인가', '조속히 정권을 이양하라'로 쏠려 있는 것을 마냥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박 의장은 이 성명에서 '정권 이양 시기는 1963년 여름으로 예정한다. 정당 활동을 허용하는 시기는 1963년 초가 될 것이다. 대통령 중심제로 하겠다', 이렇게 밝혔다. 아주 중요한 정권 이양 시기를 명확하게 밝힌 성명이었다. 비록 2년 후로 얘기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그 시기를 명확하게 군사 정권에서 이야기한 건 이게 처음이다.

이 8.12 정권 이양 성명은 박정희 의장이 별 2개를 후딱후딱 더 달아 대장이 되고 나서 그해 11월 14일 케네디 대통령과 미국에서 낸 공동 성명서에서 다시 확인됐다. 박 의장은 공동 성명서에서, 8월 12일에 공표한 바와 같이 1963년 여름에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겠다는 엄숙한 공약을 재강조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가급적 조속히 민간 정부를 재수립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의도에 대해 특히 만족의 뜻을 표명했다. 공동 성명에서 이렇게 딱 못을 박고 미국도 환영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런데 8월 12일 박정희 의장이 민정 이양 성명을 발표한 것은 쿠데타 세력의 핵심인 박정희와 김종필한테 이미 복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1962년 11월 13일). ⓒ연합뉴스

앞에선 민정 이양 성명 발표, 뒤에선 공화당 사전·이원 조직

프레시안 : 어떤 복안이었나.

서중석 : 1963년 1월 1일 정치 활동이 재개되면서 야당을 만들려는 노력 같은 게 나올 때 '군사 정권이 당을 사전 조직했다', 이 문제가 크게 부각된다. 그러자 민주공화당 대변인은 1963년 2월 7일, 사전 조직 주장은 "악의적인 중상모략"이라고 반박했다. 그렇지만 사전 조직은 아주 깊숙이 돼 있었다.

8.12 성명 직후로 보이는데 김종필의 중앙정보부 쪽에서 신당의 정책 개발을 담당할 대외문제연구소라는 것을 만들었다고 돼 있다. 정치학, 법학, 경제학, 교육학 등의 학자들과 중앙정보부의 여러 간부까지, 다 합쳐서 21명이라고 숫자까지 나와 있다. 대외문제연구소에서는 그해 10월 중순에 8.15 계획서라는 것을 작성한 걸로 돼 있다.

8.15 계획서에는 민정 이양 시기가 1963년 8.15로 돼 있었다. 박 의장은 이걸 1963년 여름이라고 했는데, 이 계획서는 날짜를 딱 잡았다. 이때로 시기를 딱 정한 8.15 계획서에는 그동안 신당의 당 기구, 강령, 정책을 준비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 계획이 소상히 기록돼 있다고 그런다. (8.15 계획서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군인들이 예편해 대선과 총선에서 승리하고 민정에서도 정권을 잡아야 한다. ▲ 선거 승리를 위해 군인이 참여할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 ▲ 정당을 만들기 위해 때가 묻지 않은 민간인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 구정치인의 도전을 물리칠 방법을 찾아야 한다. ▲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새 헌법과 선거 제도를 고안해야 한다. <편집자>)

이 계획서에 근거해 1962년 1월 대외문제연구소와 관련해 총괄한 건 중앙정보부 행정차장 이영근(육사 8기)으로 나와 있다. 중앙정보부 행정차장은 고위직이다. 이영근을 중심으로 한 이 사람들이 이런 사전 조직 작업을 해가면서 기간요원을 포섭했다. 그러면서 1962년 1월말에 비밀리에 법조계, 언론계 등 각계 인사 52명으로 재건동지회라는 것을 구성했다고 그런다. 대외문제연구소가 먼저 생기고 그다음에 8.15 계획서가 나오고 그러고 나서 재건동지회가 구성된 것이다.

프레시안 : 다른 세력은 움직이지 못하도록 꽁꽁 묶어놓고 자신들은 권력 연장 작업을 하면서 뒤통수친 셈이다. 신당 사전 조직 작업은 그 후에도 은밀하게 계속된다.

서중석 : 각계 인사로 구성된 재건동지회는 1962년 4월 훈련원을 설치했다고 한다. 고려대 교수이자 정치학자인 윤천주가 훈련원장이 됐다고 하는데 이 훈련원이 나중에 크게 문제가 된다. 1962년 말까지 1000여 명의 요원을 교육했다. 이게 민주공화당 사무 조직의 핵심 요원들이라고 얘기들을 하는데 밀봉교육, 그러니까 밀실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하여튼 특수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이것 때문에도 '공산당식으로 교육을 받았다'고 최고회의 내 반대파나 야당에서 몰아세우고 그런다.

재건동지회는 '혁명 과업'을 계승할 수 있는 신당의 강령, 정강, 정책, 이념을 수립했다. 그러면서 정말 나중에 크게 문제가 되는 조직을 여기서 또 한 것으로 돼 있다. 일사불란한 당무 처리를 위해 강력한 사무 조직을 갖도록 한 것이다. 중앙당이 모든 지역에 있는 사무국 요원을 임명하는 방식이었다. 이 요원은 앞에서 말한 훈련을 받은 사람들로 주로 충원되는 식이었다. 그 사무국 책임자가 당무만이 아니라 당 재정까지 책임지고 국회의원 후보 공천도 여기서 하는 것으로 처음에는 나와 있었던가 보다. 국회 운영도 당연히 사무국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공화당은 이런 사무당원하고 정치당원, 이 두 가지로 나뉜 악명 높은 이원 조직으로 처음부터 조직됐다고들 얘기하고 있다. 정치당원은 국회의원도 하고 그러는 사람을 가리킨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가만있어라' 다른 세력 묶고 거대 신당 만든 저들만의 "혁명 정신"

프레시안 : 나중에 민주공화당이 되는 이 신당에 대해 당시 일각에서는 '공산당식으로 조직된 것 아니냐'고 공격했다. 근거 있는 주장인가.

서중석 : 이 이원 조직에 대해 '공산당 조직과 닮았다. 공산당 조직 아니냐'고 최고회의 내 반대 세력이나 야당에서 막 들고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건 공산당 조직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모두 알다시피 공산당 조직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정립한 민주집중제에 의한 조직이다.

이원 조직이 어디에 근거했는지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발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박정희의 아이디어인지 김종필의 아이디어인지, 아니면 재건동지회에 참여한 다른 정치학자의 아이디어인지를 알 수가 없다. 다만 박정희와 김종필은 쿠데타를 일으킬 때나 민정 이양기나 그 이후나 '강력한 통치가 필요하다. 영도자가 국가를 이끌어가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지 않았나. 그렇게 하기에 가장 좋은 형태로 당을 조직하고 국회를 운영하려는 태도가 이원 조직으로 나타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독재자에게 국회라는 건 거추장스러운 존재인데 그렇다고 해서 없앨 수도 없지 않나. 현대 사회에서 겉모습은 삼권 분립 형태를 띠어야 하니, 국회는 꼭 있어야 하는 제도인 셈이다. 그렇지만 강력한 영도력을 뒷받침해주는 정도의 역할만 국회가 했으면 좋겠다고 보는 건데, 그렇게 되도록 하려면 국회의원들이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따라야 한다. 그래서 국회의원들의 모든 걸 장악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무국을 만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당무와 당 재정과 당 공천을 장악하면 다 장악한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프레시안 : 5.16쿠데타 세력의 핵심 인사들은 이른바 "혁명 정신"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그걸 무색하게 만드는 반칙을 거듭했다.

서중석 : 이 신당은 1962년 3월말까지 중앙 조직을 충원하고 그 골격을 마련한 것으로 돼 있고 그해 8월말까지는 지방 조직 충원을 완료한 것으로 돼 있다. 10월로 가면 중앙과 지방의 이원 조직에서 그 사무국 조직을 구성했다. 그렇게 해서 1962년 말까지 1200여 명의 요원으로 조직을 일단락했다. 간단히 얘기하면 사전 조직이 된 것이다.

야당이건 다른 정치 세력이건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 일체 정치 활동을 하면 안 된다'고 모두 묶어놓고 김종필이 중심이 돼서 이런 강력하고 거대한 새로운 당을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서 다른 정치 세력이라 하면 다른 최고위원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

'너무 몰염치한 것 아니냐. 혁명 정신을 주장하면서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느냐‘, 이런 비난과 비판이 그 후 끊임없이 나왔다. 하지만 박정희나 김종필은 자기들이 하는 일은 다 옳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취한 태도를 보면, 집권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지 않았는가 싶다.

이런 사고를 갖고 있으면, 철면피라는 식으로 비난해봤자 소용없다. '권력을 잡고 바로 내줄 생각을 했으면 무엇 때문에 쿠데타를 일으켰겠느냐. 일으켰으면 우리가 권력을 단단히 잡아야 하는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을 처음부터 확고히 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민정 이양을 하고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는 '혁명 공약' 제6항을 내놓은 것이다. 그것 때문에 공격을 당하고 골머리를 앓는 일이 생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쉰다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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