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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 낮은 한국, 민주주의 능력 없었다? "심각한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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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 낮은 한국, 민주주의 능력 없었다? "심각한 왜곡"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31> 해방과 분단, 열여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해방과 분단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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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 3년 만인 1948년, 첫 보통 선거를 실시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그리 늦은 편이 아니었다. 일각에서는 이를 미국의 선물이라는 식으로 본다. 보통 선거와 민주주의를 미국이 이식해줬다는 주장이다.

서중석 : (한국은) 신생 국가(라는 일부 사람들의) 얘기와 같다. 정치학자들이 대부분 미국 등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거기서 쓰인 것을 한국에 와서 똑같이 가르치는 격이다. 그러다 보니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사실 정치학자 중에서 상당히 깨어 있다고 하는 분들, 1980년대 이후에 좋은 정치학자 혹은 소장파라는 이야기를 듣는 이들조차 일제 시대에 대해선 잘 모른다. 그 이전, (예컨대) 한말 역사 등은 더더욱 모른다. 그러니까 해방 직후 문제에 대해 일면적인 인식을 하는 현상이 적잖은 정치학자를 비롯한 사회과학자들한테 나타나는 것 아니냐, 이렇게 얘기할 수가 있다.

서양 사람들이 보면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그게 꽃피길 기다리는 것보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을 기다리는 게 낫다는 식의 그런 거다. '후진 지역에 있는 저 나라가 그래도 보통 선거를 한 것은 미국이 심어줘서가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학자들이 그것을 따라간다? 이건 심각한 문제다.

프레시안 : 이 문제는 독립 운동 세력의 역사적 전망 및 건국 구상과 맞닿아 있다. 이와 관련, 1919년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 정부가 수립된 것이 눈에 들어온다. 나라를 뺏긴 지 10년도 안 지났는데도, 대한제국을 다시 일으키자가 아니라 공화주의 정부를 세우자는 것으로 대세가 기울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서중석 : 나라를 뺏긴 직후부터 독립 운동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대부분) 공화주의를 표방한다. 놀라운 일이다. 전 세계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 나라가 별로 없다. 어째서 그런 건가. 이렇게 된 한 요인은 '대한제국이 우리 국가를 보전하는 데 과연 잘했느냐', 대한제국에 대한 이런 강한 불신이다. 이것도 작용했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도 이제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주의로 가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던 거다). ('민주공화국', '민주공화제'라는 용어는 대한제국 시기에 이미 국내의 일부 지식인과 해외 유학생 사이에서 쓰였다. 1910년 국권을 뺏긴 후에는, 향후 민주공화제가 가장 바람직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1917년에 나온 대동단결선언이다. 신채호, 조소앙, 박은식 등 14명이 발기한 이 선언은 국민 주권과 공화제에 입각한 임시정부 수립을 제창했다. <편집자>)

독립 운동을 한 사람들은 1910년대에도 자유를 강조함과 동시에 특히 평등을 아주 강하게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독립 운동에서 왜 이렇게 평등(에 대한 주장)이 강하게 나타나느냐? 그것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일제가 한국에 와서 지독할 정도로 수탈 정책을 폈다는 인식(이 있었다). 이것(에 대해서)도 그 당시 독립 운동을 한 사람하고 뉴라이트 사이의 견해 차이가 굉장히 크다. 독립 운동을 한 사람들은 당시에 '일제의 수탈이 너무 심하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1919년 여러 지역에 임시 정부가 세워진다. 그런데 이때 모두 보통 선거 취지에 맞는, 이젠 공화주의까지 넘어서 그야말로 자유민주주의와 연결될 수 있는 주장을 이미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게 단적으로 나타나는 게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 헌장'이다. 여기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제로 함'이라고 딱 하지 않았나. 그리고 제5조에 '대한민국의 인민으로서 공민(公民的权利)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 및 피선거권이 있음'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사실상 독일(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볼 수 있던 보통 선거권하고 비슷한 것 아니냐고 해석할 수 있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민주주의 심어준 미국? 독립 운동과 해방 공간을 깊이 있게 이해해야

프레시안 :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비롯해 독립 운동기에 탄생한 역사적 구상은 1948년 제헌 헌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문제와 관련해 제헌 헌법이 1919년 독일에서 만들어진 바이마르 헌법을 상당 부분 모방한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서중석 : 제헌 헌법을 두고 '바이마르 헌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라는 이야기들을 한다. 나도 어렸을 때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다. 전혀 근거가 없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여러 차례 헌법을 만들고 개정했는데, 뭔가는 참고하지 않았겠나. 독일 쪽을 참고했을 거라고 볼 수 있는 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근거가 전혀 없는 건 아닌데, 그것보다도 기본적인 것은 그 당시 독립 운동의 전반적인 상황과 연결해서 봐야 하는 것이다.

보수 세력이라고 볼 수 있는 한국독립당이 1930년대에 만들어질 때부터 조소앙의 삼균주의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이미 조선공산당에선 급진적 민주공화제를 주장했다가 1928년에 오면 인민공화국을 주장했다. (조선공산당은 1926년 인민적 성격이 강한 보통 선거를 실시하고 지방 자치가 철저히 보장되는 주권 국가 건설을 주장했다. <편집자>) 해외 독립 운동 세력 중 사회주의 경향이 강한 쪽에선 인민공화국 건설 주장을 같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분위기를 정확히 짚을 필요가 있다.

프레시안 : 헌법학계에선 이 문제를 역사학계와 다소 다르게 보는 것 같다.

서중석 : 제헌 헌법이 이처럼 일제 시대 독립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 헌법학자들이 주목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이것을 다룬 여러 논문이 나온 것은 내 기억엔 5~6년밖에 안 됐다. 그 이후 괜찮은 논문이 여러 편 나왔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논문을 읽어 보면, 예컨대 이 중 몇 사람은 '삼균주의를 얼마나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게 한다. 일제 시기 독립 운동이 임시정부뿐만 아니라 다른 데서도 활발했고 평등을 강렬하게 지향하는 것이 삼균주의에도, 임시정부 헌장에도 나타나는 것인데, 그런 부분에 대해 제대로 언급하는 것을 거의 못 봤다. 이와 달리 역사학계에서는 이미 1980년대 초반에 해외 독립 운동 세력이, (심지어) 상당히 보수적인 세력까지 사회주의 성향을 대단히 강하게 띠고 있었다는 연구가 진척됐다. 1990년대에는 '제헌 헌법이 이와 같이 나타난 것은 일제 시대의 독립 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방 직후의 혁명적 분위기가 제헌 국회의원한테 어떤 식으로 영향을 줬다' 하는 것에 대한 연구도 나온다. 제헌 헌법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국회) 속기록을 보면 이런 것을 잘 파악할 수 있다. 이건 그만큼 정치학자를 비롯한 사회과학자뿐만 아니라 제헌 헌법 연구자조차 해방 직후사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걸 반영하는 것 아니겠나. 헌법학자들이 역사학 쪽 연구를 더 충실하게 반영하면 앞으로 제헌 헌법은 물론 그 이후의 헌법에 대해서도 더 깊이 있는 연구가 이뤄지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 1948년 5.10선거 모습. ⓒ국가기록원

1910년대부터 대세였던 민주공화제…미군정도 배격할 수 없었다

프레시안 : 해방 직후의 분위기가 보통 선거를 비롯한 민주주의 제도 및 제헌 헌법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짚을 필요가 있다.

서중석 : 미군정이 보통 선거 법안을 만들 때 또는 1948년 5.10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법안을 만들 때, 보통 선거를 배격하면서 할 수가 있었나? (해방 직후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그건 도무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불가능했다. 이 점과 관련해 일제 때 독립 운동을 중시해야 한다고 앞에서 이야기하지 않았나. 보통 선거 취지가 이미 1919년에 아주 명백하게 나타나는 것 아닌가. 해방 후엔 그런 분위기가 훨씬 더 강하게 나타난다.

(1947년 보통 선거 법안을 통과시킬 때 선거권자 및 피선거권자의) 연령 제한을 (지나치게) 높이려 한 데서도 드러나듯이 해방 직후에 이승만 측, 한민당 측은 보통 선거 법안 취지에 어긋나는 주장을 하고 그랬다. 이와 달리 좌파는 물론 김규식 같은 중도파조차 보통 선거 실시는 말할 것도 없고 '투표 연령을 20세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으로 말하면 정당 명부제와 비슷한 취지로 보이는데, 비례 투표제까지 주장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보통 선거 법안 문제가 1947년에 여러 논쟁을 야기하고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이던) 김규식이 사표까지 내면서 싸우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이미 북한에서 1946년 11월 3일에 (북조선인민위원회 수립을 위한) 투표를 했는데, 보통 선거 형태였다. 다만 흑백(함) 투표 부분을 두고 (이런저런) 해석이 나오는 선거였다. 그러니까 당시 한국의 정치 수준이나 각 정당과 사회단체의 주장을 볼 때, 더욱이 북한에서 이미 그렇게 나온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그런 것 때문에 미국이 따른 것이다. 그렇게 보는 것이 더 현실에 맞다. 그게 내 얘기의 핵심이다.

프레시안 : 민주주의가 이식됐다는 데 무게를 두는 시각엔 '당시 한국인들이 민주주의를 할 역량을 갖췄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 아니냐'는 인식이 녹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중석 : 유럽 등에서 쓰레기통과 장미를 운운하면서 '한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실시하고 지켜나갈 만한 나라냐', 이런 비판을 많이 했는데 그것도 한국을 아주 왜곡한 것이다.

뭐냐 하면 최초로 치러진 선거인 (1948년) 5.10선거 및 (1950년) 5.30선거가 단정 운동 세력인 한민당 측이나 이승만 지지 세력에 의해 문제가 많이 생긴 건 사실이지만, 그 이후에 치러진 선거에 비하면 그래도 공정한 편이었다고 난 보고 있다. 5.30선거 때는 대통령이 직접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을 찍어선 안 된다고 연설하고 다녔고 성시백 간첩단 사건이라는 그야말로 대형 간첩단 사건이 터졌는데도 그랬다. 그건 5.10선거나 5.30선거는 (훗날 치러진 선거들에 비하면) 관권이 개입하기 어려웠고, 여러 가지 분위기가 작용하고 있어서였다. 또 유엔 위원단이 나름대로 감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명선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한국인들이 만천하에 과시한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부정 선거가 그렇게 고약한 형태로 나타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취지를 근본부터 왜곡하느냐. 1952년 8.5 정부통령 선거부터다. 그리고 소위 비상사태라는 걸 내세우면서 얼마나 계엄령을 많이 선포했나. 계엄령은 (이승만 정권만이 아니라) 특히 박정희 정권이 많이 선포했다. 아울러 유신 체제 같은 걸 만들어 보통 선거와 자유민주주의의 취지를 짓뭉개고 참 무색하게 만들지 않았나. 그것(민주주의)과는 너무나도 어긋나는 통치를 하지 않았나. 거기엔 미국의 책임도 많이 있다. 이런 걸 갖고 비판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한국은 민도(民度)가 낮다. 신탁 통치를 시행하는 게 마땅하다. 민주주의를 시행할 능력이 없다'는 식의 이야기가 많았다. 이런 논리로 도매금으로 넘겼으니, 1980년 광주 항쟁 이후 미국에 대한 강한 비판이 나타날 수밖에 없지 않았겠나. 이런 점도 생각해야 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평등주의 강조한 제헌 헌법, 자유방임주의와 거리 멀었다

프레시안 : 일각에서는 대한민국이 세워질 때부터 자유방임주의 성격이 강한 자유 시장 경제를 지향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제헌 헌법만 살펴봐도 그렇지 않았다.

서중석 : 제헌 헌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평등주의다. 그 당시에도 보수적인 사람들은 (제헌 헌법에) '통제 경제적 요소, 사회주의적 요소가 강하다'고 하고 그랬다. 여기엔 조소앙의 삼균주의가 그대로 살아 있다. 삼균주의가 뭔가. 국(國)과 국, 민족과 민족, 인(人)과 인은 다 평등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 국내적으로는 우선 정치적 평등이다. 이건 보통 선거를 가리키는 것이다. 5.10선거로 실시가 된 것이다. 그다음에 교육적 평등(이다). 이걸 독립 운동 세력도 많이 강조했다. 이건 제헌 헌법에 '교육에 있어서 평등을 기한다'고 쓰여 있다. 그리고 제일 많이 나타나는 것이 경제적 평등이다. 이걸 모든 독립 운동 세력이 들고나온다는 것은 누누이 얘기하지 않았나.

그래서 헌법 전문에 또 반복된다. 전문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하게 한다', 이렇게 딱 못을 박아 놨다. 구체적인 헌법 조항에 국유와 국영의 원칙(이 있었는데), 이건 지하자원이나 중요 기업을 포함한 것이었다. (국민 경제의 균형 발전을 위해 중요 산업의 국유화를 규정한 조항 등은 1954년 사사오입 개헌 때 삭제됐다. <편집자>)

프레시안 : 친일파와 손잡은 이승만, 지주 및 부르주아를 기반으로 한 한민당의 힘이 강할 때인데도 그런 내용이 들어간 것은 주목할 만하다.

서중석 : 이승만 측이나 한민당에서는 이런 걸 견제하려고 했다. 이 헌법은 놀랍게도, (현실에서) 실시되진 않았지만, 노동자들한테 균점권까지 주려고 했다. 서독에서 나중에 실시된 것인데, 경영 이익이 나오면 그걸 노동자들이 자본가와 나누는 거다. 이게 헌법에 균점권('사기업의 근로자는 이익 분배에 균점할 수 있다')으로 들어가 있었다. 일각에서 '경영권에까지 노동자들이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으나, 이건 보수 세력이 반발해 빠졌다.

지적해야 할 사항이 여럿 있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제헌 헌법 참 훌륭하다. 이건 일제 때 독립 운동, 해방 직후의 분위기와 열기가 제헌 국회에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또 소장파가 얼마나 앞장섰는가. 그래서 이승만과 한민당 측 보수 세력이 상당히 반대했음에도 반민법, 농지 개혁법과 마찬가지로 좋은 헌법이 만들어졌다. 이 점을 거듭 강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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