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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기자는 왜 조선소 하청으로 취업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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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기자는 왜 조선소 하청으로 취업했나? [위험의 양극화, 산재는 왜 비정규직에 몰리나·<1>] 조선소 노동, 우리네 자화상
"지저분한 일, 위험한 일을 해라. 그래야 돈을 번다."

예전에 자수성가한 부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가 해준 충고다. "왕년에 공부 좀 했다고 편한 일자리만 찾아다니면 안 된다. 그럼 평생 '월급쟁이' 신세다"라고도 했다. 돈은, 남들이 꺼리는 일을 하는 데 따르는 보상이라는 게다. "젊은 사람이 그저 편하고 안전한 일만 하려는 걸 보면 한심해 죽겠다"고도 했다. 표정이 진심이었다.

가난은 싫었지만 꼭 부자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충고를 깊이 새겨듣지는 않았다. 다만, 스스로 일어선 사람 특유의 위엄만큼은 몹시 인상적이었다.

저물어 가는 '자수성가'의 시대, 젊은이들에게 희망은?

하지만, 그는 이미 늙었다. 그리고 그의 시대 역시 저물고 있다. 그의 자식들은, 그가 한심하다고 평했던 삶을 살아간다. '지저분한 일', '위험한 일'과 거리가 먼 '양복쟁이'의 삶이다. 자수성가 부자들의 자식들은 부모와 다른 삶을 택한다. 자수성가 부자들은 점점 사라져 간다.

30년 간 제자리를 지켜왔던 홍대 앞 리치몬드 제과점이 문을 닫은 게 두 달 전이다. 그 자리에는 재벌 계열 커피점이 들어선다. 이 제과점을 운영해 온 권상범 회장 역시 자수성가 부자다. 중학교 진학 대신 빵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그는 경상북도 의성과 대구의 제과점에서 빵 기술을 배우다 열아홉 살 때 단돈 2000원 들고 서울에 왔다. 오븐 곁에서 하루 3~4시간 칼잠을 자는 생활이었다. 그렇게 배운 기술로 빵집을 차렸고, 부자가 됐다. 그의 나이는 예순 일곱. 힘들었지만 자부심 단단한 세월이다. 그러나 지금, 역시나 고생스럽게 빵 만드는 기술을 배우는 젊은이들은 권 회장과 같은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답은 회의적이다.

권 회장과 같은 명장(名匠)조차 재벌 앞에선 무력했다. 5년 전에도 프랜차이즈 대기업의 빵집에 자리를 내줄 뻔했다. 그때는 보증금과 월세를 두 배씩 올려주고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이번엔 건물주가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재벌 계열 커피점에 가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게다. 한국에서 딱 8명뿐인 제빵명장이라는 자존심도 소용없었다. 하물며 이제 겨우 빵 만드는 기술이 손에 붙은 젊은이들은 무슨 희망을 가질 건가. 독립해서 '자기 가게'를 차리겠다는, 소박한 꿈도 까마득하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재벌가 자제들은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

남들보다 더 고생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진 사회엔 희망이 없다. 물론, 이런 희망이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감추는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빵 만드는 기술을 익힌 이들이 모두 권 회장만큼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소수의 성공 사례는, 나머지 다수의 실패를 오로지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게끔 하는데 쓰인다. '어려운 조건에서도 누군가는 성공했다. 그런데 당신이 실패한 것은 당신이 게을렀기 때문'이라는 게다. 그러나 이런 성공 사례마저 사라진 사회에선 그저 절망뿐이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환상이 가신 뒤, 뚜렷이 모습을 드러낸 건 약육강식의 정글이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 위험이 크면 보상도 크다는 뜻)'이라는 자본주의의 금언은 이미 현실과 동떨어졌다. 현실의 정글 자본주의에선 포식자들이 별 위험을 지지 않는다. 재벌가 딸들이 동네상권을 무너뜨리며 빵집이니 커피숍 따위를 한다고, 요즘 말들이 많다. 그녀들이 하는 사업은 지극히 안전하다. 숱한 이들의 사랑을 받는 제빵명장도 그녀들의 걸림돌이 되지는 못했다. 손에 화상 자국 하나 없을 재벌가 딸들이 하는 사업은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위험은 적고, 보상은 넉넉하다.

아무리 재벌이라도, 망해서 좋을 건 없다. 기왕이면 뭐든 안전한 게 좋다. 그러나 시장에 존재하는 위험의 총량은 별로 줄지 않았다. 누군가가 위험을 덜 짊어진다면, 대신 다른 누군가가 더 위험해진다. 재벌가 딸들이 든든한 뒷받침을 받으며 편하게 사업을 할 때, 오래 된 동네빵집은 불안에 떤다. 한마디로 위험의 양극화다. 힘없는 사람들은 더 위험하고 더 불안해졌다.

소비자의 손해, 항의는 비정규직에게, 웃는 건 주주들

빵집주인과 같은 자영업자만 그럴까. 아니다. '월급쟁이'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위험한 일, 궂은일은 온통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의 몫이다. 이게 아예 제도로 굳어졌다. 지난해 말, KT가 2G망 서비스를 강제로 종료할 당시 상황은, 이런 현실을 잘 보여준다. 수익성이라는 면에선 2G망 서비스 종료가 당연한 결정이다. 돈 안 되는 서비스는 접는 게 낫다. 이 결정으로 KT는 이익률이 더 높아졌다. 하지만 2G 서비스를 계속 쓰기를 원하는 소비자 입장에선 황당한 일이다. 그래서 소비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런 항의에 응대하는 일은 KT정규직의 몫이 아니라는 점이다. 비정규직 또는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이들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은 2G망 서비스 종료로 인해 KT가 얻을 수익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KT가 소비자들의 불만과 맞바꿔 수익은 일차적으론 주주들의 몫이다. 실제로 2002년 민영화 이후, KT 주식의 배당률은 매우 높은 편이다. 2010년 KT의 배당성향은 50.0%에 달한다. 당기순이익의 절반이 주주에게 흘러들어간 것이다. 2009년에는 이 비율이 무려 94.2%에 이르렀다. 소비자들이 아무리 항의해도, 주주들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 다음으론 정규직에게 혜택이 있다. 하지만 정작, 소비자들의 항의를 달래느라 혹독한 감정 소모를 해야 했던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건 없다. 오히려 위험만 늘어났다. 거친 항의를 참아내지 못하고 감정이 폭발해버린 비정규직은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

일부 소비자들은 손해를 봤고, 그 대가로 주주들은 배를 불렸으며, 대신 비정규직은 울었다. 지난해 말, KT가 2G망 서비스를 종료할 당시의 풍경은 정글이 된 한국 사회의 적나라한 단면이다.

산재로 죽는 건 모두 비정규직, 약자에게 위험 떠넘기는 일터

실제로 돌아보니 그랬다. 산업재해 사건은 언제부터인가 하청노동자, 비정규직에게서 주로 발생했다. 노동현장에서 위험한 일이 약자에게 쏠리고 있다는 징후다. 약 넉 달 전, 인천 공항철도 계양역에서 철로 보수작업을 하던 노동자 5명이 열차에 치어 사망했다. 모두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였다. 공항철도 개통 이래 최악의 참사였다. 사고 당시 노동자들은 제대로 된 안전장치나 관리감독도 제공받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노동계 전문가들은 "철로 보수 작업을 비롯해, 예전에는 정규직이 했던 위험한 작업들이 하나둘씩 하청으로 떠넘겨졌다"고 지적했다. 원청 업체는 법적 책임을 피하는 데만 골몰할 뿐이다.

약 석 달 전에는 울산 세진중공업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해서 노동자 4명이 사망했다. 역시 모두 하청노동자였다. 이 사건을 다룬 <프레시안> 기사 가운데 일부를 옮겼다.

조선하청노동자연대에 따르면, 조선소에서 발생하는 사고의 90% 이상은 하청 노동자에게 일어난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관계자는 "정규직들은 현장에서도 쉬운 일, 편한 일을 한다"며 "어렵고, 위험한 도장 작업이나 용접 작업 등은 모두 하청 노동자의 몫"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정규직이야 고용이 보장됐고, 노조도 있으니 회사에서도 이들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며 "하지만 비정규직은 언제든 해고할 수 있을 뿐더러, 여차하면 하청업체와 계약해지를 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라고 말했다.

산재 신청은 꿈도 못 꾼다. 산재를 신청하면 원청에서 곧바로 해당 하청업체와 계약을 해지하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관계자는 "얼마 전에는 공장 내에서 일하던 하청 노동자 한 명이 15톤짜리 강판에 깔려 골반이 부러지고 장이 파열됐다. 하지만 하청업체 관리자는 구급차를 부르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에서 사고가 난 걸 알게 되면 하청 업체와 계약을 해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다친 노동자는 트럭 짐칸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됐다. 혹시 문제가 될까 우려한 하청업체 관리자는 다친 노동자를 담요로 덮는 주도면밀한 모습까지 보였다. 이어 그 관리자는 병원에 와서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하라"고 협박까지 했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니 산재 인정은 엄두도 못 낸다. ("15톤 강판에 깔려 장 파열, 그래도 구급차 못 부른 이유", 2012년 1월 6일자 <프레시안>)


<프레시안> 기자는 왜 조선소 하청으로 취업했나?

당시 조선소 현장 취재를 했던 <프레시안> 기획취재팀 허환주 기자가 이번에는 조선소 하청 노동자가 됐다. 최근 약 2주 동안 사내하청 업체에 취업해서 노동자 생활을 한 것이다. 그 기간 동안 보고 듣고 겪은 걸 글로 옮긴다. 오는 28일부터 매일 총 4회에 걸쳐 연재되는 기록이다. 내용은 길지만, 초점은 간명하다. 정의(正義)가 사라진 일터, 위험한 일은 온통 비정규직에게 떠넘기는 일터 풍경에 대한 고발이다.

그리고 이어질 내용은 '왜 우리네 일터에서 정의가 사라졌는지'에 대한 분석이다. 앞서 소개한 KT의 사례가 시사적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영미식 금융자본주의가 급격히 이식되면서 기업은 주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조직이 됐다. 예컨대 KT처럼 주주 배당률이 높은 기업은 모범적이라는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주주들에게 높은 배당을 하기 위해선 비정규직을 늘리고 노동자 복지를 줄여야 했다. 수익률이란 관점에선 일터에서 안전을 보장하는 장치마저 '낭비'일 뿐이었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가 먼저 희생됐다. 잇따르는 산재 사고에서 유독 하청 노동자의 희생이 잦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리라는 게 <프레시안> 기획취재팀 회의 때마다 나온 이야기였다.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의 삶, 우리네 자화상

부유한 삶이 위험을 감수하는 무모한 도전의 대가였던 시대는 지나갔다. 오백 원짜리 지폐에 있는 거북선 그림으로 투자를 받아서 허허벌판에 조선소를 세웠다는 정주영의 신화는 빛이 바랜 지 오래다. 정주영, 이병철의 후손인 한국경제의 주역들은 이제 무모한 기업가 정신을 쫓지 않는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편하게 돈 벌 수 있는 길이 있다. 재벌가 딸들의 빵집 진출은 그 중 한 사례일 뿐이다.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역시 비슷한 지적을 했다.

자수성가의 시대가 끝나면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시대도 저물고 있다. 이미 많은 걸 가진 이들은 굳이 위험을 지려 들지 않는다. 가진 게 없는 이들일수록 많은 위험을 지지만, 이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갈수록 줄어든다.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의 삶이다. 결국 다수 약자들이 힘을 모아 '리스크'에 대비해야 한다. '보편적 복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등으로 대표되는 복지 담론은 이런 맥락에서 중요하다.

허 기자의 조선소 하청 노동자 체험기, 그리고 이어지는 기사들이 담고자 한 것은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위험한 일은 온통 약자가 떠맡는 조선소 현장은 사회 곳곳에서 이미 익숙한 풍경이다. 28일부터 시작되는 연재 기사가 이런 자화상을 직시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 위험의 양극화, 산재는 왜 비정규직에 몰리나
연재를 시작하며:<프레시안> 기자는 왜 조선소 하청으로 취업했나

- 기자가 체험한 조선소 하청 노동
<1> 취업 면접 때 묻는 건 딱 하나, "버틸 수 있겠나?"
<2> "목숨 갉아먹는 유리 먼지, 여기가 지옥이다"
<3> 점심시간 1분만 어겨도 욕설에 삿대질, 경고까지
<4> "6미터 추락 반신불수, 책임자는 알 수 없어"

- 조선소, 한국사회의 축소판
<1> 발 헛디뎌 죽은 다음날, 회사가 한 말은?
<2> 노동자도 아닌, 사장도 아닌, 넌 누구냐?
<3> 저녁 먹자던 아버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더니…
<4> "5년동안 몰랐는데 내가 바로 불법파견이더라"

- 위험의 양극화, 대책은?
<1> 폐암 진단, 길고 긴 소송, 얻어낸 건 장례비
<2> "냉동고에서 질식사한 노동자, 그러나 회사는 무죄"
▲ 용접을 하고 있는 조선소 하청 노동자. ⓒ조선하청노동자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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