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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상, 야만의 시대에 사람을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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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상, 야만의 시대에 사람을 노래하다 [나도원의 '대중음악을 보다'] 나눔과 낮음 말하는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
얼굴을 보는 것은 조금 다른 종류의 이해이다. 몇 해 전,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가파른 계단을 올라 이제 길고 느린 숨을 쉬는 사람을 보았다. 고통 받거나 먼저 세상을 떠난 선후배를 보며 젊음을 보낸다는 건 어떤 계단과 같았을지 모른다. 이지상은 청년시절 '조국과 청춘'과 '노래마을'에서 활동한 후 넉 장의 독집음반을 발표한 음악인이자 시인들과 함께 하는 시노래운동 모임 '나팔꽃'의 동인이다. 정태춘이 효시이고 자신이 창조한 장르라고 너스레떠는 그의 '중얼가요'는 음악소리가 그렇듯 낮지만 멀리 가는 울림이 되어 있다.

"사람 없는 집회에 머릿수라도 채우기 위해 어슬렁거리는 심정"으로 서명이나 한다는 겸양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살리자는 모임"을 찾아 노래하고, 강연하고 있다.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 집행위원장을 맡아 7억여 원의 성금을 전달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한국사회가 재일조선인에게 보낸 최초의 성금이었다. 이지상은 오지랖이 넓다. 가슴의 오지랖이 넓고 발의 오지랖이 넓다. 일본에 가고 만주에 가고 시베리아에도 간다. 모두 아픈 사연이 뿌려진 길이다. 신영복 선생의 참되고 무거운 뜻을 "머리에 담는 게 마음에 품는 것만 못하고 마음에 품는 게 발 가는 것만 못하다고 말합니다"라고 옮겨 적기도 한다.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는 음반이 아니라 책이다. 이 검소하고 소박한 산문집의 표지는 음반 [기억과 상상](2006)을 감쌌던 사진이다. 노래운동에 투신했던 음악인들의 공통점 하나는 겪음 이후의 쓸쓸한 기운을 노래에 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방관자들의 시니컬하고 패배주의적인 후일담문학과는 결이 다르다. 이지상은 쓸쓸함에 낙관을 더한다. 다른 공통점은 할 말들이 어찌나 많은지 음반에 꼭 긴 글을 첨부하더란 것이다. 이지상은 아예 책을 펴냈다. 그에게 노래와 시, 세상과 삶이 하나였다. 이 책은 음악인이 기타와 나눈 이야기가 어떻게 노래가 되었는지에 대한 주석이면서 한국사회의 '상식선'이 이동하는 방향을 보여주는 표본이다. 많은 음악인들이 이런저런 책을 내지만,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

"외로움은 꼭 그만큼의 사랑함에서 나옵니다. 많은 것을 사랑하게 되면 그 많은 것만큼 외로워집니다. 그러나 그 외로움이 두려워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자리에는 사람이 있었고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이지상 지음, 삼인 펴냄). ⓒ프레시안
장기판에서 종횡무진 하는 말도 장기판 밖에선 아이들의 노리감이 될뿐이라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시를 아끼는 이답게 잘 다듬어진 문장은 아름답고 경어체는 따스하다. 책에 실린 사진들 중 여럿도 직접 찍었고, 대부분 앞서 음반으로 발표했던 노랫말과 시를 가려 실었다. 가훈이 "어떻게든 되겠지"라며 넉살을 부리고 찌개나 나물무침 종류는 아내보다 자신의 실력이 조금 낫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시와 노래의 관계를 이야기하다가 <춘향전>은 "싹수 노란 십대들의 사랑 타령"이며, <흥부전>은 "쪽박 차고 다니다 대박 터트린 정력 좋은(?) 촌부 이야기"란다. 이처럼 따스한 미소 한 묶음까지 담았다.

그러나 시대도 고뇌하고 병을 앓는다는 사실을 아는 음악인의 항의가 여러 장을 채운다. 오래 전에 나온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펼쳐보면 놀랍도록 요즘 이야기 같은 시절, 잇따르는 사건과 뒤따르는 고통을 보며 "몇 년간 긴 장마 속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토로한다. 공권력의 용도가 국가의 정체를 드러낸 '용산'의 망루는 약자의 최후선택지였다. "타워팰리스의 맨 꼭대기 층 두 채를 터서 한 집으로 쓰는 사람들의 전망 좋은 망루도 아니고 청와대 뒷산에 올라 촛불의 개수를 세는 대통령의 망루도 아니고 그저 5층짜리 낮고 소박한 건물의 옥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어떤 초상도 그리지 말아야 한다는 작가들의 결의"를 전하며 입술을 깨문다. 룰을 깨는 것이 폭력이다. 룰을 깬 것은 공권력이다. 물대포로 촛불은 껐지만 마음 속 불길은 끄지 못했다. 용산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형이다.

근사한 인디밴드의 공연을 보려고(아니면 삼겹살을 구우려고) 북적이는 홍대 근처에 오늘도 '두리반' 건물이 외로이 서있는 것처럼 철거는 특정 지역과 사람의 문제가 아니고, 오늘만의 문제도 아니며, 이 땅만의 문제도 아니다. 청계천 복원사업 덕에 피해를 본 상인들에게 대체매장으로 약속된 땅 '가든파이브'의 허상을 따지고, "온 나라가 봄꽃 소식으로 치장되어 있는 시간, 꽃 한 송이 키우지 못하는 땅" 가재울에서 "낮은 곳에 있는 주춧돌을 빼내어 고층 아파트의 옥상 위에 올려놓는" 자본을 바라본다. 1940년, 열리지도 못한 도쿄 올림픽 때문에 쫓겨난 재일동포들이 가꾼 에다가와 조선인 학교와 한국 철거민의 사정 모두 "단아하고 고고한 개발 자본의 자태에 눌려 어디론가 사라진 방식도 똑같았"음을 통찰한다.

대구 지하철참사 후에 "딸의 사망을 증명하기 위해" 쓰레기장을 찾은 아버지부터 "1년에 두 번, 삼일절과 광복절 때만 방송에 나오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 남과 북 모두에게 잊혀진 항일투사에게 공평한 시선은 작은 것에 대한 예의, 작은 것을 통한 성찰과 통한다. 파를 썰다 싱크대 수챗구멍에 떨어진 파 조각을 건져 올리곤 "가장 많이 신경을 써야 하는 곳이 아픈 곳"이며 "아픈 곳은 가장 약한 곳"이라 말한다. "사회 또한 미운 곳, 약한 곳, 작은 곳, 아픈 곳이 중심"이며 "아픈 곳을 반드시 중심으로 삼아야 생존할 수 있는 사회"를 강조한다. 그들 모두가 "내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이며 "또 다른 나의 자식들"인 것이다.

"가장 낮은 곳에 사랑이 있다는 말을 믿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늘 낮은 곳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낙엽의 사랑이 그렇고 바다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사건은 구조에서 비롯되며

의식은 이론의 관념화가 아니라 현실의 직시에서 출발한다. 그 앞에 사건이 있고, 그 자리에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죽음 권하는 사회'와 동행하는 사람의 편지는 사회구성원으로서 양심에 대한 책임과 예술가로서 창작의 자유에 대한 예의를 유물인양 취급하는 시대에게 "야만의 시대에는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야만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알린다. 예술가라고 예외는 아니다. 칠레의 쿠데타군은 빅토르 하라를 죽임으로써 그가 영원히 살도록 했으나, '천황과 황국신민'에서 '반공과 친미'로 용어만 바뀐 우리 현대사에는 대중가요 작곡가 박시춘의 친일행적이 있었고, 서정주의 <일장기 앞에서>가 써졌다. 지금도 "정리되지 못한 과거사의 질곡은 다른 형태의 잘못된 미래를 필연적으로 잉태"하고 있다.

"아이와 군인을 구별하지 못하는 총탄처럼 눈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이명박-한나라당 정권은 협상을 가장하고 인민을 협박한다. "제발 파지만 말라, 막지만 말라"고 호소해도 듣지 않는 4대강사업이 친환경이란 주장은 한강둔치에 스머프 마을이 있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이것이 문제가 있는 유일한 정책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를 나열하는 편이 더 쉬울지 모른다. 여전히 "거짓을 진실로 고백받기 위한" 고문의 상처도 치유 받지 못했다. "화해와 용서, 사회 통합의 메시지를 강조한 고문자들의 레토릭은 해원의 통곡이 끝난 뒤에 논해도 좋을 듯 합니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으로도 찾을 수 없는 민주주의라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들은 아프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달력이었다. 개인에겐 변화를 가늠케 하고 사회엔 차례로 넘겨야 하는, 언제고 넘겨야 하는 달력이었다. 그런데 다음 장에는 엉뚱한 페이지가 걸려 있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젊음을 바친 세대는 평생 키웠는데 엉뚱한 자를 닮은 아이를 보는 부모의 심정일지 모른다. 그들의 둥지엔 뻐꾸기가 알을 낳았고, 새끼는 거대하게 커서 윽박지른다. 자본이다. 개발독재 하에서 성장한 시장권력이 수구집단과 연합하여 관료를 제압하고 정치권력까지 접수하는 지배계급의 구조조정단계의 지배논리는 경쟁과 효율, 성공과 독점이다. 이지상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엔 "과정의 다양성, 과정의 풍부함이 훨씬 더 많이 강조"되어 있다고 해석하며, "오직 일등만 하라는 천박한 경쟁의 논리"가 아니라 한다.

극단에 전쟁이 있다. "죽음의 하치장을 만들어 그 희생자의 무덤 위에 반세기도 가지 못할 허명의 깃발을 세웠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진짜 목적은 돈이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목숨이 돈으로 매매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정으로라도 성립될 수 없었던 질문을 품었던 내 터무니없는 이성에 분노해야 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이라크 민중에겐 현실이기 때문이다. "남의 집에 불이 나면 휘발유 더 뿌려 완전히 태운 다음 다시 집 지을 때 기둥뿌리 하나라도 더 팔아야 네가 잘 산다"란 말로 국익 위한 파병론을 일갈한다. 이 모든 일이 무관한가? 의식은 사건을 개별적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인식하는 힘이다.

"애초 다리는 소통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속도의 길이 되었고, 놀랄 만큼 빠르게 지나가는 자본의 속도에 소외된 많은 이들은 다시 다리로 모여 소통을 외칩니다."

바꾸기 위해선 돌아봐야 하고

어느 일본병사처럼 수십 년 동안 외딴 섬에 숨어 살지 않았다면 다리 하나를 사이엔 두고 전혀 다른 두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능력이라는 언어로 포장된 효용이라는 잣대는, 알을 많이 얻기 우해 좋은 사료를 공급받는 양계장의 닭과 똑같은 방식의 삶을 인간에게 요구합니다." 만약 "효용의 최대치를 인간의 가치로 보는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면 '닭장차'가 기다린다. 사회변화가 빨라질수록 내면화도 빨라진 사회성원들은 "무엇이 돈 되나로 시작하는 일상의 대화"를 나누고, 과시소비는 삶의 방식이 되었으며, 화폐의 빌딩이 꼴 보기 싫다고 그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전태일을 호명하는 행위가 공허해진 것은 "그가 세상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그를 버렸기 때문"이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서지 못하면 이 발달장애는 낫지 않는다. 선거 1년 후면 꼭 인기 없고 실망스러운 정치지도자가 만들어진다. 속았다고들 한다. 정말 실망해야 할 대상은 그들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 유권자 자신이다. 나도 그러한데 남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하는 사고가 성숙이지, 너희도 그러한데 나를 비난하느냐는 사고는 미숙이다. 사실 비판이란 자신에게 그런 면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지상은 "나의 이익이 누군가에게 고통이라면 나는 그 이익을 포기하겠다는 고백을 아직도 스스럼없이 하지 못하니" 스스로 부족하다지만, 누가 더 가지면 누구는 덜 가져야 하고, 누군가는 가난해야 하는 질서를 돌아보길 권한다.

식칼을 갖고 노는 아이 같은 현대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욕망에 욕망으로 맞서 해결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검소한 생활은 절약하여 통장부자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 남과의 비교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운전면허 소지자가 늘어나는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분리의 역사'를 넘어 생활방식과 가치체계와 사회구조에 대한 '반성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이지상이 글로 품듯이 나와 너, 우리가 이어져 있음을 알아야 자기가 처한 상황이 아니어도 공감할 수 있고, 자기가 저지른 일이 아니어도 반성할 수 있다. 다음세대와도 연결되어 있으니 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성찰이 가능하도록 하는 반성 없이는 질적인 차이가 없는 (웰빙 류의) 유행만 뒤따를 뿐이다.

이지상은 이견 표출에 멈추지 않고 의견을 제시한다. 아카시아 꽃 먹고 체하면 똥물 외엔 약이 없다고 겁을 주던 이지상의 어머니는 폐광까지 무지개를 쫓아간 아들에게 "무지개가 니꺼냐, 이놈아!"라고 면박을 주었다. 그 추억에서 "우리의 것, 자연의 것"을 길어 올린다. "조금 더 많이 가졌으니 어려운 이들에게 주고 나는 기쁨을 갖겠다는 인간계의 소박한 나눔의 개념이 아니라 애초에 필요 이상의 것을 가지지 않았으니 굳이 나눌 것도 없다는 생태계의 품성"을 배운다. 그리고 더불어 살기 위해 경쟁·효율·성공·독점 대신 나눔·공동체·희망을 이야기한다. '무엇하지 마라'와 '무엇해라'를 넘어 '무엇하자'와 '무엇한다'가 필요한 때이다.

"희망의 방식으로 싸워야겠지요. 그러기 위해서 아름다워지는 투쟁이 필요합니다. 공동체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한 두터운 방호벽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소통을 가로막는 집착의 벽을 우리 스스로 허무는 희망의 싸움 말입니다."
▲ⓒ이지상의 사람이 사는 마을

그렇게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다

"한동안 벚꽃 지는 저녁이면 그해 5월의 역사 속에 청춘을 묻었던 열사들의 이름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이상이 없다면 실망도, 상처도, 두려움도 없다. 언젠가 가능성이 현실이 되리란 기다림으로 치열하게 현재의 꿈을 꾸는 것이 미래에 사는 것이라면, 큰 그림이 세워지면 세세한 과정은 징검다리와 같은 것이라면 삐뚤삐뚤 엇나가더라도 언제고 개울을 건너게 되지 않을까. 이 아픔과 공감의 눈물을 나누는 그리움과 기다림은 이어짐에서 비롯된다. 역사의 이어짐을 알면 분노할 줄 알게 되고 사람과의 이어짐을 알면 사랑하게 된다.

기억과 생활과 관계, 즉 삶은 사람이요, 노래는 사람의 사랑이다. 그래서 나이의 무늬(年輪)를 지닌 채 "사랑이 깊어 집착할 필요도 없는… 사람이 사는 마을"을 기다리는 한 음악인에게 "눈물이 되고 또 힘이 되는 노래를 찾는 일"은 "마음을 쉬게 할 작은 배를 만드는 것"이다. 이 순간에도 지난봄 눈부시게 진 벚꽃을 기억하는 자연은 게으름 피우며 남아 있던 겨울을 툴툴 털어내고 갈색 숲에 산수유의 노랑과 진달래의 연보라 빛을 점찍고 있다.

"노래 한 부분이 두고두고 가슴에 남아 사나운 불꽃의 심지처럼 어느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의 불길을 지펴주는 시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지 않는 사람을, 오지 않는 세상을 기다리는 일, 그 숱한 시간 다가올 상처에 대한 두려움과 외로움을 견디는 것, 그리하여 긴 겨울을 건너와 싹을 틔우는 봄등 같은 희망의 씨앗이 그리움이라면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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