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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협량'과 이명박의 '조급증'이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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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근혜의 '협량'과 이명박의 '조급증'이 만났을 때

"이회창 같은 사람 한명만 있어도 문제인데 둘씩이나…"

이재오 최고위원은 19일 오전 최고위원-중진 연석회의에 불참했다. 재보선 지원유세 일정 때문이라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지만, 지명직 최고위원 인선 등 당직개편 직후 열린 첫 회의인 만큼 '독자행보'라는 해석이 나왔다.

강재섭 대표는 회의 모두에 박희태 의원, 이상득 의원 등 두 중진들의 불참에 대해서는 "수해 지원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도, 이재오 최고위원의 불참사유에 대해선 한 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다. 강재섭 대표-이재오 최고위원의 '대치'가 하릴없이 길어질 것을 예고한 장면이다.

문제는 지금 한나라당이 겪고 있는 내홍이 어느 당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지도부내의 의견 대립 수준을 넘어섰다는 데에 있다. 박근혜-이명박 주연, 강재섭-이재오 조연의 당 내분에 대한 경고음이 숱하게 나왔음에도 당사자들은 이를 '공멸의 위기'로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특히 박근혜 전 대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대립각은 전당대회 이후 더욱 첨예해지는 양상이다. 특히 강 대표가 추진한 당직개편, 이재오 최고위원이 들고 나온 대선후보 선출방식 변경 문제는 이를 잘 드러낸 충돌지점이다.

이기고도 진 박근혜

무엇보다 강재섭 대표가 단행한 당직개편을 두고 말이 많다.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발탁된 권영세 의원조차 "이번 당직개편이 조금 편향되게 구성된 점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박근혜 전 대표나 강 대표의 측근 인사, 영남권 인사들이 주요 당직에 대거 발탁되면서 주류체제 강화가 확연했다.

지도부와 주요 당직에 자기사람들이 대거 포진하면서 '박근혜 수렴청정 구조'가 확인되기는 했지만, 이것이 박 전 대표에게 반드시 유리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골자는 계보정치와는 일정부분 거리를 둔 듯 보였던 박 전 대표의 이미지가 7.11 전당대회와 당직개편을 거치며 크게 훼손됐다는 것.

2년이 넘는 대표 임기 중 크고 작은 각종 선거에서 '박근혜 위력'이 발휘될 수 있었던 동력은 반(反)노무현-反열린우리당 정서를 적절히 활용한 대중과의 친화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표직에서 물러나자마자 당내 '세불리기'에 치중하며 막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당대회 때부터 반박 진영에선 "박 전 대표의 '협량정치'가 드러났다"는 악평까지 나왔다. '엄정중립' 약속을 깨고 선거 막판 측근들을 통해 '박심(朴心)'을 흘리며 역전극을 연출한 점은 당내 최대주주로서 아량과 여유의 부족을 드러냈다는 평가다. 게다가 박 대표의 의중이 반영됐든 아니든, 이번 당직개편은 '한나라당=박근혜당'이라는 공식에도 쐐기를 박은 셈이 됐다.

이길 수 없는 이명박

반대로 이명박 전 시장은 조급증을 드러냈다는 말을 듣는다. 이재오 최고위원이 당무에 복귀한 직후 특정인맥 일색인 시도당직자 물갈이와 함께 요구한 대선후보 경선방식 변경 주장 때문이다. 이는 이 전 시장과의 교감 하에 나온 주장이라는 게 정설이다.

이재오 최고위원은 18일 저녁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서도 "국민이 어떤 형태의 정부,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는 지도자를 원하느냐에 초점을 둬야지, 우리 내부에서 당원이 누구를 좋아하느냐를 갖고 국민의 대표를 뽑는 것은 부적합"하다며 100% 국민참여 경선 방식으로 변경할 것을 주장했다.

이 최고위원의 요구는 대번에 민감한 화두로 발전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박근혜 전 대표는 19일 "(대선후보 경선 방식은) 한두 명이 결정한 것이 아니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박 전 대표는 "9개월 간 당원들의 의견을 수렴해 만든 것이 아니냐"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강재섭 대표도 이날 "현재의 개혁안을 주장한 사람들이 지금 와서 거꾸로 하자고 나오는 것인데 특정인의 유불리를 갖고 말하면 안된다"고 반박했다.

당내 다른 계파들도 이 최고위원의 문제제기는 이번 전당대회를 거치며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이명박 전 시장 측의 대대적 반격의 징표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시행도 해보지 않은 제도를 뜯어고치자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새 지도부의 안착기와 당 혁신기를 거쳐 내년 1월 이후에나 표면화되는 것이 정상적 수순인 대권경쟁을 조기화시켰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의 총체적 한계"

지난 18일 열린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는 '대선 승리'라는 말이 수없이 반복됐다. 발언에 나선 최고위원들과 주요 당직자들은 "최선을 다해 내년 대선에서 승리하는 데 일조하겠다"고 거듭 밝혔다.

그러나 새 지도부 출범 이후에 벌어지고 있는 당직개편과 대선후보 선출방식 논란 속에 더욱 짙어진 대권주자들의 '욕심'은 오히려 '대선 승리'에서 멀어져가는 한나라당의 총체적인 오만을 드러낸 것이라는 지적이 당 안팎에서 일고 있다.

윤여준 전 여의도연구소장은 "현재 한나라당이 안고 있는 총체적인 한계"라고 지적했다. 그는 "당 구성원의 의식 구조 등 당의 구조적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면서 더 이상의 언급을 꺼렸다.

한길리서치 홍형식 소장은 "전당대회 때도 그랬지만 후보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대한 두 축에 의해 한나라당이 휘둘리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회창 전 총재 같은 강력한 대선후보 한 사람만 있어도 문제인데 둘이나 있다"면서 "두 사람의 힘 싸움은 새 지도부가 당을 일상적 체제로 끌어가기에는 너무나 큰 원심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런 마찰이 정치권 일각에서 거론되는 한나라다의 분당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미지수다. 홍 소장은 "무엇인가 촉발요인이 있으면 폭발이 가능하다"고 한 반면, 한국사회여론연구소 김헌태 소장은 "이명박 전 시장이 경선을 앞두고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크지 않다"고 부정적으로 봤다.

그러나 새 지도부가 신고식도 치르기 전부터 전개돼 온 두 대권주자의 과열된 힘겨루기가 한나라당의 '약한 고리'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이재오 최고위원의 19일 회의 불참을 두고 "살얼음 판을 걷는 아슬아슬한 기분"이라며 당내의 기류를 전했다. 18일 의원총회에 참석한 의원들이 보여준, 대권을 향한 한나라당의 자신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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