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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어머니, 우린 당신이 일어나길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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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어머니, 우린 당신이 일어나길 기다립니다" [전태일 통신]<72> "저렇게 병상에 있어도 한순간 벌떡 일어날 것"
8월 3일 오전 10시, 서울대 병원 중환자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늦게 병문안하게 되어 죄송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손을 소독하고 마스크를 하고 다가갔다.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다음이라 그런지 안절부절못하는 심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모습을 뵙는 것이 조금 떨리기는 했다. 심장이 멈추었다가 다시 박동을 한 이후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는데, 어떤 상태인지?

누워 있는 얼굴 모습은 평화로워 보였다. 몸은 아주 작았다. 키가 아주 작았던 옛날 우리 할머니처럼 보였다. 전태삼 동지가 이야기한대로 피부색은 좋았다. 우리나라 말로 살색 그대로였다. 그렇게 피부색이 돌아온 것도 최근 일이라고 했다. 다만 발등 부분은 어디에 부딪친 것처럼 붉고 푸르게 변해 있었다. 전태삼 동지 말로 주사 바늘에 너무 많이 찔려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몸은 따뜻했다. 이마를 짚어보니 열이 약간 있었다.

어머니 귀에 대고 이름을 말하니 발이 조금 움직이더란다

전태삼 동지가 이름을 대고 어머니를 불러보라고 했다. "김승호가 왔습니다. 노동대학에서 일하는 김승호가 왔습니다" 라고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말씀드렸다. 얼굴이 살짝 움직인 듯 아닌 듯했다. 옆에서 함께 병문안 중이던 최혁배 동지에게 어머님에게 "최혁배 왔다"고 문안인사 드리라고 했더니, 다른 환자들에게 폐가 된다고 큰소리로 말하지 말라고 오히려 핀잔을 준다. 최혁배 동지가 어머님 손을 만져보더니 손끝에는 온기가 없다고 한다. 만져보니 그 말 그대로였다. 혈액순환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증좌다.

▲ 이소선 여사 ⓒ프레시안
중환자실을 나오면서 어머님 의식이 아직 돌아오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더니 전태삼 동지는 표현은 하지 않아도 말하는 것을 다 알아듣는다고 말했다. 노동대학 막내인 윤보중 동지가 한 마디 거든다.

아까 내가 어머니 귀에 대고 이름을 말했을 때 발이 조금 움직이더란다. 의식이 전혀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병세가 어떻게 될지를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닌 듯했다. 전순옥 동지는 불안해하는 기색이었다.

마침 중환자실에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서울지역지부 김애란 지부장과 서울대 분회 부분회장 김혜정 동지도 동행했다. 같이 병문안한 분들에게 노동조합 사무실에 가서 커피라도 한잔 들고 가라고 한다. 전태일 동지의 가족인 전태삼, 전순옥 동지, 전태일 재단 박계현 사무총장과 한석호 동지, 민종덕 동지, 최혁배 동지 등이 우리 대학 상근일꾼 일행과 함께 방문했다. 찾아가는 길이 미로 같다. 수십 번도 더 다녀 온 노조 사무실이지만 안내표시가 없이는 지금도 찾아갈 수 없다.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방담이 오가는 중에 전순옥 동지가 서울대 병원 노조 간부들에게 물었다. 의사나 간호사를 통해서 어머니 병세가 어떻게 될지 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느냐고. 김애란 지부장이 미안하다는 듯이 대답한다. "중환자실에 들어온 환자의 경우 의사나 간호사들도 병세가 어떻게 될 지 잘 알지 못한다."고. 그래서 "의료진들도 구체적으로 뭐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라고. 사실 중환자실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생사가 위태롭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생의 쪽이다, 사의 쪽이다"라고 어떻게 함부로 말을 하겠는가. 수긍이 가는 말이다.

아직 우리 곁을 떠날 시기는 아닙니다

그렇기는 해도 최근 어디에선가 '의사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 환자와 소통하는 능력'이라는 글을 읽은 것이 생각난다. 이소선 어머니 같은 유명 인사의 가족도 의료진과의 소통 부족을 느낀다면 일반 환자들의 경우에는 어떻겠는가. 소통이 이 시대의 화두가 된 것도 다 까닭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전문가와 대중, 엘리트와 대중이 갑과 을로 철저히 분리되어 있는 세계.

민종덕 동지도 한참 만이다. 민종덕 동지는 머리를 파마를 해서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최혁배 동지는 삼십여 년 만이다. 미국에 산다는데, 얼마 전에 들어왔다고 한다. 머리가 많이 세었고, 지팡이를 짚고 있는 것을 보니 건강이 좋지 않은 듯했다. 그런 모습인데도 바로 알아 볼 수 있다니, 청년 시절인 70년대에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하던 동지들은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모양이다.

최혁배 동지는 청계피복 노조가 군사독재 정권으로부터 탄압받아 사무실도 없이 거리에 나앉았던 시절, 독일에 가서 큰돈을 조달해 와서 '평화의 집'을 마련할 수 있게 한 장본인이다. 이소선 어머니로부터 그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이소선 어머니 병문안온 덕분(?)에 그런 귀한 동지를 오랜 만에 만난 것이다.

이소선 여사는 연세가 팔순이 넘었다. 그 세월을 편안하게 산 적이 없다. 그로 인해 몸이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사실 작년 노동자대회 때 단상에 올라서 전태일 상을 수여한 후에 잠시 한 말씀 했지만, 매우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끼리 내년부터는 무리하게 단상에 모시지 않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도 했었다.

그러던 중에 박계현 사무총장을 통해 금년 들어 건강상태가 부쩍 나빠졌다고 전해 들었다. 건강상태가 좋지 못하기 때문에 회의 차 재단에 갔을 때에도 굳이 어머님 문안인사를 하지 말라고 말렸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쓰러진 것이다. 그래서 사실 걱정이 많이 된다.

연세가 많기는 하지만 이소선 어머님이 우리 곁을 떠날 때는 아직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이소선 어머님이 여러 차례 하던 말씀이 생각나서다. "민주화만 되면 노동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올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같은 족쇄를 여러 개 더 차게 되었다."던 한탄 말이다.

바로 그 신자유주의의 족쇄들 때문에 또 하나의 전태일이라고 할 김진숙 동지가 35미터 고공에서 정리해고 철폐를 외치며 목숨을 건 투쟁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 곁을 떠나겠는가? 신자유주의의 화신으로서 노동자 착취와 탄압을 야만적으로 자행하는 이명박 정권이 아직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어떻게 눈을 감겠는가?

병실을 나오면서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이소선 어머님은 정신력이 대단한 분이므로 저렇게 병상에 누워 있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벌떡 일어날 거야"라고. 그 분의 말처럼 정말 그렇게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11시에 서울대 병원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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