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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에 떠난 사람들, 그들이 원한 건 '함께 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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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에 떠난 사람들, 그들이 원한 건 '함께 살자'였다"

시월도 중순이 지났다. 바람이 매서워졌다. 이맘때면 라디오 음악 채널에서 유독 자주 나오는 노래가 있다.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와 <잊혀진 계절>이다.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란 가사가 마음을 덥혀 준다면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 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는 야릇한 추억과 슬픔을 부채질한다.

저마다 시월에 관한 사연을 터뜨릴만한 애틋한 계절…, 같이 기억하고 나누어야 할 사연 또한 적지 않다.

한 달 동안 유서를 가슴에 품고 있었던 김주익

주말마다 일하러 가는 식당의 동료 한 사람은 나를 볼 때마다 "그 아줌마 아직도 못 내려왔어?"라고 묻는다. 그 물음에 나는 한숨으로 답할 뿐이다. 그리곤 생각한다. '벌써 일주일이 또 지났구나.' 묻는 이가 의도한 바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안' 내려온 것과 '못' 내려온 것의 차이는 크다.

김진숙 씨는 '안' 내려온 것이 아니라 '못' 내려오고 있는 것이 맞고, 그것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었던 그 질문은 한 사람이 35미터 높이 크레인에서 그리도 오래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같은 사람으로서의 안타까움에서 나온 것이다.

▲ 김진숙 지도위원. ⓒ노동과세계(이명익)

이번주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더 무거웠을 것 같다. 8년 전 동료 김주익 씨가 그 크레인에서 목을 맨 날이 이번주 월요일이었다. 2003년 10월 17일 아침 9시경 129일째 홀로 고공농성 중이던 한진중공업노조 김주익 위원장이 목을 맨 채 발견됐다.

한진중공업은 2002년 3월부터 인력체질개선이라며 전체 노동자 가운데 25%인 650여 명을 강제사직시켰고 그때부터 시작된 임단협 투쟁이 해를 넘겨 계속됐다. 2003년 6월 노동부 중재로 임금교섭과 해고자 복직, 손배‧가압류의 원만한 처리 등이 잠정 합의됐지만 사측의 불이행으로 물거품이 됐다. 이에 김 위원장은 홀로 크레인 위로 올라가 항의 농성을 시작했던 것이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사측은 파업으로 인한 손해에 대해 노조에게 150억 원 상당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겠다고 했고, 노동자들에게 가정통신문을 보내 미복귀 조합원 모두에게 개별적으로 손해배상을 묻겠다고 했다.

이미 앞서 수차례에 걸쳐 손배소송이 제기됐던 터라 노조는 조합비 전액을, 조합원들은 임금의 절반을 가압류 당한 상태였다. 게다가 김 위원장 등 노조간부들은 살고 있는 집까지 가압류 당한 상태였다. 손배‧가압류를 통해 사측은 이미 김 위원장의 목에 올가미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김주익 씨의 사망 현장에서 발견된 유서는 9월 9일자로 되어있었다. 한 달이 넘도록 유서를 품은 한 사람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을 것이고, 누군가 자기 소리를 듣고 달려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을 것이다.

김진숙 씨가 말하는 건 '함께 살자'

같은 시월에 떠난 이는 또 있다. 23일에는 대구 세원테크 이해남 지회장이 분신했고, 26일에는 근로복지공단비정규직노조 이용석 광주전남본부장이 "비정규직 차별 철폐하라!"고 외치면서 비정규노동자 대회에서 분신했다. 두 분 다 병상에서 사투를 벌이다 운명했다.

이해남 씨는 어렵게 노조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구속과 해고와 수배에 쫓겨야 했고 사측의 노조파괴공작에 노조원들은 손배와 가압류에 시달려야 했다. 이용석 씨가 고발한 비정규직 차별은 동료들의 증언에서 터져 나왔다.

'정규직의 60%에 불과한 임금을 받는다', '정규직은 다 받는 식대나 출퇴근 교통비도 받지 못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같은 업무를 하는데도 부서 회의 때 부르지 않고 손님 오면 커피를 타는 것에서 사무실 걸레질까지 비정규직의 몫', '정규직은 최고 90일까지 받을 수 있는 병가가 비정규직에게는 해당되지 않아 아파서 병원에 가려면 임금 삭감을 감수해야 한다'….

끝없는 차별의 사슬이었다. 그렇게 시월에 떠난 그들이 세상에 맞설 때는 사람들이 세상을 가리켜 '20 대 80'의 세상이라 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 금융가를 점령하고 있는 시위대들은 1% 대 99%의 싸움을 말하고 있다. 20 대 80이 1 대 99로 변한 것은 돈과 권력이 어디로 쏠렸으며 인간존엄성이 얼마나 황폐해졌는가를 한마디로 증언해준다.

저마다 다양성은 있다 할지라도 99인 사람들이 오늘날 외치는 것은 '함께 살자'가 아닐까? 함께 살지 않으면 그건 1인 저들이 100을 전부 가지게 되는 세상이 되는 것이고 그건 끝이란 마지막 경고가 아닐까 한다. 김진숙 씨의 크레인은 함께 살아야 할 삶의 가치를 먼저 차지했고 점령했고 수많은 삶을 거기로 불러 모았다.

그에 화답하는 것은 김진숙 씨를 '못' 내려오게 하는 장벽을 철수시키는 것이고 그게 '함께 살고픈' 사람들이 점령해야 할 첫 번째 고지라는 걸 시월에 떠난 이들의 목소리에서 확인한다.

시월에 떠난 사람들의 유서

고 김주익님의 유서

(…)
노동자가 한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그런데도 자본가들과 썩어빠진 정치꾼들은 강성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이다.
1년 당기순이익의 1.5배, 2.5배를 주주들에게 배당하는 경영진들, 그러면서 노동자들에게 회사가 어렵다고 임금동결을 강요하는 경영진들. 그토록 어렵다는 회사의 회장은 얼마인지도 알 수 없는 거액의 연봉에다 50억 원 정도의 배당금까지 챙겨가고 또 1년에 3,500억 원의 부채까지 갚는다고 한다.
이러한 회사에서 강요하는 임금동결을 어느 노동조합, 어느 조합원이 받아들이겠는가.
이 회사에 들어온 지 만 21년, 그런데 한 달 기본급 105만 원, 그중 세금 등을 공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80여만 원.
근속연수가 많아질수록 생활이 조금씩이라도 나아져야 할 텐데 햇수가 더할수록 더욱 더 쪼들리고 앞날이 막막한데, 이놈의 보수언론들은 입만 열면 노동조합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난리니 노동자는 다 굶어 죽어야한단 말인가.
이번 투쟁에서 우리가 패배한다면 어차피 나를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 한사람이 죽어서 많은 동지들을 살릴 수가 있다면 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
그동안 부족한 나를 믿고 함께해 준 모든 동지들에게 고맙고 또 미안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사람은 태어나면 죽는 것, 40년의 인생이었지만 남들보다 조금 빨리 가는 것뿐, 결코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집사람과 아이들에게 무엇 하나 해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헤어지게 되어서 무어라 할 말이 없다. 아이들에게 휠리스인지 뭔지를 집에 가면 사주겠다고 크레인에 올라온 지 며칠 안 되어서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조차 지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

고 이용석 님의 유서

(…)
32년 평생(일생)동안 우리 공부방 어린 학생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은 그들이 내 삶의 스승이자 등대였습니다. 내 어두운 미래와 긴 터널 속에서 나를 빛으로 깨우게 한 나의 동반자였습니다.
(…)
동지여러분!
우리가 모인 이 자체가 노동자로서 승리입니다.
직원을 탈피한 진정한 노동자로서 삶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자리 함께 하지 못한 동지들의 몫까지 우리가 싸워야 합니다. 노예문서 같은 비정규직 관리세칙을 파기하고, 고용안정을 외치는 우리의 요구는 당연한 것이며 마땅히 쟁취해야 합니다.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을 버리고 나만, 우리만 함께 한다면 반드시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오늘 이 모인 자리를 자축하며 즐겁게 투쟁합시다.
동지 여러분!
우린 정말 순수하고 자주적으로 일어섰습니다.
임금투쟁은 매년마다 할 수 있지만 기본 없는 노동조합은 결국 쉽게 어용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선 이 자리 이 시간들의 의미를 잃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짐을 챙겨 떠날 때 그 날 어머님이 시골에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도 차마 얼굴을 뵙지 못한 게 미안합니다.
(…)
동지여러분!
하나가 모여 둘이 되고 둘이 모여 넷이 되듯,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루려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100이 되지 않더라도 정당한 길을 간다면 그 뜻을 이룰 것입니다.
오늘 다 함께 하지 못함이 내일을 바라볼 수 있는 기약이라 생각하십시오.
오늘 동지들이 모여 있음이 자신과의 싸움에 승리하였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린 정당하고 새로운 길을 찾았음이 꼭 승리하였습니다.

고 이해남 님의 유서

노동자가 가진 것 없고 배운 것도 없어 몸 하나에 인생을 의지하고 살면서 정말로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법에서도 보장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런데, 우리도 인간답게 살려고 나름대로 열심히 투쟁했고 투쟁한 대가로 구속도 되었고 해고도 되었다. 노동자가 법에서도 보장된 노동조합 활동을 한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구속되고, 수배되고, 해고되는 정말로 웃기는 나라에서 더 이상은 살아갈 희망을 갖지 못할 것 같다.
(…)
마지막 바램이 있다면, 내 한 몸 희생으로 노동탄압, 구속, 수배, 해고, 가압류라는 것들은 정말 없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
사랑하는 가족에게
(…)
여보! 나중에 인호, 경호가 크면 이 아빠의 마음을 이해할 거야. 지금은 아직 어리니까 이 못난 아빠를 야속하게 생각하겠지. 힘들고 어렵더라도 두 아들이 있지 않소? 경호는 듬직하고 의젓해서 믿을 만하고, 인호는 개구쟁이지만 손재주도 많고 영특해서 나중에 잘 될 것 같고. 여보! 나 없더라도 우리 조합원들이 잘 챙겨 줄 거야. 1주일에 한 번쯤은 애들 목욕 부탁도 하고…
인호야! 경호야! 정말 미안해… 못난 아빠 용서해 주렴. 그리고 모레가 인호 생일인데, 같이 못해 미안하다. 인호야. 아빠가 하늘나라에서 너희들 자라는 모습 지켜볼게. 안녕.
(…)
대통령에게
(…)
대한민국 헌법 1조에 이렇게 되어 있더군요. "법은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다" 정말로 웃기는 얘기 아닙니까? 돈 있고 빽 있는 놈들은 수천억을 해 쳐 먹고도 검찰에 출두해서 며칠 콩밥 먹고 나오면 그만이고,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들, 농민들, 빈민들은 생존권 사수를 위해 투쟁했다는 이유로 몇 년씩 구속되고, 수배되고, 가정까지 파탄되는 지금의 이 나라 현실이 아닙니까?
(…)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야 이 나라의 노동정책이 바뀔 수 있겠습니까?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제가 마지막 희생자가 돼야 합니다. 노동자들과 대화는 외면한 채 오로지 노동자 죽이기로 일관하고 있는 악질 기업주들에 대해서 반드시 정부 차원의 대응이 있어야 합니다. 그 것만이 이 나라의 경제를 살리는 길이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 글은 "시월에 떠난 사람들의 유서"라는 제목으로 주간인권신문 <인권오름>에도 실렸습니다. <인권오름> 기사들은 정보공유라이선스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정보공유라이선스에 대해 알려면, 을 찾아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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