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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라도 어쩔 수 없다', 그 이후 모든 게 엉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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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라도 어쩔 수 없다', 그 이후 모든 게 엉켰다" [현병철 인권위, 3년을 말하다·⑤] "2010년, 나를 힘들게 한 기억"
2010년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험악했던 조직축소 정국이 끝나고 '그래도 일은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했다. 아무리 괴로운 일이라도 지나면 잊힐 것이고 어제의 상처에 매달려 오늘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인간사 모든 일이 언제나 그렇듯이.

2010년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맞이하기 싫지만 맞아야만 하는, 새로운 내일을 위해 오늘을 묵묵히 살아야 하는 새 출발의 시간이었다. 조직축소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일만 바라보고 가야 했다.

그러나 바로 그 해, 흔들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했던 그 해에 2009년 조직축소 충격보다 더 큰 좌절을 맛보았다. '일개 말단 공무원이 뭐 그런 일에 신경 쓰느냐, 일만 해라'고 핀잔을 들을 수도 있겠고, 사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양심이란 게 있고 이것이 흔들리는 순간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MBC <PD수첩> 사건이나 박원순 변호사 사건에 대해 의견을 제출하지 않기로 한 사건은 양심의 문제까지 거론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 결정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개인적 선호가 있겠으나 사무처 직원의 처지에서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독립적 판단 주체인 인권위원들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2010년 내내 무언가에 홀린 듯 이상한 일들이 연속해서 일어났다는 점이다. 수많은 사건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사무처와 상임위원회 무력화'쯤 될 것이다. 대략 시기적으로는 프랭크 라 뤼 UN 의사·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이 방한했던 5월부터 문경란, 유남영 두 상임위원이 사퇴한 11월까지다.

잘 알려진 것처럼 특별보고관은 외교통상부를 통해 위원회에 수차례 상임위원 등 인권위원들과의 공식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위원회가 이를 거부하고 위원장 단독면담만 진행하는 바람에 일부 상임위원들은 사적으로 특별보고관을 면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특별보고관이 기자회견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면서 언론에 수차례 보도되고 국회에서까지 지적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 특별보고관 사태는 2010년 위원회에서 발생한 무수한 갈등의 여러 계기 중 하나일 뿐 전부는 아니었다.

▲ 현병철 위원장. ⓒ연합뉴스

용산 참사, 인권위 사태의 시발

돌이켜 보면 사태의 시발은 2009년 12월 끝자락이었다. 용산철거민 사망사건과 관련하여 법원에 의견을 제출하는 안건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당시 담당 조사관은 2010년 1월 초 장문의 글을 내부 게시판에 남기고 2월 사무실을 떠났다. 그는 이 글에서 위원들이 전원위에 안건을 직접 상정하는 것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중단시키라"고 위원장이 직접 사무총장과 담당 과장에게 지시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 용산사건은 조사보고서가 완성되기 직전인 11월에 가서야 검찰수사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인권위법에 따라 '수사기관 이송'으로 종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일부 인권위원들이 재판부에 의견을 제출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했던 것인데, 그때 위원장이 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정 자체를 막으려 했는지 그 깊은 속을 헤아릴 수는 없다. 다만 12월 28일 전원위에 상정된 그 안건을 심의하던 도중 '독재라도 어쩔 수 없다'며 절차를 무시하고 회의장을 나가버린 막무가내로 볼 때 무언가로부터 쫓기는 수준의 심리적 압박에 시달린 듯하다. 이 심리적 압박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다만, 상식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는 막연한 느낌만 있을 뿐이다. 비록 위원장이 기관을 대표한다고 해도 협의제 기관에서 위원들이 상정한 안건을 사무총장과 실무과장에게 '막으라'고 지시한 건 용인될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비록 한 템포 늦긴 했지만 결국 인권위는 법원에 의견을 제출했다.)

문제는 2010년부터였다. 1년 동안 총 4~5건이 부결됐다. 법적으로 부결은 위원회의 고유 권한이지만, 사무처 안건 검토 과정부터 관리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심각한 일이었다. 상임위원과 위원장의 갈등은 점차 커졌고 사무총장은 그 사이에 끼어서 사무처를 제대로 총괄하지 못했다. 위원장이 사무총장의 권한을 거의 인정하지 않고 사실상 독임제로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곳곳에서 감지되기도 했다.

합의제 위원회 조직에서 위원장/상임위원/사무처 간의 관계는 불가근불가원으로 대화와 협의에 기초한다. 절묘한 신뢰의 정치가 전제되지 않을 경우 위원회는 독임제 관청으로 전락하기 십상이고 사무총장은 그냥 일반 정부부처 실장급 간부로만 전락한다. 이렇게 되면 위원회와 사무처 간의 관계는 더욱 왜곡될 수밖에 없다.

붕괴된 위원회와 사무처간 상호협조 관계

2010년 1월 과장급 인사 문제와 관련하여 사무총장이 사표를 제출했다. 사무총장이 고심 끝에 준비한 인사안이 위원장의 추인을 받지 못한 탓이었다. 비록 사무총장의 사표가 반려되기는 했지만 위원장과 사무총장은 사실상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셈이었다. 5월 특별보고관 면담을 둘러싼 갈등은 위원회 내에서 사무총장의 입지가 사실상 사라지는 계기로 작용했다. 사무총장은 위원장과 상임위원 사이에서 사실상 파국만 남아있었을 뿐임을 인식했는지 6월이 되자마자 위원회를 떠났다.

위원회에 안건을 상정할 권한은 사무처뿐만 아니라 인권위원 모두에게 부여되어 있다. 다만 위원들이 직접 안건을 상정하는 경우는 양날의 칼과 같아 신중해야 한다. 매우 급박한 상황이거나 예외적인 경우로 한정해야지 직접 상정이 남발된다면 사무처의 존재 근거가 사라진다. 또한 안건 상정 과정에서 사무처 계선 조직이 활용될 경우 사무총장의 권위까지 추락한다. 전임 사무총장의 경우도 이런 상황에 직면했을 것으로 능히 추정할 수 있다. 사무처에서 안건이 상정되지 못하도록 사무처 스스로(심지어 사무총장을 무시한 채!) 방해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이를 감지한 위원들이 직접 안건을 상정할 수밖에 없는 사면초가 상황에서 그 누군들 버틸 수 있었을까 싶다.

당시 직원들 중에는 위원들의 직접 상정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이들의 비판은 옳지만 사태의 일면만 주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사무처는 이미 위원장 중심의 독임제로 운영될 기미가 완연했고 사무총장이 실장급 간부로 전락하는 상황이었기에 위원들은 긴급 현안에 침묵할 수 없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위원이 직접 안건을 상정하는 일이 지금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11년 하반기에 결정된 북한 인권 관련 정책권고 중 여러 건이 위원 발의 안건이었고 안건준비에 사무처 실무자들이 동원되었다. 위원이 아이디어를 내고 실무자가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국장과 사무총장이 능동적으로 개입할 여지는 거의 없다. 2010년과 다른 점이라면 이에 대한 비판조차 사라졌다는 대목이다.

위원회와 사무처 간의 긴장감 있는 상호협조 관계의 붕괴를 상징하는 사건이 하나 더 있다. 당시 직원들 사이에서도 많이 회자되었던 일이다. 2010년 상반기 위원장이 급작스럽게 상임위원 간담회를 '못하겠다.'고 선언했다. 서로 맞대면하기 불편한 건 사실이겠지만 전임 위원장 이후 위원장/상임위원/사무총장/국장 간의 가벼운 간담회 자리는 '대화와 협의에 기반한 신뢰구축'을 위한 최적의 장치였다. 사실상 유일무이했던 대화의 장이 사라지면서 상임위원들은 사무처가 어떤 주제로 어떤 안건을 검토하고 있는지 제대로 공유하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그 결과 일상적인 메모 보고 등으로 공유할 사안들까지 모두 상임위원회 '안건'으로 상정하는 행정력 낭비가 고착화되고 있다.

사무총장이 떠난 뒤 상황은 더 어려워졌다. 6월 28일 개최된 2010년도 제11차 전원위원회에는 특이한 안건이 하나 상정되었다. 직원들도 많이 참석했지만 외부 방청객 수만 해도 이례적으로 많은 총 24명이었는데 기자만 16명에 이르렀다. 아마도 신임 사무총장 임명 건이 상정되었기 때문에 그리 붐볐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특이 안건은 '국가인권위원회 운영규칙' 상 상임위원들이 상임위원회에 안건을 제출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이 없다고 해석하는 보고서였다. 아주 틀린 해석은 아니며 충분히 주장할 만한 논거를 가지고 있었으나 문제는 이런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민감한 안건이 상임위원회에서 논의되는 순간 위원장은 고립되고 모두 통과될 것이 명약관화하기에 이를 미연에 방지하는 게 목적이었다. 이처럼 뻔한 정황을 인권위 직원들은 대부분 알았다. 그러니 직원들이 위원장의 꼼수를 비판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사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상임위원들

논의 결과는 '개별 위원이 관련 문제점에 대해 의견을 제출하면 개정안을 마련한다.'는 거였다. 이에 따라 3명의 비상임 위원이 개정안을 마련하여 10월 25일 전원위에 상정했는데, 위원장이 직권으로 전원위에 상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설령 상임위원회에서 1:3으로 몰리더라도 위원장이 상임위보다 전원위에서 다루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할 경우 나머지 상임위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직권으로 전원위 회부가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당시 개정안에서는 고문경찰 직권조사 결정이나 공항 전신스캐너 권고 결정을 예로 들면서 "상임위의 거듭된 파행결정"이라 표현하고 있다. 상임위 무력화의 극단을 보여주는 이 운영규칙 개정안으로 인해 꿋꿋이 참고 견뎌왔던 문경란, 유남영 두 상임위원이 사퇴했다. 상임위원이 무시당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그리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문제는 당시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심지어 청와대가 위원장의 용퇴를 권유했다는 보도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위원회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던 문제의 안건은 2년 가까이 표류하면서 관련 내용이 여러 번 수정되었다. 결국 지난 5월 27일 위원장에게 직권상정 권한을 주자고 제안했던 비상임 위원이 스스로 해당 조항을 철회하면서 수정 의결되었다. 총 5차례나 전원위에 상정되는 진기록을 세운 뒤였다. 안건상정의 목적은 전혀 이루지 못한, 아니 이제는 이룰 필요성이 더 이상 없는 운영규칙 개정안은 이렇게 종결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위원회 내부에서조차 관심을 갖는 이가 없다.

2010년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일련의 부결 결정이 아니라 인권위의 핵심 동력인 사무처의 형해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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