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열된 입시 경쟁,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학교 폭력, 공교육을 대체하다시피 팽창해버린 사교육 등. 가르침과 배움은 사라지고 오로지 '등수 매기기'에만 골몰하는 교실 풍경은 이제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식상할 지경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육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다들 이런 식상한 이야기를 하곤 하지요. 누구나 알고 있는 현실 진단을 기계적으로 읊조리는 정책 당국자, 학자들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느끼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뻔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풍경, 그 맞은편에는 학교 폭력, 입시 부담, 혹은 어른들이 짐작하지 못하는 그밖의 어떤 이유로 자살을 고민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세상을 떠나고 싶을 만큼 심각한 문제 앞에서, 어른들은 왜 '뻔한 이야기'만 반복하는 걸까요. 어쩌면 이런 간극이야말로 우리 교육의 절망적인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지금 진짜 필요한 미덕은 '솔직함'일 수 있겠다고 봅니다. 짧은 자기 경험으로 섣부르게 단정짓기보다 교육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아주 하찮은 수준이라는 걸 솔직히 인정하고 시작하는 태도 말입니다. 또 근대적인 학교 모델이 이젠 어떤 구조적인 한계에 부딪혔다는 점, 그리고 그 한계와 모순에 대한 우리의 인식 역시 한계가 있다는 점 역시 솔직히 인정하는 게 필요해 보입니다.
대안교육 격월간지 <민들레>에 주목한 건 그 때문입니다. 지난 1999년 창간된 이 잡지의 시선은 '학교 너머'를 향하고 있습니다. "학교가 바뀌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만큼 우리는 학교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 시스템을 만들자"라는 <민들레>의 목소리가 교육에 관한 '뻔한 이야기'들에 갇혀 드러나지 않았던 '학교의 빈 곳'을 살피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편집자>
대체 누가 종북인가
종북을 두드리는 북소리가 요란하다. 만만한 게 '종북(從北)'이다. 동네북이 따로 없다. 통합진보당에 이어 정의구현사제단도, 이제는 하다못해 대안교육연대까지도 종북 단체가 되었다.
지난 11월 25일 열린 국회 본회의 대정부질문에서 김재경 새누리당 의원은 '대안교육연대'를 종북 성향으로 규정하면서, 비인가 대안학교들의 경우 "설립자나 교사 대부분이 강성 전교조나 종북 좌익단체 출신으로, 수학여행을 간다면서 제주 강정마을 집회 현장을 찾아가고, 베트남에 가서 한국군 민간인 살해 현장을 구경하고 있다"며 서남수 교육부 장관에게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이 필요한 것 아니냐고 물었다. 서남수 장관은 이에 대해 "문제가 많이 있다. 지금 교육기본법에 보면 '교육은 정치적으로 중립이어야 되고 어떤 파당적 이해를 위해서도 사용되어선 안 된다'는 명문이 규정돼 있고, 이는 대안학교에도 마땅히 적용되어야 한다"고 답변했다.
내 편 네 편 나누기 좋아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이는 모두 적으로 몬다. 강정마을을 가고 밀양을 찾고 촛불집회에 나가면 종북이 된다. 평화와 생태, 민주를 외치면 종북이 되니 참 아이러니하다.
미국 물을 잘못 먹은 것일까. 들리는 소문으로는 일본 물을 먹다 미국 물로 바꾼 이들 중에 녹색을 적색으로 인식하는 이상한 색맹 증상을 보이는 경향이 종종 나타난다고 한다. 치료도 쉽지 않은 듯하다. 게다가 이 증상은 유전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니 안쓰럽기까지 하다.
이 아름다운 녹색별에서 살면서 녹색을 볼 줄 모르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녹색성장이라는 이름으로 강을 무참히 망가뜨리는 행태를 봐도 저들은 녹색을 감지 못하는 시신경을 가진 게 분명하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녹색을 적색이라고 우긴다는 데 있다. 게다가 녹색을 사랑하는 이들을 반국가 사범으로 몰아 핍박하기까지 하니, 시신경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물 잘못 먹으면 뇌세포에까지 문제가 생기는 듯하다.
이처럼 분별력이 부족하고 단세포적인 사고력을 가진 이들이 사회지도층 행세를 하는 대한민국의 앞날이 심히 걱정스럽다. 반미(反美), 반(反)정부의 낌새만 보여도 적과 한편으로 모는 행태는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면 반미가 되고, 정부의 전력 정책에 반대하면 반국가 사범으로 몰리는 사회가 민주사회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는 행태로 보아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저들이야말로 종북 세력으로 보아 마땅하지 않은가. 권력세습까지 따라 하니 영락없는 종북이다. 하지만 이미 저들이 언론까지 장악해 말의 뜻조차 제 맘대로 정의하는 마당이니, 녹색을 적색이라 정의하면 사전까지도 바꿔야 할 판이다.
후진 사회다. 목소리 큰 자가 이기는 사회는. 정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시민단체를 적대시하는 것은 오히려 자충수를 두는 것이다. 정부가 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하고, 하기 어려운 말을 대신 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외교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으련만 알아서 기는 행태를 보이는 것은 참 보기 딱한 노릇이다. 권력과 자본의 편에 서서 종노릇을 하는 기득권 세력들은 자신들이 종박, 종미라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알고도 "그게 어때서?" 하는 건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른 목소리를 막지 못해 안달하는 이들이 지도층 행세를 한다는 점에서도 남과 북은 많이 닮았다.
자신들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목소리를 내는 집단은 모조리 종북으로 몰아세우는 것이야말로 후진 행태다. 대안학교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그런 후진 학교가 아니다. 생활 속에서 실제로 민주주의를 익히는 교육 현장이다. 굳이 '종(從)'을 따지자면, 대안교육 진영은 종북이 아닌 '종덴마크'임을 알기 바란다. 시민이 주축이 된, 150년 역사를 가진 덴마크의 자유교육운동을 모델로 삼고 있음을….
덴마크에서 좀 배우자
▲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 90호. ⓒ민들레 |
덴마크 사회를 관통하는 정신은 무엇보다 '소수자의 권리 존중'이다. 미국이나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말하자면 '다수를 위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선거에서 진 소수자들은 다음에 자신들이 다수가 되기만을 기다린다. 반면, 덴마크는 최초의 민주 헌법이 제정된 1849년 이후 '소수자를 위한 민주주의' 정신을 헌법에 우선으로 반영했다. 그룬트비를 비롯한 근대 덴마크의 정신적 지도자들은 이 헌법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다. 이들은 소수자가 다수자와 달리 생각하고 행동할 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다수자(국가)로 하여금 소수자의 권리 구현을 위해 재정을 지원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소수자 민주주의 전통이 덴마크의 독특한 교육 환경의 토대가 되고 있다.
덴마크에서 소수자는 스스로 원하는 학교를 세우고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1년 차에 학생 14명만 모집할 수 있으면 어떤 학교든 국가에서 지원한다. 2년 차에는 24명, 3년 차는 32명의 학생이 있으면 지원이 계속된다. 현재 9만7000여 명의 학생들이 프리스쿨을 비롯한 500여 개의 독립학교에 재학 중인데, 이 비율은 전체 학생의 13퍼센트에 이른다. 적어도 10퍼센트의 사회구성원들이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숨통을 틔워 놓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다.
다름을 서로 용인하지 못하면 서로 헤어질 수밖에 없다. 남과 북처럼. 더 나아가 상대방이 틀렸다고 믿으면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명의식까지 가세해 갈등의 골은 더 깊어지게 된다. 저쪽을 분쇄하려는 과잉 열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서로를 견제하느라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성장은 점점 요원한 일이 된다. 성장하지 못하면 정체되고, 정체되면 부패하기 쉽다. 우리 정치판의 앞날이 걱정스럽다. 이쯤에서 새누리당 김재경 의원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글로벌 토크쇼 <미녀들의 수다>에 나왔던 한 핀란드 여성이 팟캐스트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진보 정당은 핀란드에서는 보수다." 그러자 사회자가 물었다. "그럼 새누리당은 어떤가요?" 그 여성이 대답했다. "그런 당은 없어요!"
하지만 보수적인 정치꾼들의 행태만 탓할 일이 아니다. 정치판 수준은 우리 사회의 성숙도를 반영한다. 물론 핀란드에는 가스통 들고 나오는 늙은 해병대 아저씨들도 없고, 광장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도 없다. '종박천국 종북지옥'을 꿈꾸는 이들만 나무랄 일이 아니다. 저들과 대치하고 있는 진보 진영의 행태도 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워하며 닮는 것일까, 닮아서 미운 것일까? 진보 진영의 자기중심적 성향도 만만찮다. 내부의 반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이 있다. 비슷한 색깔들끼리는 모두 한 색깔, 한 편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녹색에도 수백 수천 가지 빛깔이 있고, 느낌이 서로 아주 다른 녹색들도 있다. 봄에 돋아나는 연둣빛 잎사귀와 가을에 바래가는 초록 잎사귀의 빛깔은 어찌 보면 빨간색과 녹색의 차이보다 더 클 수도 있다. 세대 담론에서 세대 내의 차이가 어떤 면에서는 세대 간의 차이보다 더 클 수 있다는 얘기와도 통한다. 어떤 점에서는 보수와 진보 간의 차이보다 진보 진영 내부의 차이가 더 클 수도 있다. 서로가 어떻게 다른지, 그 다른 이들이 어떻게 함께 어울릴 수 있을지 길을 찾아야 한다.
다양한 목소리를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힘없는 이들의 작은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다. 국민소득 2만 불이 넘었다고 으쓱대는 것은 패스트푸드 먹고 몸집만 커진 아이가 어른 흉내를 내는 꼴이나 진배없다. 미숙한 것이다. 문제는 미숙할수록 자신의 미숙함을 모른다는 게다. 그래서 성숙의 과정은 험난하다. 애벌레가 몇 번의 변태 과정을 거쳐 성충이 되듯이 위험한 고비를 넘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지금 또 한 번의 변태기를 거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제발 성숙한 사회로 환골탈태해서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 좀 해보자.
* 위의 글은 <민들레> 90호 "초록동색(草綠同色)?"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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