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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통'과 '빨갱이' 사이, 저항의 '광신'을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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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통'과 '빨갱이' 사이, 저항의 '광신'을 구하라! [프레시안 books] 알베르토 토스카노의 <광신>
"가장 선한 이들이 모든 신념을 잃어버린 반면,/가장 악한 이들은 격정적 열렬함으로 가득 차 있네." (W. B. 예이츠, '재림', 1919) 알베르토 토스카노의 <광신>(문강형준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에도 인용되어 있는(83쪽) 예이츠의 시구는 원래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파국과 종말을 맞이한 유럽의 참담하고도 암울한 분위기를 묘사한 것이다.

"사물은 흩어져 중심을 잡을 수 없고,/무질서만이 세상에 퍼지네./핏빛 어두운 조수(潮水)가 퍼지고 도처에서/순결의 의식(儀式)은 그 속으로 잠기네."

'재림'은 종말을 예감하는 혼탁한 시간이야말로 재림의 시간임을 예언하고 있다. 그런데 무엇이 재림하는가? 시는 어떠한 재림에의 희망도, 그리스도의 빛나는 도래도 예고하지 않으며, 행을 거듭할수록 오히려 핏빛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재림'은 사막의 "사자"를 닮은 "사나운 짐승"이 잠에서 깨어나 베들레헴으로 다가가는 것으로 끝맺는다. 파국과 무질서의 '핏빛 어두운 조수'가 점점 퍼져나가는 이 상황은 1차 대전 후의 유럽이 그러했듯이 제국과 주권국가, 사회경제적 시스템의 총체적인 붕괴를 뜻하는 것일까.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예이츠의 '재림'은 오히려 파국과 무질서를 관리하고 조장하는 '사나운 짐승'의 도래를 불길하게 예고하고 있는 것으로 읽히는가. 뛰어난 시는 시간을 거슬러 '시대착오적'(anachronic) 독해를 과감하게 허용한다. 예이츠의 시는 속칭 자유민주주의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 속을 조금만 뒤집어보면 '관리되는 민주주의'(푸틴) 또는 '의회자본주의'(바디우)에 지나지 않는 전지구적인 정치경제의 질서, 좁혀서 지금 남한의 상황에도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핏빛 어두운 조수'의 무질서, 항구적인 비상사태를 조장하는 한편으로 그 이외의 대안과 다른 세계에 대한 꿈을 무차별적으로 짓밟는 전지구적 의회자본주의 시스템이 예이츠가 오래 전에 불길하게 암시한 이 '사나운 짐승'의 진정한 실체라면? 반대로 '사나운 짐승'의 출현이 그 외관과는 다르게 '핏빛 어두운 조수'의 무질서를 끝장낼 '파루시아'(再臨, παρουσία)라면?

그러면 '모든 신념을 잃어버린' '가장 선한 이들'은 누구이며, '격정적 열렬함'으로 '가득 차 있'는 '가장 악한 이들'은 또 누구로 해석할 수 있을까. 최소한 세 가지 독해가 가능할 것이다. 첫째, 자유민주주의적, 보수주의적 독해. 이 독해에 따르면 가장 선한 이들이 신념을 잃는 상황은 오히려 축복할 만한 것이다. 예이츠 시의 묵시록적인 음성이야말로 '극단의 세기'인 20세기의 파국의 원인, 즉 모든 대의와 신념에 의해 광적으로 추동된 역사가 마침내 끝났다는 것과 의회 자본주의가 전지구적으로 승리했음을 알리는 나팔소리다. 그리고 이러한 승리는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계몽주의의 오랜 적자인 서구문명을 위협하는 근본주의의 세력, '격정적 열렬함'으로 가득 찬 '사나운 짐승'의 세력을 소탕하거나 의회자본주의의 복음으로 길들이는 문명적 과업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 <광신>(알베르토 토스카노 지음, 문강형준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둘째, 중도 좌파, 자유주의적 좌파의 독해. 이 독해에 따르면, 신념을 잃은 가장 선한 이들의 정체는 조촐한 쾌락과 안녕만을 바라면서 대의를 따르는 삶보다는 한낱 생존의 방편을 찾는 '최후의 인간'(니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이것은 4~5년에 선거로 한 번씩 돌아오는 의회주의적 경로 이외의 대안적 정치는 불가능하다는 막다른 현실에 직면한 형해화된 좌파들이 처해있는 곤경에 대한 진단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격정적 열렬함이라는 당파와 신념의 정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테러리스트와 근본주의자로 고백하고 제 발등을 찍는 격이다. 오직 지배 세력과의 협상의 테이블을 마련하며, 차이와 타자성을 윤리적으로 승인하고, 의회민주주의 안에서 좌파정치의 가능성을 최대한 도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의는 의회로 대치하고, 더러운 똥은 밟지 않고 피해가는 게 상책이다. 좌파가 좌파로 살아남으려면 이른바 '종북좌파'와는 절연해야 마땅하다. 세 번째 독해는 바로 "짐승"(412쪽)을 자처하는 이 책, 알베르토 토스카노의 <광신>의 출발점이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영미권에서 활동하는 차세대 좌파이론가이자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영어번역자로도 유명한 알베르토 토스카노는 <광신>에서 근대 서구의 정치, 철학, 종교에서 "저주받은"(22쪽) 개념으로 낙인찍힌 광신(fanaticism)을 계보학적으로 복원하고자 한다. 광신, 이른바 '미친 믿음'은 많은 것이 걸려 있는 아주 모호한 개념이자 어휘이다. 광신은 일상생활, 정치, 철학, 종교에 두루 애매하게 걸쳐 있을 뿐만 아니라, 이성과 정념, 인식과 존재, 사유와 행동, 재현과 매개, 역사와 초월성, 동시대성과 비동시대성 등을 부단히 오가는 '부유하는 기표'(floating signifiant)로도 보인다.

그러나 광신에 대한 가장 현저한 일차원적인 반응이자 최종적인 반응은 기껏 잘 봐주더라도 비합리적이며, 더 이상 재고할 필요조차도 없다는 것이리라. 심지어 누군가 제아무리 자유와 평등이 보편적인 가치라고 주장하더라도 그것을 대화와 협상이라는 민주주의적 절차의 미덕을 무시하고 신념과 원칙으로 관철시키려는 극단주의적인 태도를 만일 드러내게 된다면, 또 다른 누군가는 그러한 태도뿐만 아니라 자유와 평등조차도 심지어 광신적인 것으로 의심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광신은 언뜻 식별하기가 어려운 차이와도 같다. 지하철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귀가 따갑도록 외치는 교인의 광신과 물대포와 최루탄을 마구 쏘아대는 경찰을 쇠파이프로 두들겨 패면서 부정 선거를 규탄하고 인민주권을 외치는 시위대의 살벌한 눈빛에 담긴 광신은 또 어떻게 다를까. 토스카노가 <광신>에서 문헌학적으로 발굴하는 '광신자'의 형상은 어떤 경우에는 우스꽝스럽게 악마화된 캐리커처로 그려지며, 심지어 이 책에는 광신자의 발생에 관한 환상적인 지리학도 등장한다. 예를 들면, 지롱드당원에게 암살당했던 장 폴 마라와 같은 혁명가는 비정상적인 대두(大頭)였으며, 정치적 반란자들은 이동 인구가 수렴되는 계곡에서 많이 발생한다는 식이다. 어쨌든 이래저래 광신은 광기의 사촌이며, 광신자는 사탄의 형제자매다. 광신은 인간을 괴물로 만든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토스카노가 <광신>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불안한 소수 특권층의 정치제도와 경제 행위, 그리고 우리시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모든 가능한 세계 중 가장 덜 나쁜 것으로 옹호하는"(14쪽) '착하고 올바른' 시대를 살고 있다. 국가에 항의하는 시위와 집회도 적과 싸워가면서 적을 닮지 말아야 하며, 당신이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도 당신을 응시한다는 식의 도덕적이고도 법적인 폴리스라인을 준수해야 한다. 그러나 관용과 차이에 대한 존중이라는 미덕을 권장하는 '착하고 올바른' 자유민주주의를 누군가가 만일 위협하기라도 한다면, 우리 식으로 말해 폴리스라인 바깥으로 한발 짝을 내딛는 종북좌파가 실제로 존재하기라도 한다면, 민주주의의 법과 원칙 나아가 그 어떠한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그놈의 '빨갱이'는 반드시 척결해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지배세력과 냉소주의자들은 광신을 적재적소로 이용하면서도 실제로는 두려워하는 것이다. 광신에는 정말 무엇인가가 있는가?

토스카노는 근대 정치와 철학, 종교와 역사에서 저주받은 주홍글자로 낙인찍혔기 때문에 오히려 지배세력과 냉소주의자가 두렵게 간주하는 광신의 파괴적인 힘을 되살려냄으로써 "점진주의와 타협주의의 영역으로서의 역사를 분명히 거부하는 것과 더불어 예측 가능한 조합들로 구성된 자연화된 영역으로서의 역사에 '실제로' 개입"(37쪽)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 광신을 어떻게 정의내리면 좋을까. 일찌감치 튀빙겐신학교 재학 중에 일어났던 프랑스혁명(1789)에 열광했던 만큼이나 자코뱅의 단두대가 가지고온 '절대적 자유의 공포'(<정신현상학>)에 소름이 돋았던 철학자 헤겔은 광신을 "관념을 향한 열정"(23쪽)으로 정의했다. 이 관념에는 자유와 평등, 정의, 인권, 덕에 대한 즉각적인 요구와 비타협적 관철이 내포되어 있다. 광신은 영어로 'represent'에 내포된 표상, 재현, 매개, 대표의 의미를 거부한다. 동시에 광신은 그에 대한 표상, 재현, 매개, 대표의 흔적들을 통해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광신은 역사이자 비역사이며, 동시대적인 것이자 비동시대적인 것이며, 진보와 발전이라는 근대적이고도 선형적인 시간관념을 추동하는 동시에 그것을 교란하고 어지럽히는 시대착오와 카이로스의 특징을 갖는다.

토스카노가 발굴하고 추적하는 광신은 폭넓고, 광신의 개념과 형상도 다양하다. 토스카노에 의해 '재장전된' 광신은 한낱 광기와 비이성이 아니라 계몽주의적 이성의 중핵에 존재하는 것으로 변하며, 미신과 구분되어 인간 삶의 진보적인 차원을 고양시키는 열정의 동지가 되고, 해방과 평등의 정치를 선도하는 붉은 깃발로 화한다. 또한 어떠한 중재와 협상도 거부하고 노예제의 즉각적 폐지를 주장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던 노예해방론자 존 브라운, 루터에 의해 "사탄"(148쪽) 취급을 받았지만 "공통의 소유"와 "분배"(156쪽)를 주장한 독일 농민전쟁의 지도자 토마스 뮌처 그리고 지금은 세계 시민 정신과 합리성이라는 유럽 문명의 철학적 수호자로 알려져 있으나 이성의 핵심에 도사린 광신이 가진 보편적 해방의 힘을 긍정한 임마누엘 칸트를 광신이라는 깃발 아래 복원한다. 또한 광신은 자유와 평등의 근대정신이 발현했던 유럽이라는 지정학적 영역을 벗어나 유럽의 식민 지배에 맞섰던 식민지 노예들, 반란자들, 민초들의 신음과 환호를 통해 자유와 평등의 해방적 보편성을 전지구적인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강력한 촉매제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근대 최초의 노예 혁명이었던 아이티 혁명은 프랑스 혁명에서 비롯된 자유와 평등을 식민지에서 광신적으로 실현시키려 했던, '프랑스 혁명보다 더 프랑스 혁명' 같았다. <광신>에 따르면 아이티의 노예들과 혁명 지도자인 부크망과 투생 뤼베르튀르는 광신자로 자처하기를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광신'에 내포된 시공간적 독특성 또는 "편재성"(ubique)(163쪽)에 충실하게도 <광신>은 선형적인 역사 서술을 거부하는 한편으로, 광신(fanaticism)에 관련된 혼란스럽고도 지루한 기원의 어원학을 피해간다. 한국어판 부제가 적절하게 알려주는 것처럼 '광신'에 대한 고찰은 '어느 저주받은 개념의 계보학'에 대한 탐구인 것이다. 예를 들면, <광신>의 1장인 '극단의 형상들'은 미국의 남북전쟁과 19세기 말의 식민 지배와 반란의 역사를 다루지만, 한편으로는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광신의 정치철학적 기초를 세공하고 있다. 2장인 '천년왕국의 탄생과 근대 정치의 탄생'은 19~20세기에서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과 독일 농민전쟁이라는 이른바 전(前)자본주의적인 역사적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 천년왕국과 묵시록적 세계관을 검토하고 재평가한다.

그런가 하면 책의 3장인 '이성과 함께 날뛰기'는 다시 16세기도 19세기도 아닌 18세기의 유럽 계몽주의시기를 답사하지만, 이러한 지적인 답사의 목적은 이성의 중핵에 내포된 광신을 발굴해내는 작업이다. 4장인 '동양의 혁명'은 1장과 마찬가지로 유럽이라는 지정학을 벗어나지만 오늘날 광신의 진원지로 표적이 되는 이슬람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인 표상에 내포된 유럽인의 판타지를 분석하고 있다. 5장 '관념들의 충돌'은 다시 19세기의 유럽으로 돌아와 오늘날 "죽은 개"(298쪽) 취급을 받는 마르크스의 종교 비판에 내재한 해방적 사유를 자본주의비판과 연결을 짓는다. 그리고 6장인 '냉전과 메시아'는 냉전에서 현실사회주의 붕괴에 이르는 20세기 중후반의 역사를 배경으로 이른바 '정치종교'로서의 마르크스주의의 애매하고도 독특한 위상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 마르크스주의의 몰락과 몰락 이후의 '메시아주의의 부활'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증상에 논쟁적으로 개입한다.

그렇다고 <광신>이 한낱 '편재성'이라는 구호 아래 광신이라는 모호한 개념만큼이나 비체계적이고 혼란스러운 개념화와 유형화를 무리하게 시도하는 책은 결코 아니다. <광신>은 엄청나게 많은 철학자, 반동사상가, 정치적 자유주의자, 제국의 지배자들이 광신에 대해 행한 비난과 저주가 담겨있는 인용의 빽빽한 숲에 들어서서 그보다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광신의 혁명적 가능성에 대한 긍정의 진술이라는 나무에 하나씩 표시를 해가는 와중에도 성급하게 길을 잃거나 하지 않는다. <광신>의 목적은 책 전반에 걸쳐 매우 뚜렷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만 인용해보면 이렇다.

"광신을 내부의 적이 아닌 합리성의 내밀한 차원으로 취급하는 계몽주의에 충실할 때만 우리는 비판과 해방의 정신으로 이들 문제에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15쪽)

어떤 문제들인가? 예를 들면, 볼테르에서 기원한 것처럼 이른바 문명화된 서구의 세속주의적인 관용과 비문명화된 동양의 종교적인 광신을 대립시켜 '문명의 충돌'을 격화시키는 방식으로 서구제국주의의 강압적 권위를 강화하거나 비슷하게 종교와 종교적 형태의 사상과 실천의 움직임을 광신으로 격하하고 억압하는 무신론적 세속주의를 최고의 지배 형태로 인준하는 문제들이다. 마찬가지로 이에 대한 반동으로 종교적 지배 형태에 대한 급진적 철폐를 주장하는 무신론적 세속주의에 내재한 광신을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종교의 반격도 있을 것이다.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전쟁과 테러의 재앙을 몰고 다니는 이런 문제는 이제 전혀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뿐만 아니라 이성과 합리성,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수호라는 안이한 계몽주의의 서구적 유산에 익숙해져 있으며 반공이라는 냉전질서의 영향력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할뿐더러 종교의 번성과 정치종교 형태의 상이한 지배체제가 다른 어느 때보다도 무시무시하게 현실감 있는 이데올로기로 군림하는 2013년의 남한에 사는 우리에게, <광신>은 인식적 충격을 선사하고 반성적 성찰을 유도하는 통찰을 만나게 해 줄 것이다.

토스카노의 <광신>은 특히 반동과 혁명의 갈림길에 선 시간성에 대한 급진적 이해와 인간본성(이성)에 내재한 광신의 정치적 잠재성과 역량을 묘사하는 데 탁월함을 보인다. <광신>의 한국어판 출간에 맞춰 방한했던 토스카노 자신도 인정했던 것처럼, <광신>에서 가장 논쟁적이면서도 뛰어난 부분은 토마스 뮌처의 농민 전쟁을 분석한 2장과 독일계몽주의의 위대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를 새롭게 독해하는 3장이다.

근년 화제가 된 <경향신문>의 '장도리'라는 네 컷 짜리 만화는, <광신>에서 인용하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비동시대적인 것의 동시성'이라는 개념을 비교적 잘 환기하고 있다. 이런 식이다. 첫 번째 컷에서 검은 선글라스를 낀 박정희와 유신 독재 세력이 1970년대 지프차를 타고 등장한다면, 두 번째 컷에서는 2013년을 통치하고 있는 박정희의 딸이 패션쇼를 하거나 마차를 타고 등장한다. 세 번째 컷에서는 서로 다른 두 시간대가 섞이며, 공간 또한 오버랩이 된다. 2013년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1970년대 농촌에서 들리던 새마을 노래가 확성기로 울려 퍼지는 식이다. 그리고 죽은 자와 산 자가 뒤섞이며, 법전의 사문화된 조항이 살아있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유령과 좀비로 가득 찬 2013년이라는 정치적 시간은 서로 상이한 시간대의 이질적인 종합인 것이다.

▲ 알베르토 토스카노. ⓒwww.versobooks.com
토스카노는 "정치적 현재는 자본주의적 모순이라는 적대적이고 미충족된 '지금'과 그 '지금'의 틈 속에 만연해 있는 미완의 과거들 사이에서 가위 눌려 있다"고 쓰는데(128쪽), 이러한 시간성은 나치처럼 반동으로 결집되거나 미완의 정의의 요구가 해방적으로 모아지는 혁명적 첨점(尖占)으로 수렴될 수 있다. 토스카노는 토마스 뮌처가 이끈 농민 전쟁을 미완의 실패한 전근대적 혁명이거나 조직화되지 못한 반란의 참담한 실패로 묘사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거스르고 토마스 뮌처를 적극적으로 평가했던 에른스트 블로흐를 참조하여 독일 농민전쟁의 아나크로니즘을 급진화한다. "블로흐가 농민반란의 긴장과 잠재성을 표상하는 뮌처에게서 본 것은, 역사적으로 결정된 모순이나 신학적 가상과 정치적 취약함 사이의 비합리적 균열이라기보다는, 이렇게 분리로 여겨지는 극단들 사이의 단락 혹은 이접적 종합이다."(170쪽) 한마디로 자본주의라는 생산양식과 하부구조가 채 성숙하기도 전인 16세기에 성서에 대한 묵시록적인 해석과 명맥이 단속적으로 이어져온 천년왕국운동의 낡은 유산을 완전히 새롭게 전유해 '공통의 소유와 분배'라는 공산주의를 주장한 뮌처의 급진성과 천년왕국의 도래를 열망한 농민들의 대담한 각성에 따른 농민 혁명이야말로 역사와 시간을 거스르는 '공산주의의 불변항'(바디우)이라는 초월성이 지상으로 현현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천년왕국주의에 있어 우발성은 결단이자 급진적 전복으로 강화되어야 하는 것, 즉 카이로스이다."(186쪽) 시간성에 대한 이러한 급진적인 사유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과 결부된 18세기 계몽주의에서 인간본성의 해방적 차원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도 맞닿는다. 여기서 발본적으로 재해석되는 철학자는 물론 임마누엘 칸트다.

광신에 대한 임마누엘 칸트의 판단은 <광신>에서 요약하는 것처럼 좀처럼 종잡을 수 없고 모호할 때도 있지만, 프랑스 혁명에 대한 칸트의 파편화된 언급에서 그리고 칸트의 철학을 "도덕적 광신"(244쪽)으로 비난한 니체에 의해서 오히려 완전히 새롭게 조명된다. 기본적으로 "칸트에게 광신은 인간 합리성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222쪽) 칸트 철학의 핵심 소재인 이성에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곧 신의 존재 유무와 우주의 기원, 사후세계 등을 탐구하려는 독단적인 충동, 즉 "이성을 가지고 미친 듯이 날뛰고자하는 망상"(236쪽)이 내재해있다. 오늘날 칸트는 '이성의 규제적 사용'(규제적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이성의 자기제어와 더불어 인간 진보를 사유하게 하는 필연적인 가상으로서의 세계공화국의 이념을 구상한 철학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 그는 독일관념론의 용어인 '지적 직관'으로 내세를 직접 본다거나 지상에 유토피아를 실현하려는 식의 '이성의 구성적 사용'(구성적 이성)도 모른 척하지는 않았던 철학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토스카노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열광적인 관찰자로만 머물렀던 감이 있는 칸트의 철학적 유산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참조하면서 혁명적인 사건에 "자신이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는"(257쪽) 당파적 정동을 지닌 열정적인 관객이라는 개념을 세공한다. 인간 이성의 능력에 대한 칸트의 신뢰야말로 광신의 해방적인 가능성을 보편타당하게 승인했던 것이다.

광신은 참으로 두려운 개념이다. 정치적 평등과 대의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광신자를 바깥에서 관찰할 때 들 법한 열광 및 감격과 함께 공포와 거리감이라는 것도 분명히 있다. 지금까지 설명해왔던 것에도 불구하고 광신은 아무래도 설득과 참여와 독려보다는 비타협과 아집과 독선에서 비롯된 고립과 분열을 스스로 조장하는 개념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광신은 자신이 해방적 사건과 투쟁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을 초조하고도 숨 가쁘게 기다리는 역량과 더불어 공포와 열광이 혼합된 채 국지적 사건과 투쟁에 당파적으로 이끌리면서 인류라는 보편성과 집단적 자유를 체감할 수 있는 부정적인(negative) 능력이다.

물론 <광신>에서 일관되게 전개하는 광신의 정치에 대한 사유 즉 "관념, 신념, 그리고 당파성의 우위―급진 이론 영역에서의 일련의 메시아주의와 더불어―는 또한 역사가 종언을 고했다는 생각이 초래한 효과로 간주할 수 있다."(407쪽) 도무지 당장은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자본주의의 천년왕국은 마치 TV시리즈물 <워킹데드>에서 좀비들이 부활해 거리를 활보하고 많은 사물들이 폐기물로 멈춰있는 황량한 무시간성을 연상하게 한다. '역사의 종언' 이후에 전개되는 항구적인 시간은 좀비 영화에서처럼 파국이 이미 스며든, 내재화된 시간이다. 광신은 이러한 파국의 내재적이고도 항구적인 상황에 초월성의 빗장을 지르고 급격한 지각 변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동원된 전투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멀리는 발터 벤야민에서 자크 데리다에 이르는 메시아주의와 공명하고 가깝게는 알랭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과 같은 현대철학의 투사들이 호명한 바울이라는 보편주의적인 광신자 그리고 바디우가 <투사를 위한 철학>(서용순 옮김, 오월의봄 펴냄)에서 정치적 급진성을 복원하기 위해 '전사'(militant)로 호명한 존재와 개념적으로 유사한 광신은 "위기의 산물이자, 정치적 나침반은 부서지고 전투성은 유기적 이해와 명쾌한 전망이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의지와 신앙의 문제가 된 상황이 낳은 결과이다."(408쪽) 토스카노는 위대한 선배 마르크스주의자인 안토니오 그람시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광신은 기껏해야 재편하거나 회복할 수 있을 뿐 절대 새로운 정체(政體)를 세우지는 못한다."(409쪽) 지금까지 쌓아올린 광신에 대한 기묘한 아크로바트 건축물 또는 급진적인 브리콜라주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발언처럼 읽히지만, 토스카노의 말은 광신의 내재적 한계를 뼈아프게 인정한 것이라기보다는 광신을 부득불 요청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한계에 대한 윤곽을 명확히 한 것으로 보인다. "광신의 절박과 비타협은 인내와 전략에 결부되어야만 한다."(410쪽)는 보충과 유보조항도 그런 뜻으로 읽힌다.

<광신>을 읽는 지금 이 시간은, 이 책을 훌륭하게 번역한 옮긴이인 문강형준이 '옮긴이 후기'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그 어느 때보다도 보수 반동 세력의 신성동맹이 광신의 도착적인 판본이라고 부를 만한 '종북세력', '빨갱이'라는 괴물 같은 판타지와 대항광신 또는 위계의 광신이라는 정동의 깃발 아래 총결집하고 있는 위태로운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반동 세력에게 맞서려고 하는 야당과 좌파는 이번 통합진보당의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매우 실망스러운 대응에서도 그러했듯이 '신념을 잃은 선한 자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판타지는 판타지의 대상보다 그것을 생산하는 자들에 대해 더욱 많은 것을 말해준다. 광신이라는 개념을 활용한다는 것은 보수 반동 세력이 두려워하기 때문에 판타지를 생산하고 그 주변으로 결집할 수밖에 없는 '약한 고리'를 찾아내고 정밀하게 타격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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