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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점수로 서열 파악하는 20대, 왜 '불쌍한 괴물'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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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점수로 서열 파악하는 20대, 왜 '불쌍한 괴물' 되었나 [편집자, 내 책을 말하다]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그래서 20대가 어떻게 변했는데?

사회가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30년 전의 사회와 지금이 다른 만큼 30년 전의 20대와 지금의 20대가 같을 수 없다. 20대 담론의 효시가 된 <88만원세대> 이후 여러 관련 저작들은 20대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리고 그 환경에서 20대가 얼마나 힘겹게 또는 열심히 살아가는지 설명했다. 그렇지만 그런 환경에서 성장한 20대가 '그래서'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는 누구도 진지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요즘 애들은 어떻더라' 하는 입방아들만 많았을 뿐이다.

▲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오찬호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개마고원 펴냄)는 바로 그런 갈증을 풀어주는 책이다. 책은 오늘날 20대가 어떻게 변해버렸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어떤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지를 직설적으로 설명한다.

편집자로서 책을 만들며 가장 우려했던 점은 이 책이 20대들을 탓하는 내용으로 비춰질 가능성이었다. 20대들이 변해버린 원인이 20대에게 있지 않은데, 그런 20대의 모습에만 주목하다 보면 자칫 피해자 탓하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다. 그랬기 때문에 20대의 그런 모습에 대한 감정적 비난은 최대한 자제하고, 그들을 그렇게 몰아가는 구조적 원인에 포커스를 맞추려 노력했다. 20대가 문제적 존재가 됐더라도 그 원인은 20대 자체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면서도 20대 일상의 눈살 찌푸려지는 현실은 충실히 보여주려 했다. 거기에 얼마큼 성공했는지는 독자만이 알리라.

망가져버린 20대? 20대가 괴물이다?

제목과 표지에서도 느껴지겠지만 저자는 기본적으로 20대들의 변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약간은 과장된 표현이지만, 20대를 '괴물'이라고 부를 정도다. 어떤 이유에서일까?

먼저 공감의 불능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감수성이 현저히 떨어졌다는 것이다. '모든 게 다 자기 할 탓'이라는 각자도생의 현실에서 남의 어려움을 이해해주는 것이 어색한 일이 되어버렸다. 저자는 강의식에서 부딪히는 학생들의 이런 반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고시원이란 거주지를 언급하며 '주거공간의 취약성'을 논하면 "처음부터 고시원에 안 살았으면 되잖아요"라고 답하고, 월세로 전전하는 세입자들의 고충을 이야기하면 "그럼, 전세로 살면 되잖아요"라고 말하는 식이다. (90쪽)

사회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사회 분위기와 어느 누구에게나 고통을 참고 이겨낼 것을 주문하는 자기계발의 논리가 공감 불능의 20대를 만들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또한 공감의 불능은 세상을 바라보는 20대들의 눈을 좁고 획일화되게 만드는 데도 영향을 줬다. 예컨대 취업에 누군가 실패했을 때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능력은 있지만 그에 맞는 직업을 아직 못 찾았을 수도 있고, 학력차별 등의 난관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다양한 사정을 헤아리기보다는 취업을 못한 이에게 '능력 없음'이라는 딱지를 붙여버린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저자가 세밀히 묘사한 20대 대학생들의 학력위계주의에서 이런 모습이 잘 나타난다. 대학생들에게는 수능점수가 타인을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으로 작용한다. 수능점수가 낮아서 자신이 다닌 학교보다 낮은 등급이 학교에 간 사람은 자신의 '아래'에 있는 존재로 취급한다. 깔보고 무시하는 것도 일상다반사다. 한낱 교육 과정에서의 학업 성취도를 평가하는 시험인 수능으로 한 사람 전반을 평가해버리는 것이다.

20대 대학생들에게 어떤 객관적 증거가 있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증거가 있든 없든 서열이 낮은 학교 다니는 학생들은 자신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자신이 소속된 대학보다 서열이 낮은 대학의 학생들을 낮게 평가하려 한다. 아니 그렇게 평가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거의 조건반사적이다. 동시에, 서열이 낮은 대학 학생들을 보면 무조건 깔보고 드는 그만큼 자신의 대학서열보다 높은 대학을 바라볼 때는 자연스레 열등감을 느낀다.(139~140쪽)

불안하기에 공격적인 20대, 약자 멸시의 이유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20대들의 공격성이다. 사실 자신이 절박할수록 타인에 대한 관심을 줄어들 수밖에 없다. 내가 죽게 생겼는데 남의 사정을 봐줄 이유가 어디 있는가. 힘든 처지에 있는 20대가 다른 이의 처지에 관심 없는 건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관심 없는 걸 넘어서 배척하고 공격적으로 대한다는 점이다.

책의 첫머리에 소개된 KTX 비정규직 여승무원의 정규직 전환 요구를 놓고 벌인 학생들과의 토론 사례는 그런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학생들은 그들의 요구에 그냥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단호하게 반대한다.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떤 집단의 요구가 과하다고 판단했을 때(시간강사 처우 개선, 용산 철거민들의 요구,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복직 등) 많은 20대들이 상당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저자는 이런 태도가 취업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만 하는 박탈감과 불안감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자신은 놀고 싶은 것 참고, 하고 싶은 일도 포기하면서 노력하고 있는데, 다른 누군가가 단지 '떼써서'(20대들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원하는 걸 얻는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이 분노는 자연히 자신이 생각하기에 '노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향한다. 끝없이 희생하면서도 낙오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20대는 이 "인생을 날로 먹으려는 게으름뱅이나 루저들"을 비난하고 공격하면서, 내면의 공허와 불안을 달래려 한다. 안타깝게도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공격은 사회적 사다리의 아래에 있는 약자들에게 가해진다.

빠져나올 수 없는 고리에 갇힌 시시포스 세대들

책을 만들어나가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문구는 '불쌍한 괴물'이라는 것이었다. 저자 말대로 이들의 심성은 황폐해지고 거칠어졌다. 공감 능력을 상실한 채 약자를 밟으려는 태도는 실로 괴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들은 '불쌍한'(이런 동정적 어휘를 써서 미안하지만) 존재다. 누구도 그런 괴물이 되고 싶어 한 사람은 없었다. 취업난과 자기계발의 질곡에 갇히면서, 서로를 밀어내게끔 만드는 사회의 구조 때문에 그렇게 변해버린 것이다. 그들 자신에게도 지금 정말 잘 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그저 그런 식으로밖에 살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마녀의 저주에 걸린 괴물처럼.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약자를 멸시하는 이들은 그 멸시받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더욱 열심히 자신을 갈고 닦고 조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상위 몇 퍼센트만 구제받는 현실에서 이들의 박탈감과 불안감이 그런다고 해소될 리는 없다. 결실 없는 노력과 희생의 강도만 더 세질 뿐이며, 그런 만큼 '노력이 부족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공격도 강해진다.

20대는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끝없이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 형벌을 받았다. 더욱 끔찍한 것은 어차피 올릴 수 없는 바위를 밀면서 밑에 있는 사람을 깔아뭉개며 만족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이 암담한 현실에 누가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현실을 놓고도 어찌 20대가 희망이고, 미래고, 꿈 많은 청춘이고 하는 한가한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저자 오찬호는 독자들에게 끔찍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20대를 보여주면서, 이제 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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