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한 말이다. 2009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 30주기 추도식 자리였다. "경제 성장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진정 아버지가 원하시던 일이었다"고도 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운다)를 내세웠던 박 대통령이다. '줄푸세'는 재벌과 부유층이 선호하는 노선이다. 그랬던 그가 복지 국가 담론을 꺼내든 건 적잖은 이들에게 인상적인 모습으로 다가갔다. '아버지의 꿈'이라는 말의 무게도 남달랐다. 정치에 발을 들일 때부터 아버지의 후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기에 더욱 그랬다.
'아버지의 꿈'을 역설한 정치인 박근혜는 2012년 대선에서 경제 민주화와 함께 복지 국가를 강조했다. 경제 민주화와 복지 국가는 대선의 핵심 화두이자, 야권이 우세한 영역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박근혜 후보는 이를 품으면서 자신이 그 과제들을 더 잘 실행할 수 있는 인물임을 내세웠다. 이 전략은 박근혜 후보가 승리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아버지의 꿈' 역설한 박근혜의 대선 승리, 그 후 1년
그로부터 1년. 박 대통령은 '아버지의 꿈'을 향해 순항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복지 공약은 대폭 후퇴했다. 기초연금 문제를 비롯해 곳곳에서 뒷걸음질했다. 박 대통령은 "죄송한 마음"이라면서도 "현실에서 불가피했다"고 주장했지만, 당선 전부터 기획된 공약 사기라는 의혹이 짙다.
복지 예산을 올해보다 늘려 편성하긴 했다. 그러나 억울하다고 목소리를 높일 처지가 아니다. 그보다는, 복지 예산 증가분의 상당 부분은 의무 지출 증가에 따른 것이며 공약 이행 시 예상되는 증가분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는 쓴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다.
경제 민주화 과제가 지지부진한 것도 문제다. 경제 민주화는 복지 국가와 무관한 게 아니다. 이 둘은 힘없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묶음이다. 그런 경제 민주화가 사실상 실종됐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박 대통령이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며 '반듯한 시간제 일자리'를 늘릴 뜻을 밝힌 것도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최고의 복지와는 거리가 한참 먼, 질 낮은 일자리를 양산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뼈 빠지게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일자리는 복지 국가의 꿈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에 더해 복지 국가의 꿈에 역행하는 일이 최근 또 벌어졌다. 의료 법인이 자회사를 세워 영리 사업을 할 수 있게 하는 등의 방침을 정했다. 투자 활성화라는 듣기 좋은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는 의료 사유화(민영화)이자 영리 병원을 허용하는 우회로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병원들이 의료 공공성 대신 돈벌이 위주의 경영을 전면화할 길을 열어줄 우려가 매우 높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건강보험 체계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건 괜한 걱정이 아니다. 의료보험(지금의 건강보험) 제도를 국가 차원에서 도입한 것이 박정희 정권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아버지의 꿈'을 강조한 박근혜 대통령의 치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도 역설적이다.
의료만이 아니다. 철도에서도 사유화 논란이 한창이다. 정부는 손사래를 치고 있지만, 자회사 설립을 통한 수서발 KTX 분리는 사유화와 떼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이외에도 가스 역시 사유화 우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공공성을 위협하는 사유화 물결은 서민들의 목줄을 죄기 마련이다. 복지 예산을 적당히 늘리는 정도로는 사유화의 독을 치유할 수 없다. 복지 국가를 말하면서 사유화 흐름을 가속화하는 건 모순이다. 달리 말하면, "복지 국가 건설"이라는 '아버지의 꿈'을 짓밟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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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푸세'로 MB를 따를 것인가, '아버지의 꿈'으로 나아갈 것인가
이는 '줄푸세'와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줄푸세'는 복지 국가와는 멀고 이명박 정부의 '비즈니스 프렌들리'와는 아주 가까운 노선이다. MB 정부 기조와 판박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 점에서 박 대통령의 최근 모습은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당시 박 대통령은 '줄푸세'와 경제 민주화가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강변했다. 측근들 사이에서도 박 대통령이 "'줄푸세' 기조를 폐기한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나왔다(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 원장).
이처럼 박 대통령은 경제 민주화와 복지 국가를 말하면서도 '줄푸세'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았다. 이는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5.16쿠데타와 유신 등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의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 것만도 못하다. 물론 자발적인 인정은 아니었다. 인혁당 사건에 대해 "두 개의 판결이 있다"고 했다가 거센 반발에 직면해, 한 걸음 물러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보인 모습이었다. 박근혜 정부 출범 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역사 문제 관련 퇴행은 당시 행동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경제 민주화와 복지 국가를 강조했던 것도 진정성이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대선 후 1년간 보인 모습은 경제 민주화와 복지 국가를 강조했던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줄푸세'라는 진짜 얼굴에 경제 민주화와 복지 국가라는 가면을 썼던 것 아니냐는 세간의 의혹을 박 대통령 스스로 키운 시간이기도 했다. 자기 부정이든 아니면 처음부터 가면이었든, 분명한 건 둘 다 '아버지의 꿈'과는 반대 방향이라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아버지와는 다른 패러다임을 마련해야 한다. 자본주의 황금기라는 시대의 흐름과 냉전으로 인한 지정학적 이점 덕분에 고도성장에 유리한 조건을 갖췄던 박정희 정권을 답습하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라는 말이다. '전편만도 못한 속편'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싶지 않다면, 경제 민주화와 복지 국가에 대한 약속이 가면이 아니었음을 입증해야 한다.
'줄푸세'를 고집하며 MB를 뒤따를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꿈'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박 대통령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박 대통령이 염두에 둔 '아버지의 꿈'은 복지 국가 하나만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처럼 교원노조에 칼을 들이대는 등의 공안 통치에서 잘 드러나듯이 '박정희 식 반듯한 나라'도 꿈꾸는 것 같다. 그러나 그건 꿈이라기보다는 악몽이라고 부르는 게 적절하다. 악몽도 꿈이라는 강변을 참고 들어주기엔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인 망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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