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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차마 못한 그 일 감행한 미국…한국 '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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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차마 못한 그 일 감행한 미국…한국 '폭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9> 해방과 분단, 네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해방과 분단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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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해방 직후 많은 이가 공감한 역사적 과제는 무엇인가.

서중석 : 이 부분, 굉장히 중요하다. 단적으로 토지 개혁과 친일파 처단, 이 두 가지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조선일보> 사설을 통해서도 그걸 확인할 수 있다. (1945년) 11월 23일 (중경) 임시정부 1진이 들어오고 2진이 12월 2일에 들어오는데, 2진이 들어온 직후인 12월 5일에 '임시정부에 제언함'이란 <조선일보> 사설이 게재된다. 거기 이런 주장이 나온다.

"첫째, 이상 양대(임시정부와 인민공화국) 세력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합작하여 민족 통일 전선을 완성할 것. 둘째, (…) 민중의 총의에 의한 민주 정부여야 할 것." 이걸 가장 앞에 내세우고 있다. 당시 누구나 이야기하는 합리적인 주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어서 이런 얘기를 한다. "조선에는 아직 사회적·경제적 기반이 봉건 제도를 못 벗어났으니", 앞에서 이야기한 '봉건적 관계로부터 해방된다', 그거랑 똑같은 이야기다. "이를 현실적으로 타파할 것. (…) 이를 타파하자면 토지 문제가 무엇보다 선결되어야 한다." 이렇게 얘기한다. 토지 개혁을 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다음에 "넷째는 현재 민족 통일 전선의 암이 되어 있는 친일파, 민족 반역자 문제이다. 이런 도배를 신성한 우리의 건국에서 배제함으로써 후환을 단절하는 데 어느 누가 찬동치 않을 것인가." <조선일보>가 이렇게 딱 얘기를 했다.

프레시안 : 요즘의 <조선일보>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해방 직후 토지 개혁 열망이 그토록 높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우리나라에는 참 오랫동안 소작제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주(地主)전호(田戶, 지주에게 땅을 빌려 경작하는 사람)제라고 불린 조선 후기의 소작제보다 일제 때 식민지 지주제가 훨씬 가혹했다. 아주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했나.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서중석 :
조선에선 관습적으로 소작인한테 한 번 소작지를 주면 계속 (농사를) 짓게 했다. 그런데 1910년 일제가 강점한 후 취한 첫 번째 조치 중 하나가 '지주가 소작하는 사람을 매년 바꿀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농민의 경작권을 인정하지 않고) 지주의 권한을 강대하게 해버린 거다. 일제가 한국의 경제를 원천 장악하고, 일본인이 한국인의 토지를 쉽게 장악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일보>, <동아일보> 사설 같은 걸 읽어보면 일제 때 소작료가 7할에서 9할까지 간다고 돼 있다. 진도의 소작 쟁의 같은 걸 설명하면서 '9할까지 되니 농민들은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 이렇게 쓰고 있다. 도대체 9할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살펴봤더니만, 여러 가지 빚까지 포함해 그렇게 쓴 것 같더라. 예컨대 (돈 문제 등 때문에 화학) 비료를 안 쓰려 하는 농민에게 지주가 그걸 외상으로 쓰게 해 발생한 비용 같은 것까지 다 들어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렇지 않고서는 9할이 될 수가 없지 않나.

프레시안 : 식민지 근대화론이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는 일제 강점기의 실상이다.

서중석 : 그렇다. 조선 후기엔 (지주와 농민이 소출을) 반반 나눠먹는 병작반수(竝作半收)제였는데, 일제 때는 그게 아니었다. 소출량의 60퍼센트 내지 70퍼센트가 지주 몫이었다. 대부분 그랬다. 그것도 (농민이) 지주한테 갖다 바쳐야 했다. 운임 등도 소작인한테 물게 했다. 일제 때는 수리세(水利稅)가 큰 부담이었는데, 그런 수리세에다 심지어 지세까지 농민에게 부담시켰다. 지주의 권한이 워낙 강대하니 이런 일이 생긴 거다.

아, 농민들은 소작지를 떼이면 죽은 목숨 아니었나.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만주로 가야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지독한 일제의 식민지 지주제를 맛봤기 때문에도 '해방이란 이런 것에서 벗어나는 거다', 이게 (사람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프레시안 : 토지 개혁은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었다.

서중석 : 한민당도 토지 개혁에 직접 반대한 적은 없다. 다만 어떤 식으로 하느냐를 가지고 실질적인 반대를 한 것이다. (이와 달리) 한민당의 김병로 같은 사람은 이미 1945년에 '소작료와 소작제, 이거 완전히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뿐만 아니라 (토지를) 무상 몰수, 무상 분배해야 한다고도 이야기한다. 아, 한민당 중진이 이렇게까지 발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식민지 지주제 폐해가 컸다. 거기에 한국인의 정의감까지 가세해서 '토지 개혁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생각했던 거다.

<조선>도 공감한 역사적 과제, 토지 개혁과 친일파 처단

프레시안 : 앞에서 다루긴 했지만, 친일파 문제도 간단히 다시 짚었으면 한다.

서중석 : 정말 원성의 대상이었다. (해방 직후 친일) 경찰이 80퍼센트 넘게 (출근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았나. 그런데 미군정이 친일 경찰들을 복귀시켰다. 친일 관공리를 몇 단계씩 승진시켰다. 일본인이 자리를 비우니까 (그 자리에 친일파를 앉힌 거다). 현상 유지 정책인데, 미군정이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거다. (이러니) 해방되고 불과 얼마 안 가서 '해방이 해방이 아닌 것 같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친일파가 준동할 수 있는 기회가 또 다른 방식으로 찾아왔다.

프레시안 : 어떤 방식이었나.

서중석 : 하지 사령관이 한국에 와보니, 좌익이 너무 센 거다. 그러니까 (하지는) 좌익을 누르기 위해 (1945년 9월 17일) '정치 단체와 정례 회견을 하겠다'고 이야기해버렸다. 이게 바로 하지의 '정당은 오라'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니, 정당 대표들하고 만나겠다는 거다. 그 당시는 정당을 만드는 데 구체적인 기준 같은 게 없고 두세 명이 모여 뚝딱뚝딱 만들 수 있던 때인데, 그런 정당을 만들면 그 대표가 하지를 만날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이때 한 달 안에 40∼50개의 정당(과 유사 단체)이 생겼다고 한다. '여기에는 야심가, 불순분자 등이 대종을 이뤘다'고 돼 있는데 야심가, 불순분자가 뭘 가리키는 것이겠나. 친일파를 그렇게 부른 거다. (미군이 들어오기 전 자율적으로 조직된 단체들에 좌익이 많자, 급조된 정당을 양산하게 해 좌익 성향 조직의 대표성을 떨어뜨리고 무력화를 기도한 것이다. <편집자>) 그런데 이 문제는 이승만이 (1945년) 10월 16일 귀국하면서 더 불거졌다.

프레시안 : 어떤 식으로 불거졌나.

서중석 : 이 양반은 미군정의 강력한 지지와 성원을 받으면서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과 만나겠다.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하겠다', 이렇게 나왔다. 어떻게 줄을 설 것인가가 당시 친일파, 모리배의 최대 관심사였다. 그런데 미군정의 가장 강력한 지지를 받는 것처럼 보이는 이승만이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을 만나겠다'고 하니 또 (정당과 유사 단체가) 뚝딱뚝딱 만들어졌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조직을 해나간다고 하자 (뚝딱뚝딱 만들어진) 정당(과 유사 단체)이 100개 정도로 늘었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하여튼 이러면서 친일파가 준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10~11월이 되면, 해방 후 두세 달밖에 안 됐는데 사회가 굉장히 암울해진다. 해방의 감격이 점점 약화되고 역사적 의미가 퇴색하는 거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해방이 해방이 아닌 것 같다"…화약통이 된 남한

프레시안 : 그렇게 민중의 불만이 쌓여 1945년 말 "불만 댕기면 금방 폭발할 것 같은 화약통" 같은 상황이 된다.

서중석 : ("화약통"은) 미국인 고위 관리(미군정 고문 베닝호프. <편집자>)가 국무성에 보고한 내용이다. 한국은 정말 불만 댕기면 폭발할 것 같은 화약통이었다. 이게 반탁 투쟁 때 폭발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꿈같이 해방을 맞았다. (많은 한국인은) 해방이 되면 바로 독립이 이뤄지는 줄 알았다. 상당히 천진난만하다고 할까. 그런데 독립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걱정이 되는데, 더 암울하게 한 건 친일 경찰이 날뛰면서 사람들을 억압하고 못살게 구는 것이었다. 일제 때 관료를 한 친일파가 (오히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고 사람들을 막 하시(下視)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세상이 어떻게 돼가는 건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들게 하는 상황이었다. '독립은 안 되는데 친일파는 날뛴다', 참 걱정스럽지 않았겠나.

프레시안 : 경제도 좋지 않았다.

서중석 : 그렇다. 경제 상황이 아주 나빠지기 시작했다. 제일 큰 요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일제와 관련돼 있다. 일제 때는 놀라울 정도로 인플레라는 게 없었다. 그 점은 좋았다. 그런데 일제 말에 조선총독부에서, (정확히 말하면) 조선은행에서 화폐를 엄청나게 찍어냈다. 전시 말에 필요한 수많은 금융 수요를 그걸로 충당하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인플레가 막 일어났는데, 해방되고 나서도 일제가 또 막 찍어냈다. 미군이 들어올 때까지 일제가 그런 건 장악하고 있었다. 자기들이 쉽게, 편안하게 귀국하려고 그런 것 같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재산을 챙겨서 도망갈 때 유리하다고 본 것 같다. (그 때문에) 엄청난 인플레가 생겼다.

프레시안 :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

서중석 : 한국은 일제 말에 지독한 통제 경제였는데, 미군정이 그런 한국 실정을 잘 모르고 미국식으로 자유 경제를 실시해 버렸다. (해방 직후) 처음엔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고 공장에 있는 물건 같은 걸 팔아먹어서 (일부에선 한국인들이) 싸게 사기도 했는데, (미군정의 조치 후) 물건이 귀하게 됐을 뿐만 아니라 모리꾼이 날뛰기 시작했다. '생필품을 쟁이기만 하면 일제 말보다 훨씬 큰돈을 번다', 이런 분위기가 돼 버렸다. 그래서 모리꾼이 당시 욕을 참 많이 먹었다.

특히 쌀 문제가 심각했다. 일제 때 우리가 쌀을 얼마나 못 먹었나. 해방된 해 흉년이던 북한과 달리 남한엔 풍년이 들었는데, 12월 말이 되면 (시중에) 쌀이 잘 보이지 않게 됐다. (그해 10월 미군정이 식량 통제 제도를 폐지하자) 모리꾼이 쌀을 쟁여둔 거다.

그러자 미군정은 한국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을 실시하게 된다. 일제 말에 쌀을 공출하면서 (말 그대로) 박박 긁어가지 않았나. (그 때문에 한국인들이) 얼마나 심하게 굶주렸나. 그런데 미군정이 이름을 바꿔서 미곡 수집령을 내렸다. 그러니 누가 거기에 응하려 하겠나. 더군다나 (1946년) 7~8월이 되니까 하곡(夏穀, 보리와 밀처럼 여름에 거두는 곡식) 수집령까지 내렸다. 일제 때도 하곡 수집령은 없었다. (양식이 거의 바닥이 나는) 보릿고개를 (가난한 농민들이) 보리로 넘긴다는 걸 일제도 알았기 때문에 거기까지는 공출을 안 한 거다. (그런데) 미국은 워낙 다급하니까 그것마저 공출하라고 한 것이다. 이게 (1946년) 9월총파업과 10월항쟁이 일어난 주요 원인 중 하나다. (9월총파업과 관련해서는 <해방 공간의 '전태일'들, 망각의 늪에서 구하라> 참조)

프레시안 : 9월총파업과 10월항쟁에 대해 일각에선 여전히 '좌익의 이념 투쟁'이라는 식으로만 간주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서중석 : 그토록 심했던 경제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9월총파업 초기엔 (좌익인 전평뿐만 아니라 우익인) 대한노총(에 속한 노동자)까지 가담했다. 노동자들이 도무지 생활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1946년 물가는 1944년에 비해 92배로 오른 데 비해, 1945년 5월과 1946년 5월의 임금을 비교하면 물가 상승분의 13분의 1밖에 오르지 않았다. 여기에다 쌀 자체를 구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면서, 9월총파업 전 서울은 물론 전국 곳곳에서 '쌀을 달라'는 시민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미군정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쌀 파동이었다. <편집자>) 10월항쟁의 경우 쌀 품귀를 포함한 생활고가 큰 이유였는데, 이에 더해 친일파, 그중에서도 친일 경찰에 대한 강한 적대감이 작용한 것도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해방이 됐는데 독립은 안 되는 데서 비롯된 암울함이 겹치면서 일어난 것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스무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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