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는 곳"?!
1983년 한 가수가 부른 건전가요 '아! 대한민국'이라는 노래의 노랫말을 들여다보면 대한민국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는 기회가 보장되어 있고 계층 이동이 열려있다는 사회라고 선언한다. 흡사 미국을 향해 이민 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아메리카 드림'을 패러디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노래는 1970년대 '새마을 노래', '나의 조국'에 이어 제5공화국 시절 우리들을 집단 최면으로 이끌었다.내가 사는 이유, 다음 세대에게 갖고 있는 것을 물려주는 것이지!
인터넷 검색 엔진에 '세습' 또는 '대물림'이라는 단어를 넣어보면 한국 사회가 북쪽 권력의 3대 세습에 대해 강력한 어조로 비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사회 속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세습 또는 대물림에 대해서는 일부러 눈을 감거나 관대하다. 심지어 자식의 성공을 위해서 하는 일은 '핏줄'을 통한 전수라고 온갖 매스미디어를 통해 주장하며, 자식의 경쟁자들에게 이것을 자연스럽게 수용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대물림에 대해 우리 사회는 각기 다른 말로 표현한다. 전통 사회에서 세습이라는 말 자체는, '왕권 세습'에서 보듯이 정치적, 법률적 용어에 한정하여 사용되었다. 재산 세습은 특별히 '상속'이라는 말로 표현했고, 학문이나 기예의 세습은 '사사'라는 용어가 널리 쓰였다. 세습은 혈연, 지연, 학연 각각에 의해 이루어지거나 또는 그 같은 방식들이 결합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것은 역시 핏줄에 의한 세습, 대물림이다. 우리말에서 '대물림', '세습', '상속', '전수', '사사', '물려주다'의 용례를 살펴보다보면 '~을 에게', 혹은 '~에(에게) ~을'이라고 나온다. 우리는 누구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는가? 그것이 삶의 목적 또는 삶의 전부라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아네트 라루는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이론을 바탕으로 미국 사회를, 특히 교육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사회적 계층 및 불평등의 대물림 문제를 들여다본다. 부르디외는 사회 구조를 이끄는 지배 및 불평등의 패턴에 주목한다. 또한 개인이 자신과 자녀들의 사회적 위치를 유지 혹은 향상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어떤 사회에서나 이러한 특권의 세습은 "제대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은 그 사회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이 누리는 사회적 지위나 특권은 자신의 지능이나 재능 또는 노력 같은 역량을 통해 자신 스스로 획득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부르디외는 여기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과연 개인의 사회적 위치는 자신의 노력이나 재능의 결과물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아네트 라루의 <불평등한 어린 시절>이다.
사람은 말을 사용하는 동물이다!
사람은 말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 말을 통해 사회관계를 유지하고 생활에 필요를 요구하고 공급받기도 한다. 아네트 라루는 자녀들이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고 사회생활을 하게 하는 매개체로서 언어에 주목한다. 자녀와의 언어생활을 보면 계층별로 차이가 나는 것을 기술하고 있는데, 가령 중산층은 자녀들에게 다양한 언어적 기술을 습득할 기회를 가정에서 제공한다. 그래서 이들이 사회적 관계를 맺어나갈 준비를 갖출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상황을 조정하여, 원하는 것을 최대한 얻어내는 도구로 사용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소하거나 협상하는 법을 숙지해나간다. 이에 비해 노동자 및 빈곤층의 언어생활은 짧은 문장과 쉬운 단어를 사용하기에 제한적이다. 그리고 대화를 통해 의견을 타협하는 일도 거의 없다. 이들 가족의 삶에서 언어란 논리적 대화 기술이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학습 수단이 아니라 실용적인 의사 전달 수단의 역할만 하고 있다. 중산층의 언어생활과 노동자 및 빈곤 계층의 언어생활의 간극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이 간극을 채우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의 계층, 계급 갈등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불평등한 어린 시절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시작된다!?
한국 사회는 상생, 공존이라는 단어보다는 '경쟁'이라는 말이 익숙하고 그것이 현실을 지배한다. 우리 사회는 이미 사회 계층 사이의 이동이 상당히 얼어붙은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앞 세대(70세 이상)가 아직도 믿고 있는 '개천에서 용 나기'가 단지 드문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보니 우리 사회는 부모 잘 만나는 것도 '실력'이라고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그 실력은 어떻게 배양되는가? 이런 물음에 한국 사회는 '교육'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그래서 오늘도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앞에 그리고 학원 앞에 차량의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다.
다른 나라보다 한국 사회는 '교육'에 몰입한다.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상관없이 자신의 수입 대부분을 여기에 쏟아 붓는다. 자녀들이 자신들의 '스펙을 쌓는다'고 하면 부모들은 자녀가 '사회적 이동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기를 희망하며 경제력을 집중한다. 하지만 이것도 부모 자신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의 불평등으로 인해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회적 계층이 노동자, 빈곤층일 경우 누구라도 '불평등한 어린 시절'을 겪을 수밖에 없고 이것은 대물림의 현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한 개인의 출신 가족이 처해 있는 사회적 위치는 그 개인이 인생에서 겪게 될 일이나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 구조가 만들어 내는 불평등은 보이지도 않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어쩌면 사회 계층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이를 재조명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 전체에 득이 되는 방향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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