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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의 판결, 우리를 '노예'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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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의 판결, 우리를 '노예'로 만들었다! [프레시안 books] 프레드 로델의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

1.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이하 '저주받으리라', 프레드 로델 지음, 이승훈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는 반항아가 쓴 반항적인 책이다. 최고의 환경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본인이 속해 있는 체제의 가치를 본질적으로 의심하고 있는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체제의 일원으로 남아 있는 그런 사람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저주받으리라>가 반항아의 반항적인 책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쉽다. 저자 프레드 로델이 쓴 초판 서문을 보면 명시적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로스쿨에서 나는 행운아였다. 예일대학교 로스쿨 교수 가운데 열 명은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법 분야에 대해 충분한 회의심과 분별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 덕분에 법이라고 하는 사기술에 대한 나의 의구심은 더욱 강화되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이 책을 낳은 지적인 대부godfather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들의 대자godson와 의절하기를 원하겠지만, 나는 그들의 이름을 현직과 함께 여기에 알파벳순으로 적어 둔다. (17쪽, <저주받으리라>)

▲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프레드 로델 지음, 이승훈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초판 출간 후 17년이 지나, 원문의 내용에 대해 반성도 후회도 수정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며, 중년이 된 반항아 프레드 로델(1907~1980)은 이렇게 말한다.

"첫판의 서문도 수정하지 않았다. 다만 거기에 나열된 이 책의 대부godfather들 중 두세 명이 이 책은 물론 나와도 의절했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였다."(14쪽, 같은 책)

굳이 이 서평에서 나열하지는 않은 그 열 명의 은사들은 하나같이 으리으리한 직함을 달고 있다. 법무 차관보, 연방 대법관, 로스쿨 학장, 교수, 기타등등. 프레드 로델은 그들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자신이 배우는 법이라는 것이 한낱 고등사기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어, <저주받으리라>를 썼다. 그의 나이 32세, 26세의 나이로 예일대학교 로스쿨의 교수가 된 지 6년만의 일이었다.

2.

앞서 굳이 '반항아'라는 수식어를 저자 프레드 로델 및 그의 책 <저주받으리라>에 붙인 이유를, 이제 독자 여러분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법학자로서 훈련받고 미국에서 가장 좋은 로스쿨 중 하나인 예일에서 교직 생활을 하면서, 그는 로스쿨을 넘어 미국의 법조계 전체를 조롱한다.

책 자체의 내용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약관의 나이로 예일대학교 로스쿨의 교수가 된 그는, 신랄한 어조로 법의 속성에 대해 정확한 논평을 제시한다. 법은 고답적이고, 과거의 선례에 집착하며, 변화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멸종위기의 생물이지만, 바로 그렇기에 그것으로 밥을 벌어 먹고 사는 이들은 마치 과거의 주술사처럼 알아듣기 힘든 단어를 중얼거리며 스스로를 포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학, 수학, 사회학, 심리학과 같은 대다수 학문의 목적은 앞을 내다보고 새로운 진리, 기능, 유용성에 다가서는 데 있다. 오직 법만이, 자신의 오랜 원칙과 선례precedents에 끊임없이 집착하며, 구태의연을 덕으로, 혁신을 부덕으로 삼는다. 오직 법만이 시대에 뒤떨어진 방식을 고쳐 변화하는 세계의 필요에 부응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저항하고 분개한다. (44쪽, 같은 책)

한국의 법학 교육 과정에서는 언제나 법의 3대 이념으로 '정의', '합목적성', 그리고 '법적 안정성'을 가르친다. 법은 정의를 위한 도구여야 하고, 무질서한 임의적 규칙의 묶음이 아니어야 하며, 사회의 안정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놓고 보면 로델의 저 말은 단순한 비판이나 비아냥이 아니라, 오히려 법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서술일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법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존재한다기보다는, 세상이 기존의 방식 그대로 잘 굴러갈 수 있게 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법은, 성문법 국가인 한국과 보통법 체계를 가지고 있는 미국의 경우가 다르겠지만, 아무튼 추상적인 원칙을 현실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문제는 특히 보통법 국가인 미국의 경우, 어떤 사안에 무슨 법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며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상위의 원칙이 따로 없다는 데 있다. 적어도 로델은 그렇다고 비판한다.

법이 엄밀한 과학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엄밀한 과학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법이 추상적인 원칙에 근거해 특정 사안을 해결하는 한 말이다. 악마가 언제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성서를 인용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안에서 양쪽 변호사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항상 법을 인용할 수 있다. (181쪽, 같은 책. 강조는 원문)

결국 법은 변호사들 스스로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달달 외워놓은 원칙들을, 현실 속의 구체적 사안에 아무렇게나 적용하면서, 기득권을 옹호하고 사수하기 위한 도구일 것이다. 로델의 비판에 따르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급진적 대안을 제시한다. 이것은 사법'개혁'이 아니라, 사법'폐지'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답은 하나다. 그 답은 법률가를 제거하고 대문자의 L로부터 시작되는 법을 우리의 법체계로부터 내던져 버리는 것이다. 요술쟁이와 그들의 요술을 함께 폐기 처분하고 우리의 문명을 보통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래서 정의와 공평함에 봉사할 수 있는, 실제적이고 알기 쉬운 규범에 따라 운영해 나가는 것이다.(255쪽, 같은 책)

3.

여기서 잠시 서평자 본인의 취향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다. 언필칭 '젊은 진보 논객'으로 불리며 여기저기 지면에 원고를 써왔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반항아'적인 논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미 가질 걸 다 가진(26세의 예일대 법대 교수!) 배부른 도련님 아가씨들이, 본인도 뾰족한 해법 따위 안 가지고 있는 주제에, '이 세상은 다 썩었어 퉤퉤퉤' 하는 장단에 맞춰 놀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법이 사회의 변화에 따르는 대신 '법적 안정성'을 추구할 뿐이라고, 의학이나 수학, 심리학, 사회학처럼 구체적인 대상을 지니는 학문과 달리 하세월이 지나도 발전하지 않는다는 로델의 비판도 따지고 보면 그렇다. 수백 년 전의 법이 지금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은, 그 법이 적용되는 영역에서 사람들이 사는 모양이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살해한 자는 처벌받는다'는 법은 십계명에도 쓰여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은 사람을 죽이고, 그 경우 공동체는 처벌을 해야 하며, 처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법은 갈등 해결의 도구이며, 그 연극 무대의 소품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지만, 삶의 무대에서 인간이 갈등하는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법학의 용어가 쓸데없이 어렵고 공허하다는 로델의 주장에는 지금의 한국 법조계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옛날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법조계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특유의 '법률가들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한 방언 체계는 법체계에 대한 국민들의 접근성을 심각하게 저해할 뿐 아니라, 법조계 내부의 업무 효율도 때로 떨어뜨린다. 물론 전문적인 용어의 사용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는 편이 낫다.

문제는 모든 법률 용어가 쉬워질 수는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데 있다. 로델 자신이 드는 예시를 비판해보자.

"일급 살인은 사형에 처한다"는 아무 의미가 없는 볍률이다. 왜냐하면 '일급 살인'은 그것을 정의하는 추상적 법 원리와 관련되지 않고는 실제로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법원(법관이나 배심원 혹은 다른 종류의 결정권자들로 구성된)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였음을 규명하고 살인자를 전기의자에 앉히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면, 법원은 전기의자 형을 명할 수 있다"와 같은 구절은, 똑같은 법의 진술이지만 내용은 훨씬 명확하다.(261쪽, 같은 책)

과연 그럴까? 『CSI 과학수사대』 같은 미국 드라마를 많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다시피, 일급 살인은 고의를 가지고 계획하여 벌이는 살인이다. 그런데 우리는 실수로도 사람을 죽인다. 혹은, 범죄 발생 순간에는 고의가 있었는데(내가 점마를 칵 죽이삘라!), 그게 딱히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라 가령 술을 마시고 언성을 높이다가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경우를 두고 '아무튼 사람이 사람을 죽였으니까'라며, 똑같이 취급하는 것은 과연 정의로운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의도를 가지고 계획을 짜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우발적으로 살해의 고의를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것, 우발적이었고 살인의 의도도 없이 어쩌다가 사람을 죽게 하는 것과, 다르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해야 할 것이므로, 일급 살인은 '언어 낭비'가 아니다.

오히려 로델의 표현이야말로 애매하지 않은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과연 '명료'한가? 앞서 우리가 대충 분석한 것만 놓고 보더라도, 적어도 세 가지 경우의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은가. 어떤 법률 용어는, 아니 수많은 법률 용어는, 처음 들었을 때 이해할 수 없고 공부를 해도 애매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법률 용어가 아닌 일상의 언어, 저잣거리의 민중들이 주고받는 살아있는 시장의 언어라고 해서, 특별히 더 명료하거나 '진짜'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논리적 추론 오류 아닐까?

법조계 바깥에서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으리라 추측되는 로델은, 대부분의 '반항아'들이 그렇듯이, 자신이 성장해온 제도와 맥락을 과도하게 조롱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정작 경험해본 적 없는 그 외의 영역들에 대한 환상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법은 본질적으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다. 그 말은, 헛소리를 중얼거리며 잘난척하는 법조계 바깥의 세상에 나가보면, 평범하고도 현명한 사람들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갈등이 넘쳐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갈등이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조정 위원회에서 해결된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겠지만, 그 대안은 로델 본인이 비웃는 연방대법원의 법관들이 내뱉는 법 원칙만큼 공허할 뿐이다.

4.

이쯤에서 서평을 끝낼 수도 있겠지만,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법'에 대한 책이므로, 잠시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앞서 필자는 로델의 책 <저주받으리라>가 '반항아'의 책이라고, 그로 인한 구조적 혹은 태생적 단점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문제는 이 책을 들고 한국의 현실을 바라보면, 도저히 우리의 법 현실을 옹호해줄 수 없다는 데 있다. 한국의 대법관과 헌법재판관들은 로델이 비판한 바로 그 방식 그대로 '법'을 주무르며 정의를 왜곡한다.


▲ 2009년 일부 법률가들이 비정규직법과 최저임금법 등 정부가 밀어붙이는 노동관계법을 막기 위해 릴레이 단식에 들어갔다. ⓒ프레시안

수많은 판결이 있지만 그 중 딱 하나만 짚어보자. 아니, 실은 두 개인데, 하나로 칠 수 있다. 아무튼 이런 것이다.

1. 대법원 2013년 12월 18일 선고 2012다89399 전원합의체 판결

2. 대법원 2013년 12월 18일 선고 2012다94643 전원합의체 판결

날짜를 보고 뭔가 감이 오는 분이 계실 수도 있겠다. 그렇다. 이것은 그 유명한 '통상임금 판결', 혹은 '동희오토 사건'이다. 이 사건의 쟁점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명목으로 지급되어온 수많은 수당들이 통상임금에 포함되느냐 아니냐였다. 그 판단의 기준을 정한다는 측면에서, 사법부의 판결을 통한 '법 창조'가 이루어지기에 전원합의체가 소집되었던 것이다.

대법원은 통상임금의 범위가 어떻게 되는지, 그 요건 등을 하나씩 따졌고, 이 사건의 당사자인 동희오토 노동자들의 상여금이 그 통상임금에 속하는지 아닌지를 검토했다. 법원에서 제시한 여러 기준선을 통과한 그들의 상여금은 통상임금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이제, 여태까지 사측에서 주지 않던 돈을 받을 차례였다. 근로기준법에 강행규정으로, 즉 당사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지켜야만 하는 규정으로 정해져 있는 탓에, 사장님은 노동자들에게 통상임금을 지급해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대법원은 '요술'을 부리기 시작한다.

"단체협약 등 노사합의의 내용이 근로기준법의 강행규정을 위반하여 무효인 경우에, 그 무효를 주장하는 것이 신의칙에 위배되는 권리의 행사라는 이유로 이를 배척한다면 강행규정으로 인한 입법취지를 몰각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므로, 그러한 주장이 신의칙에 위배된다고 볼 수 없음이 원칙"이라면서도, "기업의 지속적인 존립과 성장은 노사 양측이 다 같이 추구하여야 할 공동의 목표이므로 기업 재정에 심각한 타격을 주어 경영상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의 존립기반에 영향을 주면서까지 임금을 인상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갑자기 판사님들이 사장님의 입장에서 법봉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경우 근로자 측의 추가 법정 수당 청구는 신의칙에 위배되어 받아들일 수 없다."(모두 2012다89399 전합)

근로기준법에 명시되어 있는 돈을 받겠다는데, 그것은 강행규정이므로 당사자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지켜져야 할 규정임에도, '신의칙', 즉 신의성실의 원칙을 들어 '그동안 떼인 임금을 못 주겠다'고 판결해버린 것이다. 법률가가 아닌 본 필자가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대법관 이인복, 이상훈, 김신의 반대의견을 인용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 사건은 근로자가 자신이 제공한 근로에 대한 정당한 임금을 받지 못하였음을 이유로 사용자에게 근로기준법이 정한 바에 따른 임금의 지급을 구하는 사건이다. 이에 대한 다수의견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즉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해당하고, 이것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하기로 근로자와 사용자가 합의하였더라도 그러한 합의는 근로기준법에 위배되어 무효인 것은 맞으나, 근로자가 그 합의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하여 산정한 수당과 퇴직금을 추가로 청구하는 것은 신의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로기준법의 강행규정성을 인정하면서도 신의칙으로 그 강행규정성을 배척하는 다수의견의 논리는 너무 낯선 것이어서 당혹감마저 든다. 그리고 거듭 살펴보아도 그 논리에서 합리성을 찾을 수 없다. (2012다89399 전합)

한국의 법체계는 노예계약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로 근로기준법 같은 강행규정을 만들 필요도 없이, 반사회적 법률행위이므로 원칙적으로 무효다. 하지만 대법원이 통상임금 판결에 적용한 신의칙이, 과연 개별적인 염전 노동 계약에서 적용할 여지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용자, 즉 염전 주인 입장에서 생각해보라. 오갈 데 없는 덜떨어진 놈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일 시켜줬더니, 이제 와서 돈 내놓으라고 까분다고, 저 염전 노예놈은 '신의성실의 원칙'을 위반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노예라는 게 딴 게 아니다. 강제로 일을 시키고 제대로 된 임금과 복지를 제공하지 않으며, 사업장으로부터의 이탈을 막으면 그것이 바로 노예다. 따라서 임금을 떼어먹는 사장님들은 어느 정도 상대방을 노예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대법원은, 그 고결하고도 위대한 '신의성실의 원칙'을 내세워, 동희오토 사장님이 노동자들의 통상임금을 떼어먹는 것이 정의롭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2013년 12월 18일, <저주받으리라>의 초판이 나왔던 1939년으로부터 무려 74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 동희오토 사내하청지회 투쟁 당시 선전전. ⓒ동희오토 사내하청지회

5.

<저주받으리라>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추진할 때, 그 법안들이 대법원에서 판판이 위헌 판결을 받아 무산되던 시절의 산물이다. 공허한 법 원칙을 들이밀며 현실의 변화를 방해하는 연방대법원은, 32세의 젊은 로스쿨 교수 프레드 로델에게, 너무도 참기 힘든 존재였을 것이다. <저주받으리라>는 그와 같은 현실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하고, 그 현실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서(가령 정계에 진출하여) 싸움을 벌이지도 못하는, '반항아'의 작품이다.

앞서도 말했듯 본 필자는 이런 반항아적인 것들에 대해 그리 관대하지 않다. 이럴 때는 보수적이다. 아마 평소와 같았다면 <저주받으리라>에 대해, 좀 더 낮은 평가를 내린 후 서평을 마무리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방금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21세기의 오늘날에도, 한국의 대법원은 추상적인 법 원칙을 도깨비 방망이처럼 휘두르며 사장님 회장님 돈 가진 자들의 편에서 원님 재판을 벌인다. 이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라고, 미국 법학계의 비뚤어진 신동처럼 외치고 싶어만 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과 로델이 비판하던 미국의 상황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르다. 당시의 미국은 법 원칙이 과잉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현재의 한국은 법 원칙, 가령 당사자의 합의와는 무관하게 강행규정은 지켜져야 한다는 원칙 등이 자의적으로 무시되고 있는 형국이다. 물론 쉬운 문장으로 판결문을 쓰고 국민들의 접근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그 모든 부수적인 논의들은 다 옳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대중적 법학 교육이다. 국민들은 그에 기반하여 판사, 검사, 변호사들에게 더욱 엄격하게 법적 원칙을 지키라고 강요해야 한다. 월급 훔쳐간 사장놈에게 월급 떼어먹으라는 신의칙이 무슨 놈의 신의칙이냐고, 법치국가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호통을 쳐야 한다.

법학과나 로스쿨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저주받으리라>는 유익한 영미법 보충 교재가 될 수 있다. 40년간 예일대학교 로스쿨의 헌법학 교수를 역임한 저자 프레드 로델의 글 솜씨가 탁월할 뿐 아니라, 등장하는 다양한 영미법의 용어 및 사례들을 역자가 성실히 해설해 두었기 때문이다. 법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시 환기시키기 위해, 법조계 외부의 독자가 읽을 경우에도, 나쁘지 않은 독서 경험을 제공할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법에 침을 뱉고 등을 돌리기 전에 일단 그것을 좀 더 잘 알아야 한다. 국민들이 아는 만큼, 이른바 '사회지도층'들도 조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보자면 <저주받으리라>는 그리 적절한 책이 아닐 수도 있다. 너희들 배운 놈들은 다 똑같다고 조롱하는 반항아적인 책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분야를 막론하고 적잖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1937년에 미국에서 나온 책이, 2014년의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들을 계몽하며 시민적 사기를 진작시킬 수는 없다. 그러므로 <저주받으리라>는 좋은 참고 문헌이되, 참고 문헌으로 읽고 극복해야 할, 그런 텍스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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