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핵우산'과 미국·일본의 이중성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핵우산'과 미국·일본의 이중성 샌프란시스코 체제: 미-일-중 관계의 과거, 현재, 미래 <5>
일본은 틈만 나면 자신들이 세계 유일의 핵피폭국가임을 내세운다. 그러나 6.25전쟁 이래 핵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태도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예컨대 6.25전쟁 중 미국이 한반도에 대한 핵공격을 검토했을 때 일본에서는 아무런 반대운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본에서 의미 있는 반핵운동이 일어난 것은 1954년 3월 미국의 비키니 섬 수소폭탄 실험으로 자국민의 인명피해가 일어났을 때였다. 결국 자신들에 대한 피해가 일어났을 때에야 비로소 반핵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일본 정치가들은 자체 핵보유를 시도하기도 했고 적국에 대해서는 미국의 핵공격을 적극 주문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57년 5월 기시 총리는 '방어적 목적'으로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은 위헌이 아니라고 의회 상임위에서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후임 총리 이케다 햐야토(池田勇人)는 1961년 11월 미국 국무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일본이 독자적인 핵무기를 보유해야 하는 게 아닌지 당당하게 묻기도 했다.(이에 대해 미국은 핵무기 확산을 반대한다고 대답했다) 중국의 최초 핵실험 두 달 뒤인 1964년 12월 사토 에이사쿠 (佐藤 榮作)총리는 주일 미국 대사에게 "일본이 핵무기를 개발할 수도 있다"고 알렸다. 한 달 뒤 사토는 미국 국무장관에게 "중국과 전쟁하게 된다면, 일본은 미국이 즉각 핵무기로 보복해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미국은 자국의 핵무기를 핵우산이라고 표현하면서 미국의 핵무기는 오로지 방어적으로만 쓰인다는 듯이 굴었다. 그러나 미국은 세계 최초로 유일하게 핵무기를 전쟁 목적으로 사용한 나라라는 점에서 이는 그럴 듯한 사탕발림에 불과한 말이다. 미국은 6.25전쟁 동안 몇 차례에 걸쳐 한반도에 대한 핵공격을 검토했고 나아가 모의실험을 했으며, 중국에 대해서도 3차례 이상 핵공격을 검토했다. 대만해협 위기가 처음으로 일어난 1954년 9월 1차 대만해협 위기, 2차 대만해협 위기가 일어났던 1958년 8월, 그리고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때였다. 당시 오키나와에 있던 핵미사일은 15분 내에 발사할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 결국 핵우산이란 말은 결코 방어 목적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며 경우에 따라 핵공격으로 전환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우어 교수는 “이런 위선 속에서 일본은, 세계 유일의 원폭 피폭국가라는 뼈아픈 수난을 바탕으로 겉치레 말이나 형식적인 제스처를 넘어 핵군축 및 궁극적인 핵폐기를 위해 선도적 역할을 할 수도 있었던 기회를-아마도 영원히-잃어버린 것 같다. 그 자신이 핵무기의 비극을 경험하고서도 말과 결의안이라는 상징적인 행위를 넘어서 진정으로 핵무기 통제와 궁극적인 폐기를 위한 활동을 선도할 기회를 말이다.”라고 지적한다. 나아가 “또한 '핵우산 체제'를 '억지력'이라고 포장하는 미국과 일본의 지지자들은, 핵공격의 목표물이 될 나라들에게는 미국의 핵우산이 위협적이고 도발적으로 비쳐진다는 사실도 더 이상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고 비판한다. <편집자>

▲ 히로시마 원폭 장면 ⓒ프레시안 자료사진

(6) '핵우산'

샌프란시스코 체제에 편입됨으로써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 들어갔다. ‘핵우산’이란 말은 미국이 가진 핵무기가 오로지 방어적으로만 쓰인다는 것을 시사하는 그럴 듯한 조어다. 이와는 반대로 1949년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하면서 핵무기 보유국이 된 소련의 핵무기는 도발적이고 위협적인 무기로 묘사됐다. 핵보유국인 중국과 북한(각각 최초의 핵실험은 1964년과 2006년에 있었다)에 대해서도 같은 인식이 부여됐다.

“(핵)우산” 논쟁에 담긴 모순을 가려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은 전쟁 목적에 핵무기를 사용한 유일한 나라이며 아직도 그러하다. 히로시마(広島)와 나가사키(長崎) 피폭 이후 일본은 핵무기의 추악함을 증언할 수 있는 특별한 위치에 놓이게 됐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구축되었을 당시 일본에서 반핵 운동은 미미했다. 1949년까지 미 점령군은 핵무기 피폭의 실상을 알리는 글과 영상들을 모두 검열했다. 반미주의와 대중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킬 것을 우려해서였다. 그 이후 미 점령이 끝날 때까지도 핵문제에 대한 일본 국민의 관심은 미미했다. 놀랍게도, 미 원폭의 피해를 입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사진이 공개된 것은 1952년 8월 6일자(히로시마 피폭 7주년이자 평화조약이 발효된 지 3개월이 약간 지난 후)의 한 잡지에 의해서였다. 기본적으로 일본 정부는, 일본 국민이 자신들이 겪은 핵 피폭의 참혹함을 진지하게 검토하기도 전에 미국의 “핵우산” 아래 숨어버렸다.

그러나 동시에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이전에 미국이 한반도를 대상으로 핵 공격을 검토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의 6.25전쟁 전면 개입 이틀 후인 1950년 11월 30일의 기자회견에서 해리 트루만 대통령은 원폭 사용 검토를 시사함으로써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이에 따른 공포(그리고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는 가시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6.25 개전 초기부터 미 정부와 군부의 각 급에서 원폭 사용이 심각하게 검토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전쟁 발발 한 달 후인 1950년 7월 24일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만일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한다면 이는 “원폭을 사용할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5개월이 지나 트루만 대통령의 원폭 사용 시사 기자회견이 있은 직후, 맥아더는 34개의 원폭을 투하해 중국과 북한 국경을 차단한다는 실제 작전계획을 합참에 제출했다. 한국전쟁이 막바지 고비에 있던 1951년 3월 말 경, 오키나와(沖繩島)의 카데나(嘉手納) 공군기지에서는 원자폭탄을 폭격기에 싣고 작전에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폭탄에 핵폭발 장치만 빼놓은 상태였다. 다음 달 미 국방부는 완벽한 원자폭탄 무기들을 괌 기지에 임시로 옮겼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 수주일 후인 1951년 9월말에서 10월 초에 걸쳐 가장 끔찍한 위기 대응 계획이 주일 미군기지에서 진행됐다. '허드슨항 작전'으로 명명된 이 비밀 계획에는 B-29 폭격기들이 카데나 기지에서 발진해 한반도의 목표물에 대해 핵공격을 수행하는 모의실험이었다. 실제로 원자폭탄을 탑재하지는 않은 이 시험비행은 도쿄 인근 요코타(橫田) 공군기지에서 진행됐다. 미국이 아시아의 새로운 적대국(일본이 아닌 중국과 북한)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음에도 일본의 반핵 정서는 그다지 큰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러한 사정은 2년 후(1952년 4월) 일본이 미국의 점령에서 벗어나 독립할 때까지도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핵무기에 대한 반대여론을 자극한 것은 '비키니 사건'이었다. 미국이 1954년 3월 1일 마셜군도의 비키니 섬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하면서 생긴 낙진이 태평양 한복판 7000평방마일에 걸쳐 확산됐다. 비키니 폭발은 히로시마를 덮쳤던 원자폭탄의 1000배 정도나 파괴력이 강했다. 미국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방사능 낙진은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후쿠류마루(福龍丸)'이라는 이름의 참치잡이 어선에 타고 있던 23명의 선원들이 낙진에 노출됐다. 어선은 미국이 실험을 앞두고 설정한 위험지역 밖에 있었다. 선원 모두가 일본으로 귀항하자마자 피폭 증세로 입원했다. 어선에서 무선통신을 담당했던 선원은 1954년 9월 23일 사망했다. 낙진에 피폭된 지 6개월 만이었다.

'비키니 사건'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과 미국의 관계에서 최대 위기를 촉발시켰다. 선원들이 피폭을 당한 사건으로 태평양에서 잡히는 어류도 오염됐을 것이라는 우려도 확산됐다. 이런 우려는 낙진에 의한 피폭을 부정하거나 기만하려는 미국의 대응 탓에 분노로 바뀌었다. 1955년 중반 수소폭탄 금지를 촉구하는 전국적인 청원운동이 벌어져 수천 만 명의 서명을 얻었고, 풀뿌리 조직들이 모여 일본 최초의 반핵단체를 결성했다.

반핵 운동이 탄생한 시점은 미국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핵무기 배치를 비밀리에 강화하는 시기와 일치했다. 1954년 12월 미국은 오키나와에 '완전한 핵무기'들을 처음으로 배치했다. 또한 일본에 있는 다른 여러 기지에 핵탄두만 뺀 무기 등 언제든지 핵무기가 될 수 있는 부품들을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의 군부는 이런 핵무기들을 최소한 세 차례 중국에 대해 사용할 것을 심각하게 검토했었다. 대만해협 위기가 처음으로 일어난 1954년 9월 1차 대만해협 위기, 2차 대만해협 위기가 일어났던 1958년 8월, 그리고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때였다. 당시 오키나와에 있던 핵미사일은 15분 내에 발사할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

1954년에서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된 1972년 사이, 19가지 종류의 핵무기가 배치됐다. 대부분 카데나 공군기지에 있었고, 그동안 미국이 보유한 핵무기는 항상 1000개 수준을 유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면서 일본 정부의 요청으로 핵무기들이 제거됐다. 일본의 다른 기지에 있었던 '핵무기 전용 가능 부품'들도 1965년에는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일본에 핵무기 배치 시대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1981년 에드윈 라이샤워 전 주일 미국 대사는 핵무기를 탑재한 미국의 군함들이 정기적으로 일본의 영해와 항구들에 진입했다는 것은 "상식이 아니냐"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비키니 사건' 이후 일본 안팎에서 '핵우산' 지지자들은 즉각 다각도로 공세를 폈다. 반핵운동은 극렬 공산주의자들이 조종하고 있는 것이며, 병적인 피해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비난을 퍼부은 것이다. 일본인들에게는 '핵 알레르기'라는 낙인을 찍었다. 핵을 선호하는 것은 건강한 것이고, 핵을 두려워하고 비판하는 것은 연약함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식으로 몰아붙였다.

동시에 미국은 일본 전역에서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을 장려하면서 핵무기 경쟁으로부터 시선을 돌리려는 캠페인을 집중적으로 벌였다. 2011년 후쿠시마 제1원전의 멜트다운으로 일본이 얼마나 핵에너지에 의존하고 있는지 부각될 때까지 '평화적인 핵' 캠페인은 성공적이었다. 후쿠시마 사태로 일본은 핵무기를 만들려는 결심만 하면 1년 이내에 핵무기로 전환될 수 있는 막대한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는 '사실상 핵무기 보유국'이라는 사실도 일깨웠다.

1950년대 일본의 보수 지도자들은 핵정책에 관한 한 진퇴양난의 처지에 있었다. 1960년대가 되면서 이들은 핵무기에 대한 국내의 반대를 잠재우기 위해 비핵화를 위한 그럴듯한 제스처를 내보였다. 예를 들어 1967년 당시 사토 에이사쿠 총리는 '비핵 3원칙'을 공표했다. '핵무기를 보유하지도, 만들지도 않고, 일본에 도입하지도 않는다'는 이 비핵 3원칙은 4년 뒤 의회에서 비준됐다. 일본은 1970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으며(1976년 비준), 사토 총리는 그 공로로 1974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다.

하지만 동시에 일본이 (미국의) 핵우산 체제에 있으며 미국의 핵정책에 확고하게 종속됐다는 사실은 비밀과 모순 속에 감춰졌다. 비키니 사건 이후 수년 동안 일본 관리들은 공적으로는 미국의 핵실험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지만, 사적으로는 “의회 내 야당 세력에 대한 작은 선물...기본적으로 국내용”이라며 미국 측을 안심시켰다. 일본 정부가 은밀하게 설명한 바에 따르면 일본의 공식 항의는 그저 “제스처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1960년 기시 총리 시절 미일 안보조약이 개정될 때 비밀조항(1959년부터 존재)에는 “일본에 중거리와 장거리 미사일을 포함한 핵무기, 그리고 이런 무기를 위한 기지 건설에 대해 양국 정부가 협의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와 마찬가지로 1972년 오키나와가 반환되기 직전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사토 총리는 1969년 11월 비밀협정을 맺었다. 미국은 비상시에 오키나와에 핵무기를 다시 배치할 수 있고, 중대한 위기 때는 핵저장고가 있는 오키나와의 카데나, 나하(那覇), 헤노코(邊野古), 그리고 나이키 허큘리스(지대공 미사일) 부대에 핵무기의 비상 배치와 가동을 승인한다는 내용이다.

냉전에서 탈냉전 이후에 이르는 동안 일본의 영향력 있는 정치가와 관리들은 어떤 때는 사적으로, 그보다는 자주 공적으로 자신들은 “핵 알레르기”를 앓고 있지 않다고 분명히 말했다. 예를 들어 1957년 5월 기시 총리는 '방어적 목적'으로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은 위헌이 아니라고 의회 상임위에서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후임 총리 이케다 햐야토는 1961년 11월 미국 국무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일본이 독자적인 핵무기를 보유해야 하는 게 아닌지 당당하게 묻기도 했다.(이에 대해 미국은 핵무기 확산을 반대한다고 대답했다)

중국의 최초 핵실험 두 달 뒤인 1964년 12월 사토 총리는 주일 미국 대사에게 "일본이 핵무기를 개발할 수도 있다"고 알렸다. 한 달 뒤 사토는 미국 국무장관에게 "중국과 전쟁하게 된다면, 일본은 미국이 즉각 핵무기로 보복해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일본은 핵확산금지조약에 조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전술용 핵무기 개발의 타당성을 검토했다. 지난 수 십 년간 일본의 다양한 보수 정치인 및 관리들은 일본의 핵 보유는 헌법상 용인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략적으로도 바람직한 것이라는 의견을 공식적으로 표명했다.

이런 위선 속에서 일본은, 세계 유일의 원폭 피폭국가라는 뼈아픈 수난을 바탕으로 겉치레 말이나 형식적인 제스처를 넘어 핵군축 및 궁극적인 핵폐기를 위해 선도적 역할을 할 수도 있었던 기회를-아마도 영원히-잃어버린 것 같다. 그 자신이 핵무기의 비극을 경험하고서도 말과 결의안이라는 상징적인 행위를 넘어서 진정으로 핵무기 통제와 궁극적인 폐기를 위한 활동을 선도할 기회를 말이다.

또한 '핵우산 체제'를 '억지력'이라고 포장하는 미국과 일본의 지지자들은, 핵공격의 목표물이 될 나라들에는 미국의 핵우산이 위협적이고 도발적으로 비쳐진다는 사실도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번역 : 이승선 기자)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원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2-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