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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봉쇄와 일본의 아시아 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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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봉쇄와 일본의 아시아 이탈 샌프란시스코 체제: 미-일-중 관계의 과거, 현재, 미래 <6>
1971년 미국은 닉슨의 방중 사실을 정부 공식발표 불과 15분 전에 일본에 통보했다. 일본으로서는 쓰디쓴 배신감과 커다란 수치를 참아야만 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당시에도 미국의 강요에 의해 대만 국민당 정권을 인정해야 했던 일본은 이제 미국의 뒤를 따라 베이징 정부를 인정하게 된다.

1972년 이후 중국과 일본은 한편으로는 (경제) 협력을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정치적) 대결을 벌이는 모순된 길을 걸어왔다. 중·일이 화해보다는 대결적 자세로 나아가는 데는 대만 문제, 그리고 역사 논쟁 문제가 있다. 중국은 미국과 일본이 대만의 중국 통일을 원치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여기 두 나라 간의 역사 논쟁이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중국은 미국과 일본이 여전히 자신을 봉쇄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일본은 미국의 뒤를 따라 중국 봉쇄의 하위파트너로 역할을 하고 있는 게 현재 동아시아의 현실이다. 다우어 교수는 “일본과 중국이 1970년대 이후 아무리 자주, 그리고 아무리 진지하게 아시아의 평화와 진보를 위해 협력할 것을 약속해왔다고 하더라도, 또한 상호 교류와 경제적 상호의존이 아무리 커졌다 하더라도, 결국 일본 지도자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미·일 혈맹관계의 지속”이라고 말한다. <편집자>

▲ 지난해 10월 3일 일본에서 열린 미일 외교국방 2+2 회담. 회담 이후 미국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했다. 왼쪽부터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 척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 오노데라 이쓰노리 일본 방위상,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 ⓒAP=연합뉴스

(7) 중국 봉쇄와 일본의 아시아 이탈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70년이 다 돼가는데도 중국과 일본이 진정한 평화(deep peace)를 이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19세기 중엽 서구 열강이 동아시아에 침범하기 시작한 이후 중국과 일본은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현대의 중국인들에게 중국의 근대사는 외세에 의한 수난의 역사, 그 자체였다. 1840년 중국은 제1차 아편전쟁에서 처참하게 패배하면서 영국 등 서구 제국 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을 맺어야 했다.

반면 서구에 도전에 대한 일본의 대응은 대단한 성공이었다. 일본은 ‘아시아로부터의 이탈(脫亞)’이라는 구호 아래 신속한 '서구화'에 성공했다. 일견 대단해 보이는 일본의 성공을 알리는 첫 번째 신호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의 승리였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중국을 궤멸시키면서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중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고 대만을 첫 식민지로 획득했다(조선은 1910년 병합됐다). 전쟁의 결과 일본은 열강의 대열에 올랐다. 1945년에 이르기까지 중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은 1895년의 전쟁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론적으로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전리품을 빼앗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기회가 돼야 했다.

1895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의해 패배당하고, 국토가 잘려나가며, 침략 당하고, 점령당한 치욕을 중국은 잊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반면 일본은 한때 정복자로서의(또한 전쟁 이전 아시아 유일의 서구화된 국가, 그리고 전후에는 경제 대국으로서의) 오만함을 버리지 못했다. 이처럼 지극히 상반되고 깊이 각인된 역사의 기억은 현재의 중·일 관계에 매우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동시에 유념해야 할 것은 현재 중국 민족주의를 타오르게 하는 역사적 모욕을 가한 주체에는 일본뿐만 아니라 서구 열강까지 포함된다는 점이다.

중국에게 있어 역사적 분노의 축적은 1945년 일본의 패전이나 1949년 중국의 건국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1951년 평화협상에서 중국이 배제되는 한편, 일본이 미국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 중국에 대한 '불승인'과 '봉쇄' 정책에 참여하면서 더욱 복잡해졌다. (미·일이 중국과의 관계를 회복한) 1972년까지 20년 동안 일본은 아시아 대륙에서 떨어져 나와 미국의 품에 넘어간 상황이었다. 냉전적 구도에서 일본과 중국의 적대적 관계가 지속되는 것은 환영받고 권장될 일이었다. 화해와 치유는 방해받은 반면, 과거사를 청산하는 데 저해가 되는 모든 요소들은 차근차근 뿌리를 내려갔다.

미국 봉쇄정책의 공개적 전제는 간단했다. 미국이 이끄는 '자유세계'는 소련이라는 괴수가 움직이는 단일한 공산주의 진영과 대적하고 있다. 중국은 소련의 꼭두각시 또는 위성국가에 불과할 뿐이다. 반면 다시 (유럽의 독일처럼) 아시아의 공장이 될 가능성을 지닌 일본은 양극체제에서 공산주의 진영과 밀접한 교류를 갖도록 내버려두면 세계 권력의 균형을 자유세계에 유리하게 바꿔놓을 수 있는 나라로 자리매김 됐다.

그다음, 공개적으로 인정되는 편은 아니지만 중국과 일본을 대립시키는 정책의 배경에는 또 다른 전제가 있다. 바로 인종주의, 그리고 '탈아'라는 일본의 오랜 심리상태를 이용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초안을 작성한 존 포스터 덜레스는(훗날 미 국무장관이 된다) 1951년 1월 도쿄에서 한 영국 외교관과의 비밀대화에서 이런 견해를 밝혔다. “일본인들은 아시아 본토에 거주하는 다른 나라 국민들에 비해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느끼고” 있으며 이에 따라 “자신들은 서구 국가에 속하거나 또는 서구국가로 인정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두 앵글로 외교관들은 또 일본이 '엘리트 앵글로색슨 클럽'의 일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토록 처참한 전쟁을 치르고 6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백인의 우월감, 그리고 일본의 서구에 대한 왜곡된 선망과 아시아에 대한 경멸 등이 어우러지면서 미국은 과거의 적, 일본을 자신으로 파트너로 받아들인 것이다.

대체로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일본의 많은 보수파들은 일본과 중국을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일본에 관한 한, 봉쇄정책이 철저히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1952년에서 1972년 사이 일본과 중국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교역과 함께 비정부 간, 또는 준 공식적인 정치, 문화, 기업, 노동 간 교류가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일본이 중국과 외교관계를 복원하거나 중공을 중국의 유일한 정부로 인정하는 것은 (미국에 의해) 저지됐다.

1971년 7월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뜻밖에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봉쇄정책을 버리고 조만간 중공을 방문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미국의 대(對)중국정책 180도 전환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고 일본에는 쓰디 쓴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미국은 닉슨 방중에 관한 정부 발표 불과 15분 전에 이 사실을 일본에 통보한 것이다. 이런 공개적인 모욕은 20년 전 중국에 대한 봉쇄정책에 일본의 참여를 강요할 때처럼 오만한 것이었다. 일본으로서는 정반대로의 방향 선회를 갑자기 강요당한 셈이다. 닉슨의 화해정책으로 일본과 중국의 외교관계는 1972년 복원됐다.

미국의 대중국 봉쇄정책의 포기가 갖는 중요성을 온전히 파악하려면 다른 사태 전개와의 관계를 들여다봐야 한다. 이 같은 180도 정책 선회의 배경에는 임박한 베트남전쟁의 종식, 오키나와 행정권의 일본 반환 외에도 일본의 “경제 기적”과 이것이 일본의 재군사화에 미칠 영향까지 고려됐다. 닉슨의 방중 전에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를 만나 사전 회담을 하고 돌아온 헨리 키신저는 닉슨에게 “일본 군국주의 부활에 대한 우려가 회담의 주요 의제였다”고 보고했다. 1972년 닉슨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저우언라이와의 회담에서도 같은 주제가 논의됐다. 만일 일본 지도자들이 미·중 지도자 간의 회담 내용을 알았다면 그들이 느꼈을 굴욕감은 닉슨 방중 사실을 공식 발표 불과 15분 전에 통보받았을 때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을 것으로 컸을 것이다.

▲ 닉슨(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마오쩌둥 중국 주석이 악수하고 있는 장면 ⓒ프레시안 자료사진

저우언라이는 일본의 경제 기적이 해외 팽창으로, 이는 다시 군사적 팽창으로-특히 일본인의 전통적인 군사적 사고방식을 감안하면-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를 미국 측에 전달했다. 심지어 저우언라이는 일본을 “미친 말”이라고 표현하면서, 중국은 가까운 시일 내에 일본이 대만과 남한에 군사력을 파견하지 않을까 우려한다고 말했다. 중국은 미·일 안보조약을 폐기하고, 일본이 비무장 중립국가로 되돌아가기를 원했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중국의 제안을 키신저와 닉슨은 거부했다.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에 대한 우려가 비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키신저의 말을 빌리자면) “역설적이게도 미군이 일본에 주둔해야 일본(의 군국주의적 팽창)을 억제할 수 있으며, 반대로 미군이 일본을 떠나면 억제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으로 중국을 설득한 것이다. 닉슨은 미·일 안보관계를 지속하는 것이야말로 “저우 총리가 정확하게 지적하신 대로 일본의 경제적 팽창이 군사적 팽창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며...만일 우리가 일본과 긴밀한 군사적 관계를 갖지 않는다면 일본은 우리에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을 것” 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일본의 군사주의를 억제하기 위해 미군이 일본에 주둔하고 있다는 (미국 지도자의) 솔직한 발언은 일본의 친미파 정치인들을 매우 당혹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또한 키신저는 일본이 중립화된다면 “아마도 매우 악성의 민족주의로 치달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닉슨 또한 미국과의 군사 관계가 없다면 “팽창주의적 성향과 역사”를 지닌 일본인들은 “군국주의자들의 요구에 쉽사리 굴복할 것”이라고 동조했다.

회담 도중 저우언라이의 지속적인 우려 표명에 대해 키신저는 일본인의 민족성에 대해 준엄한 평가를 내렸다. "중국의 사상적 관점은 세계적인 반면, 일본은 전통적으로 종족 위주"이며, “갑작스런 폭발적 변화에 쉽게 휩쓸리는” 국가라는 것이었다. 나아가 미국은 “일본인들의 충동과 그들의 경제 팽창이 갖는 의미에 대해 한 점의 환상도 갖고 있지 않다”고 선언했다. 저우언라이 총리가 미국의 핵우산 체제에서 일본이 다른 국가들에 대해 더욱 공격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자, 키신저는 "핵우산을 거두면 일본은 핵무기를 재빨리 만들 것"이라면서 "그런 상황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반박했다. 미·일 안보조약과 미군의 일본 주둔이라는 제약이 사라지면 일본이 어떤 짓을 할지 모르며 그 경우 지역 불안정을 초래할 것이라는 게 미국 측의 논지였다.

이런 주장으로 미국은 중국을 설득했고 이후 중국은 미·일 안보관계에 대한 비난을 중단했다. 미국의 고위 지도자가 일본에 대한 중국의 불신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중국은 별도의 화해 선언을 했다. 미·일·중이 화해를 이룬 밀월 기간 동안에는 소련에 대한 공통의 전략적 우려가 과거 이들 간의 적대의식을 수면 아래 밀어 넣도록 작용을 했다.

공식적으로 중국과 일본의 화해는 1972년에서 2008년 사이에 발표된 4개의 공동성명에서 확인됐다. 이들 선언은 양국 간의 관계를 복원하고 강화시켜줬다. 이에 따라 모든 부문에서, 특히 기업, 통상, 기술 이전 분야에서 상호 이익이 되는 교류가 이뤄졌다. 하지만 우호와 양자 간 통합에 관한 구체적 선언에도 불구하고 화해는 취약했으며 진정한 평화를 보장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2012년 9월 시작된 센카쿠(尖角列島, 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열도 분쟁의 심화는 이런 취약함을 보여주는 가장 놀라운 사례다. 그러나 이는 관계 정상화 직후 1980년대부터 이미 드러나기 시작한 긴장과 균열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중·일 간의 진정한 화해와 관련해, 1972년부터 두 가지 사태가 평행선을 달리며 모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즉 한편으로는 두 나라가 화해의 길을, 다른 한편으로는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 기원하는 긴장의 심화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사례는 대만 문제다. 미국과 일본이 중공을 '중국의 유일한 정부'라고 인정한 지 40년이 지나도록 대만은 갈등과 불신의 진원지로 남아있다. 중국은 미국과 일본이 중국의 통일을 실제로 원치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의 합동군사훈련 대부분은 대만해협 위기에 대한 대응을 상정해서 이뤄지는 것이다. “중국 봉쇄”는 냉전 초기 (미국의) 정책과 현재의 상황이 긴밀히 맞물려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로 남아 있는 것이다. 냉전적 봉쇄정책이 시행된 지 60년, 그리고 표면적으로 이러한 “비정상적 상태”를 끝내겠다고 선언한 지 40년이 지난 2010년대까지도 미국과 일본의 전략가 및 학자들은 새로운 중국의 위협에 대해 경고하고 중국에 대한 새로운 군사적 봉쇄 정책을 요구하고 있다.

아마도 불신을 더욱 악화시키는 최악의 유산은 '전쟁 역사'를 둘러싼 논쟁일 것이다. 관계 정상화 이후 역사 논쟁은 더욱 첨예해졌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 1980년대 시작된 시장 개혁적 개혁에 의해 힘을 잃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대체하기 위해 반외세 민족주의가 의도적으로 조장됐다. 수난과 모멸의 중국의 역사적 기억에서 일본이 주범으로 낙인 찍힌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중국에 대해 온갖 악행들을 자행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에 의한 일본의) 악마화는 전후 일본 우익 민족주의자들이 제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침략과 전쟁범죄를 전면 부정함으로써 더욱 강화됐다(일본 측의 부정에 대해 중국 측의 규탄은 더욱 강화됐기 때문이다).

민족적 자존심과 (일본 침략에 따른) 모멸감의 혼합에 의해 중국이 일본을 규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우익 민족주의자들 역시 같은 이유에서 중국에 맞대응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민족적 자존심은 패전의 역경을 무릅쓰고 전후 경제 대국이 됐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반면 자신들이 성전이라고 생각했던 행위를 외부에서는 전쟁 범죄, 학살이라고 비난하는 데에서 이들은 모멸감을 느낀다. 일본 우익은 자신들의 전쟁 기억에서 일본의 국민적 자존심에 오점이 될 부분들을 지워버리거나 최소한 축소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수정주의는 국내 유권자들을 겨냥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 은폐 및 축소 시도가 외부인의 눈에는 매우 부정적으로 비친다는 사실은 도외시한 채 말이다.

이들 우익세력에게 전쟁범죄에 대한 비난과 함께 패배의 책임은 매우 큰 부담으로-시간이 지나면서 부담은 더욱 커졌다-느껴졌으며, 이는 일본 사회에 파멸적 영향을 미쳤다. 전쟁의 기억들을 은폐하고 반복적인 부정으로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과와 유감 표명을 깎아내리는 행위들은 외부인들에게-외국 사람은 물론이고 일본 내의 많은 사려 깊은 사람들에게도-부정직할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팽창과 침략의 희생자들이 겪은 고통에 전혀 무신경한 것으로 보였다. 특히 한국과 중국인들에게 일본 우익의 이러한 행태는 일본이 (피해자에 대한) 공감이나 책임감, 죄의식, 유감의 뜻이 없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는 일본이 다시 한 번 “아시아로부터 떨어져 나갔다는 것(脫亞)을 의미했다.

일본과 중국이 1970년대 이후 아무리 자주, 그리고 아무리 진지하게 아시아의 평화와 진보를 위해 협력할 것을 약속해왔다고 하더라도, 또한 상호 교류와 경제적 상호의존이 아무리 커졌다 하더라도, 결국 일본 지도자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미·일 혈맹관계의 지속이었던 것이다.

(번역 : 이승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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